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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111화 (111/141)

#111화

품에 얌전히 안긴 채, 잠에 빠진 듯 고른 숨소리를 내쉬는 율리아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 순간을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꿈꿨었는지.

제멋대로 지독하게 꿈에 나타나서는 이때까지 느껴 왔던 모든 충만감을 되새겨 주었다가 눈을 뜨면 그 모든 감각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며 뒤이어 찾아오는 공허함을…… 종결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더는…… 당신을 놓지 않을 겁니다.”

수도로…… 율리아를 다시 데려가게 된다면 저택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직 시간은 많았으니, 천천히 설득하면 함께 수도로 올라갈 수 있을 터였다.

그녀에게 약속했던 대로, 수도에서 할 일을 전부 끝내고 이곳으로 온 후, 함께 영지로 내려가는 방법도 있지만.

혹시라도 율리아를 혼자 두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면 그녀의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는 전제를 지워 낼 수가 없었다.

율리아는 변덕이 무척 심한 사람이었으니까.

“…….”

만약 설득되지 않는다면 납치도 강행할 생각이 다분했다.

그렇지만…… 미움받고 싶지는 않았다.

가능하다면 설득을 통해 데려가고 싶으니, 납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차라리 원하는 게 뚜렷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랬더라면 원하는 걸 계속 끊임없이 주며 곁에 붙잡아 둘 수 있었을 텐데. 율리아에게 욕망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욕망을 숨기는 게 익숙한 건지. 아니면 욕망이 없는 건지. 욕망이 있더라도 무엇을 원하는지 본인조차도 모를 수도 있다.

그러니 또다시 율리아에게 자유를 허용했다가, 또다시 나를 떠나는 행동을 보일지도 모른다.

그건 싫었다. 율리아가 처음부터 삶에 없었더라면 모르겠지만, 이미 그녀와 함께하는 삶을 경험한 이후부터는 놓아줄 수 없었다.

처음에야 그녀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도망치는 것을 바라만 봤지만, 두 번은 없었다.

“좋은 꿈 꾸세요, 율리아.”

뺨에 붙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정리해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사랑스러운 율리아를 남들이 볼 수 없는 곳에 꼭꼭 숨기고, 오로지 나만이 독점하고 싶었다.

* * *

이불의 온기라기에는 너무 따뜻했다. 마치 사람의 체온처럼.

몸을 감싸는 이 묵직함은 결코 이불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약간의 불편함에 결국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깼습니까?”

“……체스터?”

정신이 몽롱했다.

또다시 이 남자에 대한 지독한 갈망과 서글픈 그리움으로 인해 환청에 연이은 환영이라도 보는 걸까.

사랑하는데 미웠다.

가끔 눈을 감으면 내가 죽는 꿈을 꾸었으니까. 몇 번이고, 이 남자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는 꿈을.

그래서 사랑하지만 미우면서 동시에 무서웠다. 그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 버릴까.

“당신이 미워요, 체스터.”

환영이 맞거나 아니면 이곳이 또다시 꿈속이거나.

둘 중 하나임이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방금 내가 내뱉은 말에 무슨 반응이라도 보여야 할 테니까.

그러나 눈앞에 있는 체스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사랑해. 나를…… 혼자 두지 마.”

들릴 듯 말듯 무척이나 작은 목소리로 언뜻 혼잣말을 하는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 * *

“딜런.”

마음 같아서는 딜런을 직접 품에 안고 싶었지만, 체스터는 내 가녀린 팔로 들었다간 몸살이 날 거라며 아기를 자신이 안았다.

그의 품에 안긴 딜런의 이름을 부르며 딸랑이를 흔들어 주는 게 고작이었다.

방긋방긋 웃는 아기의 표정이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워서 저절로 얼굴에 웃음이 꽃처럼 피어났다.

“율리아.”

“네?”

“……저는 곧 수도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잘…… 다녀와요?”

“함께 갈 생각은 없습니까? 폐하께 인사도 하고, 친구도 만나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딸랑이를 흔들던 손이 멈칫했다.

보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황성으로는…….

무서웠으니까. 아빠가 죽었던, 황성이 이제는 너무 두렵게 느껴졌다.

“당신이 원래 있어야 하는 곳으로 돌아가는 게 어떠하겠습니까.”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무엇보다 내가 황성에 돌아가자마자, 내 불행이 시작되었다.

그게 내 탓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또 내가 돌아간다면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불행이 닥칠 수도 있다는 아주 작은 확률이라도 존재했기에, 더욱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만약 우연의 일치로 또다시 내 주변 사람을 잃는 일이 벌어진다면 분명 괴로울 테니까.

“미안해요, 체스터.”

“당신이 미안할 이유는 없습니다. 건강하게 이곳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수도로 가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있나요?”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당신이 걱정할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할 테니까요.”

무언가 숨기는 게 있음이 분명했다.

내가 물어본다 해도, 결코 안 알려 줄 눈빛.

체스터는 내게 비밀이 많은 남자였다. 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나를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제가 알면 안 되는 사안인가요?”

체스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지만, 그는 침묵만을 고수했다.

결코 말해 줄 의사가 없다는 게 이렇게 얼굴에서 뚜렷이 비쳐지니, 더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알게 된다면 당신이 충격받을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안 괜찮을 수도 있습니다.”

“충격 안 받아요.”

“그럼 내일 알려 드리겠습니다. 제가 당신이 이곳에 있는데도 왜 수도로 가는지…….”

안 알려 줄 것 같았는데.

오늘 당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내게 숨기는 게 아니라, 떠나기 전에 진실을 알려 주겠다는 거니까.

“좋아요, 체스터.”

체스터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 * *

며칠 동안 그래 왔듯, 오늘 밤도 어김없이 체스터와 한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고 그의 품에 꼭 안긴 채 잠들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동시에 나를 끌어안고 있던 체스터의 팔이 풀렸다.

“율리아, 눈 감고 1부터 10까지 천천히 세요.”

그는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퍽. 퍼억. 퍽. 푹. 서걱. 촤악.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섰다.

지독하게 익숙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한기가 느껴지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오늘은 평소보다 달이 밝아서 분명 눈을 뜨면 그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보일 터였다.

그가 걱정되는 한편, 눈을 뜰 수도 없었다.

간신히 묻어 두었던…… 전전생의 기억이 지금조차도 조금씩 꿈틀거리며 나를 집어삼키려 하니까.

몸이 벌벌 떨렸다.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를 죽이는 행동을 하고 있을 체스터는 전전생에 내 가족들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죽였을 테니까.

“허억, 헉……!”

숨이 턱 막혀 왔다. 당장에라도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간신히 묻어 두었던 기억이, 체스터가 내 가족들을 죽이고, 소중한 유모를 눈앞에서 죽이는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각인하듯.

알고는 있었다. 지금 체스터가 죽이는 이들은 나 혹은 체스터 둘 다 죽이기 위해 잠입한 자객이라는 것을.

그렇지만…….

끼기긱. 푹. 챙. 퍼억.

전전생의 내가 기억을 떨치지 말라고, 더는 그를 사랑하지 말라고, 그는 내가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전부 죽일 거라고.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며 내 정신을 갉아먹었다.

내가 나에게 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체스터가 정치적으로는 날 이용할지언정, 적어도 날 죽이거나 내 소중한 이들을 해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적어도 그의 사랑은 진심이고, 나를 지켜 주겠다고 했던 말을 믿으니까.

푹. 콰직.

“율리아.”

흔들림 없이 다정한 그의 목소리가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덜덜 떨리는 몸을 뒤로하고, 체스터의 말을 착실하게 듣고 있던 나는 감고 있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시야에 바로 들어오는 것은 이곳저곳에 쓰러져 죽어 있는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괴한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발밑에 결코 움직일 수 없도록 제압당한 살아 있는 한 명의 괴한이 보였다.

아마 한 명을 살려 둔 이유는…… 배후가 누구인지 캐내기 위함이겠지.

“다 끝났습니다.”

분명 상냥한 목소리인데. 왜 이렇게 서늘하게 느껴지는 걸까.

천천히 고개를 들자 하얀 그의 셔츠가 검붉게 물들어 있는 게 보였다.

체스터의 얼굴을 보는 게 처음으로 두려웠다.

그의 손을 타고 흐르는 붉은 핏물이 올린 시선의 끝에도 보일 것만 같아서.

그럼에도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싶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몸은 계속 시선을 바닥으로 향하게 했다.

“많이 춥습니까?”

조금은 차가운 밤바람이, 깨진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체스터는 내가 추워서 떠는 거라고 생각한 건지. 무척이나 다정하게 이불을 내게 둘러 주었다.

그러한 행동을 하기 위해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비릿한 피 냄새가 훅 끼쳤다.

“우욱!”

“……미안합니다, 금방 씻고 오겠습니다.”

내가 헛구역질을 하자, 그는 내가 벌벌 떠는 이유를 깨달았다는 듯. 내게서 멀어졌다.

“잠시 혼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게 힘들다면 당신의 유모를 부르겠습니다.”

“호, 혼자 있을 수 있어요.”

“이 방에서는 못 잠들 테니,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기다릴게요.”

“지저분해진 곳에 당신을 둘 수는 없죠. 걸을 수 있겠습니까?”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추운 건 아니었기에 이불을 거두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른 층으로 옮기는 게 좋겠죠?”

체스터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리고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팔다리를 으스러뜨린 괴한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며 방 밖으로 나갔다.

알고 있었다. 배후를 알아내기 위해서 저 사람을 어딘가 데려가야 한다는 것 정도는.

이런 그의 행동은 분명 처음 보는 건데 왜 낯설지 않게 보이는지.

왜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는 괴한이 전전생의 오빠와 겹쳐 보이는 건지.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쿵거리며 뛰었다.

오빠도 전전생에 저리도 끔찍하고 잔인하며 고통스럽게 죽어 갔을까.

“율리아,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아, 못 볼 꼴을 보이는 것 같네요. 먼저 다른 방으로 들어가 쉬어요.”

조각처럼 완벽한 그의 얼굴은 피 칠갑이 되어 있었다.

저절로 몸이 굳었다. 지금 그의 얼굴은 전전생에서 본 그와 똑같았으니까.

숨을 쉬는 방법을 한순간 잊었다.

공포를 느끼고 얼어붙었던 발은 생존 의지를 가지고 본능적으로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뒤에는 피가 홍건하고, 시체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앞에는 피가 잔뜩 묻은 체스터가 있었다.

데자뷔가 느껴지는 건 결코 기분 탓이 아니었다.

“욱!”

토악질과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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