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어느새 마차는 별장에 도착해 있었다. 체스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유모가 나를 반겨 주었다.
“유모, 나 이제 전부 기억해.”
“저, 정말인가요……? 황녀님?”
“응. 정말 이제 전부 기억해. 딜런은 어디에 있어, 유모?”
“크흡! 어서 저를 따라오세요…….”
유모는 뭐가 그렇게 감격스러운 건지. 간신히 눈물을 참아 내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체스터의 부축을 받으며, 유모를 따라갔다.
“딜런 님은 지금 잠들어 계세요.”
유모는 방문을 열기 전에, 주의부터 주었다.
아마도 간신히 재웠으니 깨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는 거겠지.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응. 조용히 얼굴만 확인할게.”
최대한 발소리를 죽인 채, 요람으로 향했다.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는 아기의 모습에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걱정했었다. 혹시라도 아기에게 문제라도 생겼을까 봐.
모유 수유를 해 줄 수 없는 건, 내가 꾸준히 약을 먹기 때문에…… 직접 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품에 안고 젖을 물려 주고 싶지만, 혹시라도 약 때문에 아기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치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저 이렇게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미안.’
그래도 안색이 나쁘지는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을 확인했으니, 이 정도면 충분했다.
체스터의 팔을 톡톡 건드는 걸로 이제 방에서 나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다행히 그는 내 신호를 바로 알아들은 듯 나를 부축하며 조용히 방 밖으로 나갔다.
“딜런한테 건강상의 문제는 있어요?”
문이 닫히자마자, 체스터에게 물었다.
그가 한동안 데리고 있었을 테니, 이 정도는 알 수도 있었다.
“……아직은 없어 보입니다. 자라면서 발병할 수도 있으니, 확답은 못하겠군요.”
그래도 지금 당장 병은 없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아기가 건강한 거 하나면 충분했으니까.
유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유모…….”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황녀님.”
유모는 내 손을 꼭 잡으며 전부 알고 있다는 듯 다정하고 상냥한 어투로 말했다.
“황녀님이 기억도 다 떠올렸고, 두 분이 보는 건 거의 일 년 만이니 할 말들이 많겠죠. 딜런 님은 제게 맡기시고, 두 분은 올라가세요.”
“…….”
“이미 침실은 정리를 끝내 놓았답니다.”
“그럼…… 오늘만 부탁할게!”
“네. 다시 괜찮아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황녀님.”
“……늘 고마워, 유모.”
유모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주며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체스터의 부축을 받으며, 침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율리아.”
“네?”
“꽉 잡아요. 뭐, 안 잡아도 제가 당신을 놓칠 리가 없겠지만.”
그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이야기하는지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체스터가 나를 가볍게 안아 들고는,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으니까.
불편하다기보다는 시야가 확 높아져서 놀란 정도였다.
“체, 체스터……! 얼른 내려 줘요!”
“안 잡아먹습니다. 당신의 몸이 성치 않은 걸 누구보다 잘 아는데.”
“…….”
“전에도 말했듯, 저는 아픈 사람을 괴롭히는 취미는 없습니다.”
물론…… 내가 아픈 건 맞는데. 아니, 맞긴 한데 뭔가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체스터는 그대로 침실로 들어가서 나를 침대에 앉힐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엉덩이에 푹신한 침대 매트리스가 닿고 나서야 그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흠흠……. 왜 딜런이 당신한테 있었던 거예요?”
“황후가 의견을 냈다고 하더군요. 당신이 온전하게 기억하고 있는 게 하나도 없었고, 그리고 친부가 버젓이 있는데…….”
체스터는 내 옆에 착 달라붙어 앉았다.
“친모의 형제가 양육을 하는 것도 조금 이상하죠.”
“그런데 제가 분명…… 당신한테는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했었을 텐데.”
“음……. 그게 중요한가요?”
“저는 당신이 아이를 싫어한다고 해서!”
“……오해입니다. 정말…… 제가 사랑하는 당신의 아이를 싫어할 리가 있겠습니까.”
체스터는 살짝 난감해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마 자신의 죄를 잘 알고 있는 거겠지.
“만약 아기가 태어나면서 당신이 죽었더라면…… 마냥 아이를 예뻐할 수는 없었겠죠. 그렇지만 이렇게 당신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어떻게 당신의 아이를 미워합니까.”
“진짜…… 말 하나는 잘하는 거 알아요?”
“흐응? 제가 말만 잘합니까? 저 잘하는 거 되게 많은 거, 율리아가 가장 잘 알잖아요.”
왜, 왜…… 그런 말을 하면서 겉옷을 벗는 거야?
물론, 우리가 결혼도 하고…… 부부 관계까지 전부 했던 건 맞지만!
그래도 기억이 오늘 돌아왔는데, 어떻게 마음의 준비를 벌써 해?
체스터는 침대에서 일어나 겉옷을 의자에 걸쳐 두고는 다시 내게로 다가왔다.
“율리아, 긴장하지 마요.”
그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리더니, 나를 침대에 눕혔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리며 반응했다.
“누가 보면 제가 잡아먹으려는 줄 알겠습니다?”
“……아니었어요?”
“그렇게 말하면 굳이 사양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지금은 아닙니다.”
체스터는 친히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당신이 아파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아서요.”
“그럼 지금 이러는 건…….”
“부부인데 각방 쓰는 것도 조금 그렇잖아요.”
마차에서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았다.
“그렇다고 당신이 저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부부인데 침대를 따로 쓸 필요가 있나요?”
“……그럴 이유는 없죠.”
“잠버릇은 율리아가 있는 거 알고 있죠?”
“네? 저 잠버릇 있어요?”
체스터는 픽- 하며 웃더니, 나를 품으로 가까이 끌어당겨 안았다. 그게 싫지는 않아서 그냥 눈을 꾹 감았다.
그의 탄탄한 가슴 근육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전과 변함이 없는 걸 보니, 몸 관리는 꾸준히 해 왔던 걸까.
본능적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정말이지 겉모습 하나만큼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남자였다. 물론, 신은 공평해서 성격에 하자가 있게 만들었지만.
“저를 끌어안는 버릇이 있던데.”
“……따뜻한 이불이든, 사람이든, 일단 뭐든 끌어안고 있어야 안정감이 느껴져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율리아의 말은…… 옆에 누운 사람이 제가 아니어도 그랬을 거다?”
“그,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저랑 같은 침대에 누울 수 있는 사람은…… 체스터가 유일하단 말이에요.”
“흐응?”
“그, 그러니까…… 저는 당신이 유일하단 말이에요.”
체스터의 표정이 궁금했다. 그래서 고개를 살며시 들어서 그의 얼굴을 두 눈에 담았다.
그는 장난기가 다분해 보이는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설마…… 내 반응을 보며 즐겼던 거야?
진짜 악취미…….
“율리아, 이렇게 사랑스러우면 반칙인 거 압니까?”
그렇게 달콤한 말로 꼬드긴다고.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그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고.
지금 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는 행동을 한다고 해서, 내가 넘어갈 거라고 생각한다면…….
“뭐가 반칙인데요?”
“얌전히 있으세요. 괜히 자극하지 말고.”
“음……. 제가 움직이면 당신한테 자극을 주는 거예요?”
“……율리아. 당신의 몸이 성치 않은데 건드릴 정도의 짐승 새끼는 아닙니다.”
정말 체스터는 그냥 나를 품에 꼭 가두고 잠만 청할 생각인 건지.
이전에는 엉큼하기 짝이 없던 남자가 이러니, 괜한 오기가 발동했다.
무엇보다 눈을 꾹 감고 코앞에 누워 있는 그가 너무 예술 작품처럼 잘생겨서 얄밉기도 했고.
그래서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떨어뜨렸다.
“…….”
길게 뻗어 있던 그의 속눈썹이 살짝 들리기 시작하더니, 눈꺼풀 사이로 루비를 박아 넣은 듯한 선명한 적안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을 뚫어지도록 바라볼 뿐이었다.
체스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움직이지도 않았고, 그저 나만을 빤히 응시했다.
“율리아, 자요.”
“…….”
“아니면 대답해 주겠습니까. 수도로 함께 돌아가자고 했던 말……. 아직 유효합니다.”
“저는 수도에서 지냈을 때보다, 지금 이곳에서 지내는 삶이 더 만족스러워요.”
“……그렇습니까.”
체스터는 씁쓸하다는 듯 웃었다.
“돌아가야 한다면 제 눈치 보지 말고, 돌아가요. 당신이 바쁜 건 저도 잘 아니까…….”
“아닙니다. 제게 당신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
“이제는 그럼 안 되는데.”
“왜죠?”
“이제 딜런이 있잖아요. 제가 사랑한 체스터의 아기가 있는데, 왜 저보다 중요한 게 없어요.”
“……딜런은 당신보다는 저를 닮아 알아서 잘 자랄 테니 걱정은 안 해도 될 겁니다. 그리고 아이는 원래 강하게 키워야 하는 겁니다.”
“싫은데요. 저는 딜런을 사랑과 보호 속에서 키우고 싶은데, 체스터는 협조 안 해 줄 거예요?”
체스터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요?”
“당신이 지나치게 귀여워서요.”
“제가 귀여운 게 한두 번이에요? 새삼스럽게.”
“늘 귀엽지만, 지금은 꼭 키스하고 싶게 귀여워서 그럽니다.”
“해도 되는데.”
방금 내가 뱉은 말이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발언이었는지.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벙찐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키스. 해도 된다고요, 체스터.”
“아……. 잘못…… 들은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안 해 줄 거예요?”
체스터는 매우 바람직하게 말보다 행동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의 입술이 상냥하게 닿았다.
예전이었더라면 저돌적으로 달려들며 갈증을 해소하듯, 바로 혀를 밀어 넣었을 그가 더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핥으며 사람을 감질나게 만들었다.
입술 표면만을 혀로 적시거나 치아로 아프지 않게 깨물기만 할 뿐, 조금도 그의 혀가 안으로 들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혀를 내밀었다.
그제야 체스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 혀를 감으며 안을 침범했다.
“흣……!”
약간의 틈 사이로 공기가 들어왔지만, 그마저도 이내 그의 입술이 공백 없이 빼곡히 메꿔 오로지 그의 숨결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의 뜨거운 호흡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얽혀 드는 혀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부드러웠지만, 왠지 모르게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체스터가 내게 체액을 삼켜 낼 틈도 주지 않은 덕에, 입 안에 체액이 가득 고였다.
그가 입술을 떼어 내자, 체액이 긴 실을 만들며 달빛을 받아 반짝이다 힘없이 툭 끊어졌다.
“율리아, 못 본 사이에 되게 앙큼해진 거 압니까?”
“그래요? 저는 전혀 모르겠는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푹 자요.”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이 여운을 조금 더 길게 늘어뜨리고 싶어, 따뜻한 그의 품을 파고들며 눈을 꼭 감았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아늑한 그의 품에 갇힌 채, 그의 심장 소리를 자장가 삼아 조금씩 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