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유모가 내가 갈아입을 외출용 드레스를 가지고 들어왔다.
유모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갈아입고, 부축을 받으며, 바깥으로 나갔다.
오늘도 날씨가 무척이나 좋았다.
밖으로 나오자 어김없이 마차와 함께 체스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황녀님, 잘 다녀오세요.”
“응! 다녀올게, 유모.”
유모에게 안심하라는 의미로,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체스터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
마차 안에서는 그와 마주 보고 앉았는데, 왜 이렇게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두근거리는지.
예전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감정일까. 아니면 그냥 이 사람이 너무 잘생겨서 나오는 반사적인 반응일까.
“율리아.”
“네?”
“저와 함께 수도로 돌아갈 생각은…… 아직도 없는 겁니까?”
그 질문에 또다시 나는 침묵을 선택했다.
체스터의 눈빛은 더없이 진실해 보였지만, 내 기억이 멀쩡하지도 않았고, 낯선 환경에서 지내기가 꺼려졌다.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언제든지 생각이 바뀐다면 부담 갖지 말고 말해 주세요.”
“네.”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멍하니 바깥 풍경만을 두 눈에 담아냈다.
정신을 차리니, 마차가 멈춰 있었다.
자연스럽게 체스터가 먼저 내려서는 내 앞에 손을 내밀었다.
그걸 거부하지는 않았다.
“이곳이 수도는 아니라, 부족한 게 많습니다.”
“괜찮아요. 마을 자체는…… 제 기억 속에서는 와 본 적이 없거든요.”
“계속 안에서만 지냈던 겁니까?”
“……네.”
“답답하지 않았습니까?”
“그냥 괜찮았어요.”
“그렇습니까.”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안도하는 듯한 느낌.
왜? 아니, 그냥 내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까? 그저…… 기분 탓에 불과한 거겠지.
“그럼 갈까요, 율리아?”
“그런데 저번에 저희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당신이 이렇게 나오는 게 새롭게 느껴진다면, 괜찮습니다. 위험해진다면 제가 당신을 지킬 수 있으니까요.”
확신에 찬 목소리에 옅게 웃음을 지으며 내게 내민 그의 손을 잡았다.
알 수 없는 본능적인 쎄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지만, 그냥 한쪽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이렇게 다정한 사람인데. 그저 이런 느낌은 기분 탓일 게 뻔하니까.
연극을 보고, 함께 밥도 먹고, 같이 산책도 하고, 시장 구경도 하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
내가 어떤 걸 하든, 그는 내 행동에 대해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볼 뿐이었다. 마치 그에게 관찰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체스터.”
“네, 율리아.”
“……아니에요.”
왜 내 머릿속에서 갑자기 ‘이혼’이라는 단어가 둥둥 떠다닐까.
‘딜런’에 대해서는 함구했으니, 이번에 ‘이혼’에 대해 물어본다면 대답해 줄까?
대답해 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와 함께 아른거리는 건 당황으로 가득 물든 그의 표정이었다.
“율리아?”
내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 보였는지. 그는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며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우리…… 이혼했었나요?”
“…….”
“이혼……했나요?”
“이혼한 적 없습니다, 율리아.”
“근데 왜 이혼이라는 단어가 계속 떠오르죠? 체스터는 알고 있잖아요. 숨기지 말고…… 윽!”
머리가 핑 하고 돌았다.
“율리아? 머리가…… 아픕니까?”
무언가 떠오르려고 했다. 아니, 무언가 떠오르고 있었다.
저편에 감춰진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머릿속에 드리워졌다.
“……저리 가!”
나를 붙잡고 있던 체스터를 밀어냈다. 그리고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왜? 왜…… 이 남자가 날 찾아온 거야?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낸 거고?
기억들이 떠오를수록, 지금 내 상황이 기괴하게 느껴지기 짝이 없었다.
눈앞에 있으면 안 되는 남자가,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두려웠다. 처음에는 뒷걸음질이었지만, 이제는 그를 피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져 아예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 달렸다.
이곳이 어디인지도 잘 모르는 채, 그냥 발걸음이 닿는 대로 뛰었다.
그런데 숨은 왜 이렇게 금방 차는 건지. 이전보다 몸이 약해진 게 틀림없었다.
“아, 아…….”
왜 몸이 약해졌는지 기억났다.
아빠의 사망 소식에 충격을 받기 이전, 출산으로 인해 몸이 쇠약해진 상태였으니까.
그래서 ‘딜런’이 누구인지 떠올랐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었을까.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뜨거운 액체가 손바닥을 축축하게 적셨다.
“아…… 아, 딜런…….”
전부 기억이 났는데, 왜 나는 딜런의 행방에 대해서는 모르는 걸까.
분명 내가 쓰러지기 이전에는 딜런이 있었는데, 왜 기억을 잃고 깨어난 이후부터는 딜런의 존재가 없어진 걸까.
휘청거리는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어나서 꾸역꾸역 걸었다.
“딜런, 내 아가…….”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짐마차가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다리가 굳어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대로 얼어붙어 있는데, 누군가 내 허리를 팔로 휘감아 잡아당겼다.
눈앞에서 마차가 지나가는 게 보이자, 심장이 철렁했다.
“미쳤습니까.”
“…….”
“제가…… 당신을 뒤쫓지 않았더라면! 후우……. 이런 위험한 짓은 하지 마세요, 율리아.”
“저는 당신이 미워요.”
나를 기만했던 사실도, 그리고 지금처럼 나를 헷갈리게 하는 행동들이 전부.
“미워해도 됩니다. 그런데 방금처럼 위험할 만한 일은 만들지 마세요.”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이곳에서 지내는 거……. 일 년 가까이 지나도록 찾아오지 않았으면서!”
“……너무 늦게 당신이 있는 곳을 알았습니다.”
“당신은……!”
무어라 쏘아붙이려고 했는데, 나를 와락 껴안으며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는 그의 행동에 할 말이 쏙 들어갔다.
덩치에 맞지 않게 미세한 떨림이 안쓰럽기는 했지만, 체스터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율리아.”
“기회? 전에도 말했잖아요. 기회는 이미 이전에 충분히 많이 줬다고.”
“……변명의 기회도 줄 수 없나요.”
변명의 기회?
그의 말에 이내 딜런의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의 반응을 보면 딜런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기억하는 체스터는 아이가 싫다고 했는데, 그럼 딜런은 어디에 있는 거지?
아니, 애초에 딜런이 살아는 있는 게 맞을까?
“딜런! 내 아기는 어디에 있어요!”
“…….”
“당신은 알고 있잖아! 알고 있으니까…… 어제 그런 반응을 보인 거잖아!”
“전부…… 기억하는군요.”
“딜런은 어디에 있냐고 제가 묻잖아요!”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덤덤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혹시라도 그가 딜런을 해한 건 아닐까. 두려웠다. 딜런이 살아 있지 않다면 나는 엄마의 자격이 없었다.
“율리아, 제가 이전에 아이를 싫어한다고 했던 말은…… 당신의 몸이 아기를 갖기엔 너무 약하다고 해서…… 그리 말했던 겁니다.”
“…….”
“딜런은 제가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율리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딜런이 살아 있어서, 그리고 무사해서.
“그럼 이제 딜런을 제게 돌려줘요.”
“……같이 양육하면 안 되겠습니까?”
“우리 이혼할 거잖아요.”
“이혼…… 안 하면 안 되겠습니까?”
“좀 떨어져요.”
일단 날 꽉 끌어안고 있던 그를 밀쳐 냈다. 그래도 그는 순순히 밀려나 주었다.
“저는 이혼하기 싫습니다, 율리아.”
“…….”
“저는 단 한 번도 당신을 정치적으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
“모든…… 일이 끝나면, 수도에서 일이 정리되면 그때는 딜런과 셋이서 조용히 영지로 내려가서 살아요.”
거짓말 같지는 않아 보였다. 절박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 연기일 리는 없을 테니까.
“당신이 제가 정계에 남는 걸 원치 않는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됐어요.”
딜런과 셋이 산다는 말이 마음에 들어왔다.
딜런도…… 엄마와 아빠가 따로 사는 것보다는 같이 살기를 원할 테니까.
적어도 딜런이 어릴 때는 셋이 함께 사는 게 정서적으로도 좋을 테고, 나와는 다르게 딜런은 애정으로 키우고 싶었으니까.
“딜런과 셋이 산다는 말이나 지켜요.”
“그럼!”
눈에 띄게 밝아지는 그의 표정에 정말 나와 함께 지내는 게 그렇게 좋은 건가 싶었다.
“이혼은 유예해 주긴 하겠다는 거예요.”
“…….”
“딜런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 제 마음을 돌려놔요. 딜런이 성인이 됐을 때, 저도 당신과 쭉 살고 싶다는 마음이라면 이혼 안 할 테니까.”
“다시 기회를 줘서 고맙습니다, 율리아…….”
“그렇다고 당신을 용서한 건 아니에요.”
“제가 잘하겠습니다, 율리아.”
자연스럽게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원래 지내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근데 체스터는 참 거짓말을 잘하는 거 알아요?”
“……네?”
어디서 모르는 척을.
“우리가 예전부터 사이가 좋았다고요? 사랑으로 결혼했다라……. 전혀 아니잖아요.”
우리 사이 나빴잖아. 그리고 사랑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얽힌 관계라 네가 반쯤은 협박해서 결혼한 건데.
어디서 미화를 하는 건지.
“당신은 몰라도…… 저는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해서 한 결혼입니다, 율리아.”
“……거짓말.”
“진심이지만, 믿는 건 당신의 몫이겠죠.”
진짜 체스터는 저 얼굴에 감사해야 했다.
기억을 잃기 이전, 정말 그를 만나기 전 시절에 남아 있던 앙금이 얼굴을 보니, 많이 씻겨 나갔으니까.
“오늘부터는 같은 방에서 자요.”
“네?”
“이혼을 유예했고, 제 기억도 다 돌아왔는데, 굳이 각방을 쓸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내 말에 체스터는 환하게 웃었다.
“그 말 무르지 마세요, 율리아.”
“일단 돌아가서 딜런부터 확인할래요.”
“네.”
“그리고 딜런은 오늘 하루 정도는 유모에게 맡겨도 되겠죠.”
체스터는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입가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나는 아직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뭐, 그래도 전전생처럼 그가 나를 죽일 거라는 생각은 이젠 씻은 듯 사라졌다.
“사랑합니다, 율리아.”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수줍은 사춘기 소년처럼 사랑을 고백하는 체스터의 모습은 꽤…… 아니, 아주 많이 귀여웠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피식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도요.”
나도 당신을 사랑하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
당신을 미워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감정이 공존하는 게 아닌, 혼잡하게 뒤섞인 채 뒤틀려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