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율리아,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네?”
“아까 했던 말……. 다시 반복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무척 다급해 보였다.
내가 했던 말을 반복하는 건 그리 어려운 부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주었다.
“딜런?”
이 단어가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걸까? 아니, 이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거지?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을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체스터를 보며 느끼는 감정과는 사뭇 다른. 조금 더 벅찬 느낌이 강한. 설명하기 힘든 낯설면서도 익숙한 감정.
“아…….”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의 눈동자에서는 알 수 없는 벅찬 환희와 혼란스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이 단어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잔잔한 호수 같던 이 남자를 이토록 동요하게 만드는 걸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율리아.”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의 표정에 오히려 의심이 샘솟았다.
무엇을 내게 숨기는 건지.
“숨기지 마요.”
“…….”
“궁금해요. 알려 주면 안 돼요? 아니면…… 제가 알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지금 당장 쉽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라서요.”
체스터는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그 말을 꺼내지 못해 답답한 사람처럼 비쳤다.
“제가 당신한테 모든 걸 전부 털어놓을 수 있는…… 상황이 오면…… 그때 모든 걸 알려드리겠습니다.”
“왜요?”
“그래야…… 당신이 저를 조금이라도 궁금해하고, 제가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내가 모든 걸 기억했더라면. 내 기억이 조금이라도 온전했더라면.
지금 이 남자가 내게 내뱉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나 혼자만 과거에 멈춰 있는 기분이었다.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기분.
기억을 되찾을 생각을 한 적도, 노력을 기울인 적도 없었다.
단지 물처럼 흘러내려 갈 뿐.
“체스터.”
손을 뻗어, 그의 뺨에 손바닥을 올렸다. 따뜻한 체온이 피부 위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는 내 손길을 피하거나, 쳐 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행동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기다리는 느낌. 내가 무슨 행동을 해도, 전부 받아 줄 사람처럼 굴었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그의 눈에는 단 한 가지 감정만이 담겨 있는 건지.
드러나는 그 감정을 나는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왜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요?”
“많은…… 복합적인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고민을 제가 덜어 주면, 그 표정 안 지을 건가요?”
“…….”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지으니까. 제 심장이 아파요.”
나는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내게는 기억이 제대로 없었으니까.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일을 알고 있는 이 남자에게 솔직하게 군다면, 내가 모르는 것들을 알려 주지 않을까?
“당신의 말대로, 제가 당신을 사랑했어서…… 지금 심장이 아픈 건가요?”
“율리아.”
“알려 주세요. 궁금해요.”
“차근차근…… 알려 줄게요. 오늘은 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손으로 내 눈을 덮었다. 마치 잠이라도 자라는 듯이.
“제가 귀찮나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제 삶의 중심인데, 귀찮게 느껴질 수가 있겠습니까. 단지…… 걱정되어서 쉽게 말을 꺼내기가 힘듭니다.”
“귀찮아서 말 안 해 주는 게 아니라면 됐어요.”
“이거 하나만은 진실입니다. 제가 당신을 무척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가 손으로 내 눈을 가리고 있는 상태였기에, 그런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이 어떠한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청각에만 의존해 목소리로만 판단을 해야 하는데. 거짓말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대로 잠들어도 괜찮아요?”
“네. 편히 있으면 됩니다, 율리아.”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졸음이 쏟아졌다.
잠에 빠져드는 건 무척이나 순식간이었다.
* * *
색색대는 고른 숨결에,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을 가렸던 손을 치웠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율리아를 볼 때면 늘 심장은 고장이 난 것처럼 뛰었다.
두 눈이 굳게 감겨 있었기에, 천천히 잠든 율리아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길게 뻗은 속눈썹 아래에 옅게 드리워진 다크서클, 간신히 혈색만은 되찾은 창백하기 짝이 없는 피부, 말라서 뼈의 굴곡이 전부 보이는 목.
그녀의 모든 것은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켰다.
“지켜 주겠습니다.”
평온하게 잠이 든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잠든 모습을 감상했던 마지막 날이 언제였는지.
아직은 품에 안고 잠들지는 못하지만, 잠든 모습을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조심스럽게 율리아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손에 쥐고 천천히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율리아, 사랑합니다.”
이어서 그녀의 둥근 이마에도 입을 맞췄다.
곧 있으면 밤이 찾아오기 때문에, 율리아를 이곳에 오래 둔다면 분명 감기에 걸릴 것이 뻔했다.
그녀는 무척 연약했으니까. 지금도 혼자서는 제대로 걸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율리아가 이렇게 된 게 전부 내 탓처럼 느껴져서.
그렇다고 그녀를 놓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번에는 혼자 두지 않겠습니다.”
율리아를 품에 안았다.
이렇게 안으니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가 전보다 아주 많이 말랐다는 사실을.
심장이 욱신거렸다.
* * *
밝은 빛이 눈을 덮쳐 왔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익숙한 천장이 나를 반겼다.
분명 바깥에서 밤하늘을 보며 잠든 게 마지막 기억인데, 어째서 내 침실에서 눈을 뜬 거지?
의아함에 몸을 일으키자, 바로 유모가 눈에 들어왔다.
“유모, 나 여기 어떻게 온 거야?”
“공작 각하께서 직접 데려다주셨어요.”
“……유모는 알고 있었어?”
“무엇을요?”
“내가 그 남자의 부인이었다는 거.”
알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 남자가 날 찾아왔을 때, 자리를 비켜 준 걸 테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내게 숨긴 의도는 조금도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되지 않아. 왜 유모는 그 사람의 존재를 내게 숨겨 온 거야?”
“황녀님이…… 더는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힘들어했어? 그 사람 때문에?”
유모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알려 주고 있었다. 유모가 거짓말을 하고 있진 않다는 것을.
그렇다면 왜 나는 그 남자 때문에 힘들어했지?
지금 하는 행동을 보면 조금도 힘들어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분명히 사랑받았을 텐데. 대체 왜?
“유모한테도 분명 이유가 있겠지.”
“죄송합니다, 황녀님.”
“죄송해? 그 사람이 내게 무슨 잘못을 한 거야?”
잘못한 게 있으니까. 그 사람이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했을 테고, 그랬으니 유모가 내게 그 사람의 존재를 숨겨 왔던 거겠지.
“그 정도는 알려 줄 수 있잖아.”
“저도…… 그거에 대해서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황녀님께서 그분으로 인해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
“지금 황녀님의 몸 상태가 안 좋은 원인 중에…… 공작님의 지분이 없다고는 절대 못 할 정도로요.”
“그래……?”
“네……. 공작님만 아니었더라면…… 황녀님이 마음고생을 할 일도, 몸이 이렇게 안 좋아질 일도 없었을 거예요.”
“그 사람이 날 사랑한대.”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마음고생으로 인해 건강도 악화되게 만든 원인 중 하나가 그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어제 봤던 그는 무척이나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약간의 장난기가 있기는 했지만, 그게 눈살이 찌푸려지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내가 왜 그렇게나 좋은 사람에 의해 마음고생을 했다는 거지?
“황녀님.”
“응?”
“오늘도 직접 만나는 게 어떠실까요? 이전에는 마음고생을 하셨지만…… 공작님이 나쁜 사람은 전혀 아니에요.”
“그건…… 나도 알 수 있어.”
“제3자인 제가 말하는 것보다는 당사자들끼리 만나서 얘기하는 게 제일 좋겠죠. 데이트도 하시구요.”
유모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저는 황녀님과 공작님이 예전처럼 돌아갔으면, 하거든요.”
“…….”
“황녀님도 아시다시피, 공작님의 얼굴이 워낙 출중해야죠.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셨답니다.”
왜 나는 점점 유모에게 설득당하는 기분이 들지? 기분 탓일까.
“그건…… 맞지. 근데 약속도 안 했는데 찾아가기엔…… 조금 민폐이지 않을까?”
“아뇨? 전혀 아닐걸요? 공작님이 이곳에 온 이유는 누가 봐도…….”
“누가 봐도?”
“황녀님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함으로 보이던 걸요!”
“그, 그럼 유모가 연통 좀 넣어 줘!”
조금은 부끄럽긴 했지만, 어제까지는 그가 먼저 다가왔으니, 오늘 정도는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것도 괜찮겠지.
그리고 궁금한 점도 많고. 그는 내 과거에 대해서 기억하는 게 많아 보였으니까.
내가 기억을 되찾는 데 필시 도움이 될 사람이 분명했다.
“네, 황녀님. 그럼 연통을 넣을 테니 옷부터 갈아입을까요?”
“어?”
“아무리 결혼했던 사이라지만, 외출할 거라면 외출복으로 갈아입는 게 맞으니까요.”
“다, 당연하지!”
애초부터는 슈미즈 차림으로는 만날 생각도 없었단 말이야.
아무리 부부…… 사이였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그때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
“그럼 저는 잠시 나갔다 올게요.”
“응!”
유모는 연통을 넣기 위해 방 밖으로 나갔다. 이제 방 안에는 나 혼자만이 남아 있었다.
두 다리를 모은 채 앉으며 무릎 위에 얼굴을 푹 숙였다.
알 수 없는 뜨거운 열기가 몸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또 뭔가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그래도 이 기분이 싫지는 않았다.
“나도…… 사랑인가?”
그냥 이 몽글몽글하고 달콤하게 느껴지는 감정이 뭔가 낯설면서도 이질적이지는 않았다.
지금 이 감정이 체스터를 봐도 변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느낌을 ‘사랑’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겠지?
그래도 부끄러우니까. 옷을 다 갈아입기 전에는 심장을 잠재워야 할 텐데.
“설마 얼굴도 지금 빨갛게 달아올라 있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이 미치자,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벽을 짚으며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 속에는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얼굴이 발갛게 익어 있는 내 모습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