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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107화 (107/141)

#107화

시녀의 부축을 받아, 가까이 다가갔다. 아직 혼자 걷기에는 무리였으니까.

“오래 기다렸나요?”

“오래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럼 이제 갈까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자연스럽게 내 허리를 붙잡더니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대로 나를 말안장 위에 앉히더니, 자신 역시도 내 뒤에 탔다.

무척 능숙했다. 이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던 걸까.

“저, 저…… 무서운데…….”

“안 떨어지게 제가 붙잡고 있겠습니다.”

그걸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말일까?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불쾌하다거나 하는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심장이 간질거렸을 뿐이었다.

오히려 가까이 있는 지금 내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걱정됐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옅은 숨소리가 귓가에서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지금 내 얼굴을 이 사람이 볼 수 없단 사실이었다.

시녀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을이 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예상과는 다른 방향에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보여 주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율리아도 마음에 들어 하면 좋겠지만, 직접 봐야 알겠죠?”

어디를 가려는 건지. 무엇을 보여 주고 싶어 하는 건지.

조금도 예상되지 않았지만, 그가 나를 위험하게 할 일은 없을 것 같아서 말이 멈추기 전까지 얌전하게 있었다.

“이제 도착했습니다.”

말이 멈춘 곳은 언덕 위였다.

그는 먼저 말에서 내리고, 능숙하게 안장에 앉아 있던 나를 안아 들었다.

그대로 땅에 내려 줄 거라 생각했는데, 발이 바닥에 닿지 않고 공중에서 휘적이고 있었다.

“저, 저기요……?”

“못 본 사이에 더 가벼워져 있으면…… 어떡합니까. 그때도…… 말랐었는데…….”

분명 내려 달라고 말을 꺼내야 하는데, 내 허리를 붙들고 있는 그의 팔에서 두려움이 섞인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머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모든 걸 기억하고 있는 마음이 지금은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내게 속삭였으니까.

단지 몸이 떨어지지 않게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고, 시선을 내려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빛을 받아 낼 뿐이었다.

그의 새빨간 눈동자에는 여러 감정이 얽혀 있었다.

걱정, 미안함, 죄책감, 후회, 슬픔, 아련함, 괴로움.

조금도 긍정적인 감정을 찾아볼 수가 없는 눈동자에 내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율리아.”

내 이름이 이토록 달콤하게 들릴 수 있었던 언어였을까.

고작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심장은 또다시 고장 난 것처럼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율리아.”

그냥 입을 꾹 다물려고 했는데, 또다시 그가 내 이름을 불러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왜…… 자꾸 불러요.”

“무수히 많은 시간 동안…… 당신의 이름을 속으로만 곱씹었습니다. 다시 만나면 몇 번이고 불러 주고 싶었습니다, 율리아.”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는데, 그는 무척 애정을 담아 대답했다.

부드럽게 휘어진 그의 눈매가 무척이나 다정함을 머금고 있었다.

“이, 이제! 그만 내려 주세요!”

“……네.”

다행히 그는 순순히 나를 내려 주었다.

발이 땅에 닿고 난 이후까지도, 아주 조심스럽고 상냥하게.

혼자 걷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서 있는 건 내 힘으로 할 수 있었다.

다리가 약간 후들거리긴 했지만, 이전보다는 확실히 나아진 상태였기에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서 있지도 못해, 고꾸라지는 바보 같은 모습을 이 남자에게만큼은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율리아.”

그가 먼저 내 앞에 손을 내밀었다. 마치 붙잡으라는 듯.

살짝 망설이기는 했지만,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손을 꼭 잡고, 그가 이끄는 곳으로 움직였다.

“저…… 공작님.”

“체스터라고 불러 주세요. 이전에는 그렇게 저를 이름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체스터.”

나지막하게 그의 이름을 속삭이자, 그는 기쁜 듯 해사하게 웃었다. 뭐가 그를 기쁘게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표정일 때 그의 얼굴은 차가워 보이지만, 태양을 등에 지고 환히 웃으니까 무척…… 따스했다.

내가…… 이런 남자의 부인이었다고? 그것도 사랑받는?

기억이 없는 게 이토록 답답하기는 처음이었다.

조금 더 걷자, 그는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어 잔디 위에 깔았다.

“앉아요.”

그 말에 그의 겉옷 위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물론, 그는 내가 앉을 수 있게 부축하며 도와줬다.

그는 내게 무얼 보여 주고 싶었던 걸까. 의아했지만, 그 의문은 금방 풀렸다.

시선을 정면으로 옮기자, 예쁜 마을들의 풍경이 눈을 사로잡았으니까.

“당신을 혹여나 알아볼 수도 있는 사람이 있을 위험이 있어…… 마을 안으로는 못 갈 듯합니다.”

“괜찮아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그때는…….”

“정말 괜찮아요, 체스터.”

나는 정말 괜찮았다.

그래서 그가 미안함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황성과 별장이 아닌, 다른 곳은 깨어나서 처음이거든요.”

“……율리아, 수도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까?”

“왜요?”

“수도에…… 황성도,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왜요? 저는 아무런 기억이 없어요.”

“……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건 어떠합니까.”

집.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감돌았다.

내게 돌아갈 집이라……. 어색했다.

그것도 기억조차 없는 남자와 함께 돌아간다?

아무리 본인이 내 남편이라 주장하더라도, 지금 이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당신이 제 남편이라는 사실을 제가 어떻게 믿죠?”

“……율리아.”

“무엇보다 제가 결혼했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고, 그리고 제가 느끼기에 당신과 저는 떨어져 지낸 기간이 꽤 길다고 생각해요.”

기억은 없더라도, 감은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렸던 건, 내가 깨어났을 때 바로 나를 찾아오지 않았던 것.

“정말 저와 결혼했던 게 맞나요?”

“결혼한 건 맞습니다. 아직 호적에 당신의 이름이 있기 때문에, 당신은 율리아 베아트리스가 아니라, 율리아 지크베르트입니다.”

“…….”

잠깐이었지만, 머리가 살짝 아파 왔다.

무언가 떠오를 것만 같은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은 채 두통만이 옅게 일렁일 뿐이었다.

“율리아, 당신을 만나게 되면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요?”

그는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와 앉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왜요?”

왜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내게 미안할 일을 저지르기라도 했던 걸까.

“당신이 아픈 이유가 전부 제 잘못 때문이니까요.”

“…….”

“당신을 외롭게 둔 걸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옆에 있어야 했는데…….”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심장이 팔딱팔딱 미친 듯이 뛰어 댔다.

얼굴에서도 약간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나를 이 남자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지금부터라도 제가 당신의 옆에 있어도 되겠습니까?”

“…….”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었다.

숨이 멎는 느낌. 그리고 이어지는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는 소리가 너무 커서, 그의 귀에도 들릴까 걱정되었다.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인데. 이러한 몸의 반응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안…… 됩니까?”

“……요.”

“네?”

“……된다고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금 그의 표정이 어떤지, 무슨 눈빛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먼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으니까.

궁금했지만, 쉽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심장을 간질거리게 하는 말들로 몸이 굳어 버렸으니까.

가볍게 부는 바람이 홧홧한 얼굴을 조금 식혀 주었다.

“……저도 질문 하나 할게요.”

“네, 율리아.”

“왜…… 저를 사랑해요?”

기억에 없었으니까. 그가 왜 나를 사랑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만큼, 궁금했다.

왜 이런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 건지.

남부러울 게 없어 보이는 사람이, 무엇이 부족해서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건지.

이유를 들으면 조금이라도 이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지금 내 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말하는 사랑이, 내 몸의 반응과 연관이 된다면…….

과연 내 심장이 반응하는 이유가 사랑이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으니까.

“사랑에 이유가 있다면 그건 동경이라고 하지,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

“제 대답이 충분했나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사람을 홀리게 생긴 잘난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미소를 옅게 머금은 얼굴에 경계심이 쉬이 허물어졌다.

더는 그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누웠다.

“율리아?”

그는 갑작스러운 내 움직임에 놀랐는지. 눈이 약간 커져 있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그래서 손을 뻗어 그의 심장 부근에 가져다 대었다.

“저를 보면 당신은 심장이 빠르게 뛰나요?”

“……직접 확인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잔잔히 머금더니, 내 손목을 붙잡아 심장 부근에서 손을 떼어 낼 수 없도록 고정했다.

손바닥 위로 그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내 심장이 뛸 때와 흡사했다.

“궁금증은 해결됐나요?”

내 손목을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이 떨어졌다.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기억 속에 아른거렸던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형상의 주인이…… 이 남자일까?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애정이 묻어났다.

“닮았어요.”

“누구를요?”

“……모르겠어요. 누군가를 분명 닮았는데…… 기억이 나질 않아요.”

“괜찮습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저는 변함없을 테니까요.”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왜 노을을 보니 어떤 사람이 아른거리는지.

이 남자와 같은 핏빛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

‘딜런.’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랐지만, 선명하게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딜……런.”

작게 그 단어를 중얼거리자, 체스터의 동공이 확장되고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무척 놀란 사람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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