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유모와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운동 겸, 산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율리아.”
바로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남자 목소리였다.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왜 낯설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익숙하다는 느낌이 먼저 드는지.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황녀님!”
그러나 그 파장으로 다리가 엇갈리면서 몸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유모와 시녀는 붙잡고 있던 내 팔을 놓쳤다.
그대로 땅바닥에 곤두박질칠 줄로만 알았는데…….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괜찮습니까?”
남자의 목소리는 심장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누구길래.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건지.
아무런 기억도 남아 있지 않은 게 원망스러웠다.
고개를 조심스럽게 들며, 힘없이 넘어질 뻔한 나를 붙잡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의 얼굴을 두 눈에 담은 순간 숨이 멎는 착각이 들었다.
“제가…… 당신을 놀라게 했습니까?”
걱정스러움을 담고 나를 바라보는 루비 같은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칠흑 같은 밤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사람을 홀렸다.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밝은 피부와 조각상처럼 보이는 이목구비를 가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무섭도록 잘생긴 남자였다.
남자는 나를 똑바로 일으켜 주었다.
“당신을……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율리아. 몸은…… 괜찮습니까?”
처음 보는 게 분명한 남자이지만,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나를 훑는 시선에서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나 불쾌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익숙한 듯이, 내 이름을 부르고.
나를 안다는 듯이, 행동하는 모습과.
무엇보다도 시녀도, 유모도 이 남자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우리…… 이전에 일면식이 있었나요?”
나도, 유모도, 시녀도 전부 아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 기억이 없기 때문에 이 남자가 누구인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유모는 결코 말을 해 줄 것 같지 않으니, 이 남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방법이 가장 빠른 해결책이었다.
“체스터라고 합니다.”
“……체스터.”
입에서 감도는 그 이름이, 무척이나 달콤하고 익숙했다.
뭔가 말랑말랑해지는 기분.
“황녀님,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어? 유모?”
“자세한 설명은…… 공작 각하께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유모는 상냥하게 웃음을 짓고, 시녀와 함께 정말 빠르게 자리를 비켰다.
왜? 나랑 왜 이 남자 단둘만 두고?
하지만…… 유모가 딱히 무슨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니, 이 남자가 내게 위협을 가할 사람 같지는 않았다.
이 남자는 도대체 누구지?
아까 유모가 공작 각하라고 하지 않았나? 그럼 공작인 거야? 공작님이 나랑 무슨 관련이 있는 거지?
혼란스러움에 머릿속이 온통 의문투성이로 물들어 갈 때, 당황스럽게도 남자는 갑자기 한쪽 무릎을 바닥에 굽히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봅니다, 부인.”
“부……인?”
“네, 율리아. 무척…… 보고 싶었습니다.”
나를 응시하는 남자의 눈동자에는 애틋함이 가득 녹아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를 ‘부인’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저 눈빛도. 이 모든 게 나는 낯설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거,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해한다면서 남자의 얼굴에는 슬픔과 괴로움이 가득했다.
“이, 일단 일어나세요!”
처음 보는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게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일단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모르는 게 많은 만큼, 알고 싶은 것들도 많았으니까.
그리고 내가 기억 못하는 것들을 이 남자는 알고 있을 거라는 이유 모를 확신이 들었다.
“율리아, 저와 함께 걸으시겠습니까?”
“……네.”
그가 자연스럽게 내 앞에 손을 내밀었다.
내가 혼자서는 제대로 걸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서 나오는 배려일까.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희는 결혼한 사이입니다.”
“네……?”
“무척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의 눈빛을 보자, 거짓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이였고, 나랑 결혼한 사이였다면 왜 지금까지 내게 얼굴을 한 번도 내비치지 않은 건지.
“그럼 왜 제가 깨어났을 때…… 곁에 없었어요?”
“그때도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율리아가 제게 화가 나서…… 저를 두고 혼자 황성으로 돌아갔었습니다.”
“아…….”
“그리고 황실에서는…… 당신을 볼 수 없게 접근 금지 조치를 내렸습니다…….”
아, 그래서 내가 깨어난 곳이 황성이었던 걸까.
“물론 지금은 폐하께 허락을 받고 왔습니다!”
“그런가요?”
그는 다급하게 덧붙였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내가 황성으로 돌아오지 않는 걸 바라는 것 같았으니까.
그냥 이곳에 머무르고 싶었다.
평온하고 조용한 이곳에서, 한적하게.
오늘도 나부끼는 바람이 무척이나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율리아.”
이따금 이 남자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심장이 간질거리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이곳에만 있으면 심심하지 않겠습니까?”
“……전혀요. 저는 이곳이 좋아요.”
눈동자만 굴려 그를 슬쩍 봤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가 입술만 달싹인 채,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그는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매일…… 당신을 보러 찾아와도…… 되겠습니까?”
“……안 될 건 없죠.”
꼭 잡은 손에서 아까보다 힘이 실리는 게 느껴졌다.
저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율리아, 당신만 괜찮다면…… 내일은 함께 마을에 내려가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을이요?”
“네. 이곳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말을 타고 간다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딱히 내가 이곳에서 하는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당연히 내일 잡혀 있는 일정 역시도 없었고.
거절할 이유는 없지만, 과연 이 남자가 내게 위험하진 않을까…… 하는 약간의 걱정이 있었다.
그래도 유모가 이 남자와 내가 둘이서 있도록 해 준 걸 보면 내게 위험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인데.
여기서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다양한 곳을 본다면…… 사소한 거라도 기억이 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대답을 망설이며 고민하자, 그는 조급해진 건지 말을 이어 붙였다.
“인근 마을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어디든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말해 주세요.”
그는 마치 꼭 나와 어디든 함께 가고 싶은 사람처럼 굴었다.
“좋아요. 가요, 내일.”
이 남자가 너무 간절해 보여서, 내린 결정이었다. 절대로 마음이 시켜서 그런 게 아니라.
긍정의 대답을 내놓자 그의 표정은 눈에 띄도록 밝아졌다.
얼굴에 감정이 잘 드러나는 타입일까.
“그럼 내일 함께 가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그래요.”
“오후 태양은 뜨거우니 내일 이 시간에 데리러 오겠습니다.”
“……네.”
이대로 그가 돌아갈 줄 알았기에 손에서 힘을 풀었지만, 맞잡고 있던 손은 풀리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그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방까지 데려다줄게요.”
“그냥 돌아가도 되는데…….”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굳이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어요.”
“조금이라도……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서 그럽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도 너무 절절해서, 외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건 핑계에 불과했다.
내 심장이 그를 외면하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으니까.
다시 고개를 들자, 그도 자신이 내뱉은 말이 부끄럽긴 했는지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
고작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것뿐인데,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이며 나를 집어삼켰다.
아무런 말이 없어도, 심장이 간지러운 이 느낌이 좋았다.
* * *
율리아를 데려다주고, 딜런을 찾으러 갔다.
딜런을 안고 있는 사람은 율리아의 유모라는 사람이었다.
“공작 각하.”
“……아까 경황이 없어, 인사를 못했군요. 오랜만에 봅니다.”
“딜런 님의 존재는 황녀님께 알리지 않으신 건가요?”
“제 존재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인데, 아기의 존재를 알려 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습니다만.”
오히려 그녀에게 혼란스러움만을 가중시킬 뿐.
아까 만났을 때도 느꼈다. 그저 내 존재만으로도 그녀의 두 눈은 당황으로 물들어 흔들렸으니까.
“폐하께서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서 편히 지내시라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
“무엇보다 황녀님이 우선인 공작 각하께 딜런 님을 맡기는 것보단 이곳에서 제가 딜런 님을 돌보는 게 더 낫고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정말 딜런보다는 율리아가 내게는 더 우선이었으니까.
“딜런 님은 제가 돌보겠습니다. 최대한 황녀님과 마주치지 않을 곳으로 방을 마련해 두었으니 그곳에서 지내시면 될 것 같네요.”
“그러겠습니다.”
“각하께서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딜런 님은 제가 전담하겠습니다.”
“딜런은……!”
“황녀님을 잘 부탁드릴게요!”
“…….”
“진실을 숨기는 게…… 황녀님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해서 침묵을 택했지만, 황녀님은 하루하루 말라 가고 계세요.”
얼굴을 보는 순간 느꼈다. 많이 야위었다는 것을.
“물론, 출산과 정신적 충격의 여파가 크겠지만…… 아마 머리는 기억을 못해도, 몸은 기억하고 있으신 모양이더라고요.”
“알려 줘서 고맙습니다.”
그거면 됐다. 아주 기억이 없는 게 아니라는 거.
너무 빠르게 다가가면 그녀는 경계심이 많으니 분명 선을 긋고, 토끼처럼 금방 도망칠 게 뻔했다.
천천히. 내가 다가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느릿하게 행동해야 했다.
다시 그녀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서…… 약간의 거짓말도 필요하겠지.
“그럼 딜런을 한동안 잘 부탁하겠습니다.”
물론 그녀의 기억이 되돌아올 경우, 약간의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들키면 후폭풍이 있긴 하겠지만…… 지금은 미래보단 현재를 생각하고 싶었다.
* * *
다음 날, 체스터가 말한 시간에 맞춰 나왔다.
어제와 조금 다른 모습에, 두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이건 아무리 눈치가 없고, 바보라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의 절반은 깔끔하게 넘기고, 잘 어울리는 옷을 입은 모습은 정말 나를 만나기 위해…… 아니, 내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꾸미고 왔다는 것을.
잘생긴 사람이 옷도 잘 입으니, 더욱 완벽하게 느껴졌다.
“율리아!”
그런 완벽한 조각상 같은 남자가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고,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