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환한 태양을 닮은 남자의 입꼬리는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다.
씻고 나왔는지, 그의 황금빛 머리카락은 약간 젖어 있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종이를 옆에 있던 벽난로에 넣었다.
“범인이 나라는 걸 알더라도, 물증 없이는 절대 날 잡을 수는 없겠지.”
창가 바로 옆에 놓인 의자에 앉고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눈으로, 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비록…… 황녀 암살은 실패했지만, 이와 관련된 자들은 전부…… 죽었으니, 뒤탈은 없겠지.”
그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억누르며, 옆에 놓여 있던 와인 잔을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 * *
심증은 완벽한데, 물증이 없었다.
처음부터 이드리안에게 감시를 붙여야 했을까. 그랬더라면…… 선황의 죽음은 막아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선황이 죽지 않았더라면 율리아가 충격을 받지 않았을 텐데.
충격을 받을 일이 없었더라면 지금처럼 몸이 약해졌을 리도 없었을 텐데.
모든 게 전부 내 잘못처럼 느껴졌다.
“젠장……!”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건, 안위를 위해 딜런의 존재를 꽁꽁 감추는 것뿐이었다.
우습지 않은가. 소중한 아기를 지키는 방법이…… 존재를 알리는 것이 아닌, 감추는 것이라는 게.
벌써 즉위식이 오늘이었다. 그런데 일은 하나도 진전된 것이 없었다.
작정하고 증거들을 지워 냈는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의 흔적들을 뒤쫓았지만 연관된 자들은 전부 죽어 있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
빌어먹게도 이드리안은 예전부터 질리도록 들었던 가치관을 변함없이 아주 잘 지키고 있었다.
분한 마음에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이제는 즉위식에 참석해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즉위식에 참석해야 한다는 점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범인을 알면서도, 물증이 없는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분했다.
“각하,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그래.”
의자에 걸쳐 놓았던 겉옷을 입으며, 방 밖으로 나갔다.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즉위식에 이드리안도 분명히 참석할 테니까.
“폐하를 볼 면목이 없군.”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무엇도 건지지 못한 건 사실이니까.
범인을 알면 뭐 할까. 물증이 없는데.
암흑가를 조사해 봤지만, 역시 연관된 자들은 전부 사망 처리되거나 실종 처리가 되어 있었다.
장부를 조사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단지 그 장부에 적힌 이름이, 사망자의 이름이라는 게 문제일 뿐.
정말 치밀했다.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살인을 저지른 건지.
내 손에도 많은 피를 묻혀 왔지만…… 이드리안의 손에도 얼마나 많은 피가 묻어 있을지.
“출발하지.”
일을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즉위식이 끝나는 대로, 율리아가 있는 곳으로 떠날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 * *
즉위식은 형식적인 행사였기에, 별다를 건 없었다.
단지 나는 이드리안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예전에도 알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더 어려웠다.
즉위식도 끝났고, 아마 남은 건 파티 정도.
그건 굳이 참석할 의무도 생각도 없었기에 이드리안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자리를 옮기기 위해 발걸음을 움직인 순간이었다.
“오랜만이네, 체스터.”
“……이드리안.”
“선황 폐하의 장례식 이후로는 처음인가?”
언제 뒤로 온 건지.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낯짝으로, 간단히 안부를 묻는 모습이 왜 이렇게 이질적으로 다가오는지.
“그래. 그때 이후로 처음이지.”
“우리는 친구인데, 선황 폐하의 장례식에서 인사 좀 해 주지.”
“…….”
네가 선황을 죽였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전부 알았지만, 침묵해야만 했다.
묻는 순간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정보를 노출하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선황 폐하의 장례식인데…… 황녀 전하는 보이지도 않더라? 네 부인이잖아.”
“그래서.”
“내 생각에 너는 황녀 전하를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참석했다고 보는데.”
“…….”
“내 말이 틀려?”
빌어먹게도 틀린 게 없었다.
정말 선황의 죽음에서 두 가지 감정이 교차했던 건 사실이었다.
율리아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쁨과 회귀 전에 보았던, 혈육을 잃고 지었던 그녀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으니까.
“나도 아쉬워. 선황 폐하의 장례식이라면 황녀 전하도 참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이 세상에서 사라진 사람 같지 않아?”
“……네가 무슨 상관이지.”
“왜 상관이 없어? 우리는 친군데.”
율리아의 행방을 모르는 척하는 건가.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 냈다.
그녀를 습격하라고 명령한 사람이 누군지 뻔히 아는데, 뻔뻔하게 말하는 모습에 화가 났다.
“친구 부인의 행방이 묘연한데, 어떻게 친구로서 걱정을 안 하겠어.”
“…….”
“네가 푹 빠진 여자잖아. 황실의 개를 자처할 정도로.”
황실의 개.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 사실은 제국인이라면 전부 알고 있을 테니까.
“네가 황실의 개를 자처한 이유가 황녀 전하이신데, 아직 만나지도 못했을 것 같아서. 그럼 이대로 이혼당하는 건지 걱정되잖아.”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그래.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겠지.”
“그걸 잘 알면…….”
“네가 걱정이겠지. 너는 지켜야 할 게 많고, 나는 지켜야 할 게 많이 없거든.”
이드리안의 말에 저택에 있을 딜런이 떠올랐다.
아직 딜런의 존재는 모르겠지. 필사적으로 이쪽에서 숨기고 들었으니.
딜런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게 이렇게 보면 다행이라고 봐야 했다. 율리아처럼 딜런도 분명 위험에 노출될 게 뻔했으니까.
이드리안은 분명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지.
그의 말대로, 나는 지켜야 할 게 많았다.
율리아와 딜런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쥐고 있는 권력을 유지해야만 했으니까.
이 권력이 바닥으로 떨어질 때, 나는 내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있는 방패를 잃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너는 지켜, 체스터. 나는 나아갈 거니까.”
“…….”
“지켜야 할 게 많다는 건, 사람을 유약하게 만드니까.”
“이드리안, 전부 네가 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어.”
“그 정도는 알 거라고 생각했지. 그것도 눈치 못 챘더라면…… 어떻게 네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있겠어?”
“너! 알면서도!”
“우리는 친구이기 이전에, 정적이라는 점을 잊지 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이드리안의 행동은 친구가 아닌, 정적의 행동이었던 거였으니까.
혹시나 했던 의심을 직접 확인 사살을 시켜 주니,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
“의심이 확신이 된 거면 충분하지? 뭐, 물증이 없다면 누명을 씌우는 방법도 있겠지만 넌 알잖아?”
“…….”
“블레어 가문의 장자에게 누명을 씌운다? 그건 쉽지 않지. 아직도 사교계와 정계의 입지는 우리가 더 높잖아.”
빌어먹게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누명.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결코 실행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다른 죄목을 덮어씌운다는 죄책감이 아니라, 상대가 상대인지라 누명은 오히려 역공을 당할 게 뻔해 실행하지 못했다.
아직 우리 가문의 힘이 블레어 가문을 짓누르기엔 부족했으니까.
“난 이만 가 볼게, 친구.”
“…….”
주먹을 꽉 쥐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힘겹게 억누르며, 황제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황제가 있을 만한 곳으로 가자, 시종이 알아서 안내해 주었다.
“폐하.”
“공작, 그래서 물증은 찾았나?”
“……송구합니다. 블레어 공작가의 소행은 맞으나, 공작과 연관되었다기보단…… 소공작과 연관된 것 같습니다.”
“그래…….”
“제 예상이 맞다면 폐하께서는 위험하진 않을 겁니다. 오히려 황후 폐하가 더 위험하겠죠.”
이드리안은 황권을 약화시키려는 게 아니었다. 정적인 내 계파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거였다.
그렇다면 황녀 암살에 실패하고 위치도 모르는 지금. 다음 목표는 바로 황후였다.
“경비를 강화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하지.”
“그리고 제가 떠날 때, 기사들을 안 보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분명 내가 수도를 떠나면 이드리안은 추적을 붙일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율리아의 은신처마저도 드러나게 될 테고, 그리된다면 그녀는 위험에 노출되겠지.
뒤따라오는 기사들이 가문의 기사들이 아니라면 모조리 죽이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해 낸 해결책이었다.
“제 가문 소속의 기사들이 아니라면 전부 죽일 생각입니다.”
“……그리 말한다면 굳이 보내진 않겠네.”
“네.”
“율리아를 데리고 귀환할 생각인가?”
“가능하다면 그럴 겁니다.”
어쩌면 그곳이 그녀에겐 더 안전한 곳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으니 불안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다치진 않을까. 위험에 노출되진 않았을까.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곁에 있으면 내가 지켜 줄 수가 있는데, 곁에 없으니 그녀의 생사를 하늘에 맡겨야만 했다.
“율리아가 이곳으로 돌아오는 건 쉽지 않을 텐데.”
“……율리아의 의사를 존중할 생각입니다.”
“그래. 공이 나 대신 율리아에게 안부 좀 전해 주면 좋겠군.”
“그러겠습니다.”
황성을 빠져나왔다.
저택으로 돌아가 딜런을 데리고 갈지 말지 고민한 끝에, 데리고 가기로 결정했다.
오히려 이곳에 두고 가는 게 더 불안했으니까.
“이제 출발하지.”
율리아를 보기 위해, 수도를 떠났다.
* * *
따라오는 추적대를 제거하고 딜런의 상태를 살피며 움직이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됐다.
그래도 무사히 도착했다.
미리 도착해 있던 기사들은 모습을 드러내고, 율리아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딜런은 함께 온 기사에게 맡겨 둔 채, 그녀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멀리 있다 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두 사람에게 부축을 받아 움직이고 있는 율리아.
비록 뒷모습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뛰었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무사한 모습을 두 눈에 담아 낸 것만으로 안심이 되고, 벅찬 감정이 몸을 지배해서.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했던,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멈췄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싱그러운 작고 연약한 생명체.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함을 가진 나의 사랑이자, 나의 전부.
“율리아.”
오랜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