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혼란스러웠다.
율리아가 나를 시험하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딜런을 내가 잘 지켜 내면 내게로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아니, 애초에 믿었다기보다는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했다……에 더 가깝겠지.
“가능하다면…… 딜런의 존재는 최대한 숨기는 게 좋을 거예요.”
“…….”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율리아가 온 신경을 지배하고 있었으니까.
응접실에서 바로 나왔다.
율리아를 직접 본 사람이 있었으니까. 황후의 말이 사실이 아니길 바랐으니까.
그냥 하는 말이기를 바랐다.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어 댔다.
율리아의 신변에 이상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불안하기 짝이 없는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율리아가 제대로 된 생각을 한다면 딜런을 절대 내게 넘겨주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오히려 꼭꼭 숨기면 숨겼지.
내게 드러내다 못해 나보고 키우라고 할 리가 없단 것을 전부 알면서, 얄팍한 희망을 품었다.
“각하?”
다시 아까 보고를 올린 기사를 찾아가 물었다.
“율리아를 봤나?”
“아니…… 지금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온 사람한테…….”
곁의 집사가 말렸지만 제대로 말을 할 수 있는 걸 보면 딱히 큰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쓸데없는 말로 시간 낭비를 할 여유가 없었기에, 다급히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이러면 정신 차리고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할 테니까.
“율리아의 상태가 어때 보였지?”
“큽, 각하! 일단 멱살은 놓고 얘기해 주시죠!”
정신을 차린 듯 보였기에, 멱살은 놓아주었다.
“몸이…… 불편해 보였습니다. 두 사람에게 부축을 받아 마차에 타는 걸 봤거든요.”
“또.”
“네? 또요?”
“더는 없었나?”
“더는…… 없었는데요? 뭔가 더 알아내야 합니까?”
“……됐다.”
더 묻는다 하더라도, 똑같은 말만을 반복할 게 분명했다.
아마 여기서 알아낼 수 있는 건 이게 전부겠지.
황성으로 가는 것만이 정답이었다. 적어도 황제는 모든 걸 알고 있을 테니까.
전부 알면서 내게 알려 줄 생각이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뻔했다.
어차피 이판사판이었다. 그랬기에 바로 황성으로 갈 준비를 했다.
* * *
미리 알현 신청을 해 두었기에, 황성에 도착하자마자 황제를 만날 수 있었다.
공작저에서도 봤었지만, 그때는 아무런 소식을 접하지 않았을 때였고.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과연 율리아가 위험할 뻔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
“폐하.”
“그래, 지크베르트 공. 무슨 일이길래, 얼굴 본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알현을 신청한 거지?”
“알고 있으십니까.”
“무엇을?”
“율리아가…… 습격을 받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습격을?”
잘못 찾아온 걸까. 황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암살자가 아닌, 훈련을 받은 기사였답니다. 제 측에서 괴한들은 전부 처리했으니…… 율리아는 안전할 겁니다.”
“공은 어찌하고 싶지?”
“폐하의 즉위식이 끝나는 대로 율리아가 있는 곳으로 떠나겠습니다.”
“……율리아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나 알고 그리 말하는 건가?”
“네.”
“……그래. 그렇다면 내가 막을 방법은 없겠군. 안 된다고 해도 갈 게 뻔하니까.”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공이 있다면…… 적어도 습격을 당했을 때, 율리아의 안전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저보다도 율리아가 우선이니까요.”
“그리고…… 공에게 부탁할 게 있네. 선황께서는…… 겉으로는 병사가 맞는데…… 독에 중독된 상태였다고 하더군.”
“……네?”
“진범이 누구인지. 공이 조사해 주었으면 하네. 적어도 공은 나와 율리아의 아버지를 죽일 리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으니까.”
“폐하.”
“지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공작밖에 없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율리아에 관해 물어보러 왔다는 목적이 분명한데도, 그녀의 오빠 말이기 때문인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면…… 이전에 그를 죽였던 죄책감일지도 모르겠다.
“제가 황가를 배신할 일은 없을 겁니다.”
황가의 개로 살더라도 괜찮았다. 그게 율리아를 위한 길이라면…… 아무런 상관도 없었으니까.
“……선황 폐하를 독살한 이들이 누구인지는 제가 직접 조사하겠습니다.”
“고맙네……. 아마 공이 알현을 신청한 건…… 율리아의 상태가 걱정되어 그런 거겠지.”
“……네, 그렇습니다.”
“어차피 율리아가 어디 있는지 안다면…… 모르는 게 더 독이 될 테니…… 말해 주는 게 좋겠지.”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건지. 생각보다 충격적인 내용이 나를 기다리는 걸까.
“후……. 율리아는 아무런 기억이 없어. 공작에 대해서는 당연하고, 딜런의 존재도, 나조차도 전부 잊은 상태라네.”
“……네?”
“아버지의 죽음이 생각보다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쓰러지고 한동안 깨어나지 못했는데, 정신을 차린 율리아는…… 모든 기억을 지웠더군.”
“…….”
“무엇보다 그 충격의 여파가 정신뿐만이 아니라 몸에도 온 모양인지…… 혼자 힘으로는 일어서지도 못하더군.”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아니, 저 말을 듣고 나서야 앞뒤가 맞는 기분이었다.
분명 율리아는 두 사람에게 부축을 받아 마차에 탔다고 했으니까. 정말 몸이 많이 안 좋은 게 맞았다.
건강하기를 바랐는데.
역시 아기를 가졌는데, 거기에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 겹치니 몸이 버티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사실 율리아에게 간다고 해도 율리아는 공작을 전혀 모를 텐데…… 괜찮겠나?”
“그건 제가 감내해야 할 업보겠죠.”
그녀가 힘들고 외로웠을 순간에 옆에 있어 주지 못한 건 오로지 내 탓이 맞았으니까.
“선황의 죽음에 대해 조사할 때,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요청하게.”
“……대충 누구의 짓인지는 예상이 됩니다.”
아마도 율리아에게 독을 먹였던 이와 동일인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블레어 공작 가문이 벌인 일이라는 소리인데.
빌어먹게도 그때 싹을 뽑지 못한 게 이렇게 후폭풍이 되어 다가왔다.
“그래?”
“네. 아마 블레어 공작의 소행일 것 같습니다. 이전에…… 율리아의 찻잔에 독을 탄 이와 같을 게 분명하니까요.”
“……그럼 물증만 찾으면 되겠군.”
“증거는 최대한…… 빠르게 찾아보겠습니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바로 알현실에서 나와, 조사에 착수하기 위해 공작저로 향했다. 즉위식 이전에 증거를 찾아내야만 했다.
황제도 독살한 그들이 율리아의 차에 한 번 독을 탔는데…… 두 번을 못 할까.
율리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반드시 물증을 찾아내야만 했다.
어쩌면…… 율리아의 마차를 습격하려고 했던 괴한들 역시도 블레어 공작의 사주를 받은 걸 수도 있었다.
“주인님, 오셨습니까?”
“집사. 딜런에 대한 존재는…… 바깥에 새어 나가지 못하게 막도록.”
그렇다면 딜런에게도 분명 암살 시도가 올 게 뻔했으니까.
딜런은 지크베르트 공작가의 일원이기 전에, 황족이었으니까.
빌어먹게도, 황가의 핏줄이라는 게 목숨을 위협하는 약점이 되어 버렸다.
“네, 그리하겠습니다.”
“딜런은 어디 있지?”
“요람에서 자고 있을 겁니다.”
“……그래?”
집사의 말에, 홀로 딜런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깨울 생각은 없었지만, 눈을 감고 자는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으니까.
조심스럽게 오동통한 딜런의 뺨을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버림받은 건 아니었어.”
그냥 기억이 없어져서. 그녀와 나의 아기인 딜런, 너에 대한 기억도, 나에 대한 기억도 없어서.
황제와 황후가 임시적으로 널 내게 보낸 거겠지.
만약 네가 내게 오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나는 폐인 같은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겠지.
“좋은 아빠가 되고 싶은데…… 네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내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는지 떠올려 봤지만 기억이 너무 흐릿해졌다.
아득히 어렸을 때라, 기억이 없는 게 더 당연한 편이지만.
노력은 해 보겠지만, 과연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다시 율리아의 앞에 너를 데리고 서게 된다면…… 당당하고 싶으니까.
우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를 나는 단 한순간도 미워한 적이 없다고, 못되게 군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아빠는 처음이라. 좋은 아빠가 뭔지 공부해야겠네.”
옅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율리아가 아니라면 웃을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아기라서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건지.
어쩌면 율리아가 기억이 없는 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징조일 수도 있었다.
나에 대한 기억이 없다면…… 나를 사랑하는 것도 잊었을 테고, 그와 동시에 나를 미워하는 감정도 잊어버렸을 테니까.
“딜런, 네 엄마는…… 정말 너도, 아빠도 기억 못 하는 걸까.”
율리아가 기억을 잃은 건, 양날의 검과도 같다.
오히려 좋거나, 오히려 나쁘거나. 둘 중 하나였다.
* * *
“각하!”
“그래. 진전은 있나.”
“그게…….”
블레어 공작가에 심어 놓았던 첩자들에게 공작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큰 진전이 없었다.
오히려 조사하면 할수록 의심이 가는 건 블레어 공작이 아니라…… 내 친구인 이드리안이었다.
그는 의심하고 싶지 않은 대상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조금씩은 부정했던 모양이었다.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더는 친구라고 생각할 수가 없겠네.
“블레어 소공작에게 감시를 더 붙이도록.”
“예!”
너를 봐줘서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잃을 수도 있다면…… 나는 기꺼이 네 등에 칼을 꽂을 생각이 다분하다.
내가 사랑하는 두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널 공격해야 한다면 기꺼이 그럴 테니까.
이미 네가 내 주변인을 건드렸다는 건…… 선전 포고일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블레어 공작에 대한 의심도 거두면 안 된다. 단지, 블레어 소공작을 좀 더 주시하는 것뿐이다.”
확실한 물증은 없었지만, 유독 만나는 사람이 부쩍 늘어난 네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네가 제발 아니길 원해.
만약 네가 진범이라면…… 나는 너라는 친구를 온전히 잃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그저 내 쓸데없는 의심으로 끝나면 좋겠다.
하지만 이 동물적인 직감은 언제나 빗나간 적이 없었으니, 아마도 이드리안이 범인일 확률이 높았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내 친구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지른 건지.
골머리를 앓았다. 빌어먹을 지끈거리는 통증이 머리에서 일렁이며 정신을 갉아먹고 괴롭혀 댔다.
“……그리고 기사 일부를 율리아가 있는 곳으로 보내서…… 지키라 명해.”
“예, 알겠습니다.”
율리아, 나는 당신을 두 번 다시 잃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내가 당신한테 가기 전까지 무사해야 합니다.
그 이후에는 내가 당신의 옆에 붙어서 지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