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창밖에 두었던 시선을 떼어 내어 빤히 유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거짓말하는지 안 하는지는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손에서 떨림이 보이거나 표정에 변화는 없지만, 눈동자에 서리는 감정까지 숨기기에 능숙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황녀님.”
“내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데…… 잊어버린 사람이 누구야?”
“계속…… 쭉 모르시는 게 약일 수도 있으세요.”
“아니. 유모는 알고 있잖아. 내가 궁금해하고 있고, 지금 내 머릿속에서 아른거리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아마 선황제 폐하이실 거예요. 황녀님이 쓰러지신 이유도, 선황제 폐하의 부고 소식 때문이었으니까요.”
거짓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진실을 말하는 건지.
이번에는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눈동자가 명백하게 흔들리면 의심의 여지가 충분했지만,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굳건했으니까.
“유모가 그리 말하니까. 그렇게 믿을게.”
“……전부 황녀님을 위함이에요.”
“응.”
그저 웃을 뿐이었다. 나는 기억이 없었으니까.
“황녀님의 건강이 온전히 회복된 이후에, 황녀님께서 황성으로 돌아오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돼요.”
“아니야, 괜찮아. 그리고…….”
내 몸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시간이 지나도 지금보다 몸 상태가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악화되지 않을까.
“황녀님?”
말끝을 흐리자 유모가 의아한 듯 나를 불렀지만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 * *
황제가 돌아간 후에야 딜런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할 수 있었다.
율리아는 어차피 황성에 있으니, 앞으로 볼 기회는 많았다.
그녀에게 분명히 어떤 문제가 발생했으니, 딜런이 내게 온 거니까.
“각하!”
“아기가 깬다. 소리 낮춰.”
조심성 없이 벌컥 하고 열리는 문과 시끄럽게 머리를 울리는 큰 소리에, 짜증이 치솟았다.
우리 아기가 놀라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 각하께서 급히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지? 딜런보다 덜 중요한 일에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으면 죽을 줄 알아.”
“마님과 관련된 일입니다.”
그럼 딜런보다 중요한 일이 맞지. 내게 있어서 1순위는 무조건 율리아였으니까.
“어서 말해. 무슨 일이지? 율리아의 상태가 어떠한지 알아냈나? 몸이 아프거나 그러한가?”
“그, 각하……. 그게, 잠시 황제 폐하께서 이곳에 방문하셨을 때, 마님께서 마차를 타고 외출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외출을 할 수 있을 정도면 그렇게 위독한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니 안도할 수 있었다.
아기를 낳고 죽지 않았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율리아는 무척이나 연약한 사람이라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만 같았으니까.
“단순 외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차가 돌아오지 않아서…… 수도를 쭉 둘러보니…… 그 마차가 없었습니다.”
“애초에 감시를 붙이지 않았었나? 금방 돌아오거나 떠난 거라면 거주지를 알아 오겠지.”
“그…… 마님이 수도 바깥으로 나간 이후부터 감시를 맡았던 이들에게서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뭐?”
심장이 철렁했다. 또다시 그녀가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걸 원치 않았다.
이번에는 반드시 그녀를 붙잡아 옆에 두고 싶었는데……. 처음부터 불가능이었던 건지.
“무슨 일이 있으면 보고했겠지.”
그러니 괜찮을 거야. 신변에 아무런 이상이 없을 거니까. 불안할 필요 없어.
그저 나는 율리아가 내게 맡긴 아기에게 모든 신경을 주력하면 될 뿐이야. 율리아도 그걸 원하겠지.
아기를 잘 돌봐 주기를 원할 거야.
우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를 내게 버린 건 아니잖아. 아니어야만 하잖아.
아무리 내가 미워도 아기까지 버릴 정도로 날 싫어하는 건 아니잖아.
하지만 왜 의식도 멀쩡하고 건강상 문제가 없는 그녀가 황제를 통해 아기를 내게 보낸 거지?
“각하?”
“……아니, 아니야. 그녀가…… 아기까지 미워할 정도로…… 나를 싫어할 리가 없어.”
“주, 주치의를 불러오겠습니다!”
부하가 다급히 방 밖으로 나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또다시 미쳐 가는 건가.
하지만 이번에는 정신을 놓아 버리면 안 됐다. 지금은 그녀가 남긴 소중한 존재가 있었으니까.
심장이 뛰고 있는, 피부 위로 느껴지는 온기는 분명히 살아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으니까.
또다시 광증이 일어나서는 안 됐다.
이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내가 반드시 지켜 내야만 하는 존재가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사랑하는 여자의 아기임과 동시에 사랑하는 그녀와의 마지막 남은 연결 고리였으니까.
“각하! 지금은 날뛰시면 안 됩니다! 잘못하면 아기가 위험합니다!”
부하의 부름을 받고 온 주치의가 위태로운 내 모습을 보고 말했다.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몸 안에서 들끓는 역겨움을 힘겹게 이성으로 짓누르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미치지 않고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겠지.”
“……각하, 차라리 약을 먹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지금은…… 그게 좋겠군.”
이성으로 억누르는 것도 분명히 한계가 있었으니까.
주치의는 바로 나갔다.
아마 약을 삼키면 이 지끈거리는 극심한 두통에서도 해방될 테니, 아기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터였다.
율리아는 아기와 나를 버린 게 아니라, 아기를 내게 맡기는 걸로 나에게 기회를 주는 것일 터였다.
내가 아기에게 잘하면 율리아도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각하, 약을 가지고 왔습니다.”
주치의는 빠르게 약을 가지고 와서는 건넸다.
망설임 없이 약을 삼키자, 울렁이던 속은 차츰 정상으로 돌아가고, 지끈거리던 머리의 통증도 서서히 옅어져 갔다.
“응애!”
“딜런.”
아기의 울음소리는 무척이나 낯설었다.
지금 심장 한편에서 느껴지는 이 감정은 죄책감인가, 아니면 원망인가.
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울렁거림의 정체는 무엇인지.
인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를 향했던 사랑이라는 감정만큼이나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반드시 너는 지킬게.”
그러라고 율리아의 사랑을 독차지할 네가 지금 내 곁에 있는 걸 테니까.
율리아도 네가 황성에 있는 것보다는 이곳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아니, 사실 그래야 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서.
* * *
다음 날, 율리아의 감시를 맡았던 기사 한 명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저택에 도착했다.
“각……하, 허억……. 마, 마님은 무사하시니…… 걱정 안 하셔도…….”
“무슨 일인지 당장 상황 보고해.”
당장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재빠르게 온 주치의가 기사의 명줄을 늘려 주고 있었다.
“스, 습격을 당했습니다…….”
“습격을 당했는데, 율리아가 무사하다?”
“끝까지 들어 주십시오!”
“……그래.”
“괴한들은 저희가 전부 처리했지만…… 자객이라기에는…… 저희와 같은 훈련을 받은 기사 같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훈련을 받은 기사 같다고?
“저희 측은…… 저 외에 전부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마차를…… 놓친 탓에 추적이 더는 불가하다고 판단되어 귀환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이제 편히 쉬어도 된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일이 생겼다.
누가 율리아에게 훈련된 기사들을 보냈는지 당장에라도 알아봐야 했으니까.
그래도 살아 있으니까 되었다.
단지 원하는 건. 그런 시끄러운 소란을 율리아는 모르길 바랐다.
그녀에게는 조금의 피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깨끗하고 순수한 것들로 가득한 아름답기만 한 세상만을 보여 주고 싶었다.
겁을 잔뜩 먹은 채, 희게 질린 표정으로 벌벌 떠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보좌관에게 일을 맡겼다. 아마도 나는 지금 당장 황성으로 가서, 황제를 알현해야 할 것 같으니까.
“황가에 반감을 품을 만한 귀족들에 대해 조사해 와.”
“네.”
황제는 제 동생 하나만큼은 끔찍이 아끼니, 이 일에 대해서는 협조해 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알현 신청을 우선으로 해 놓도록.”
“네. 그리해 두겠습니다.”
바로 황성으로 출발하기 전, 옷부터 깔끔하게 갈아입었다.
그리고 딜런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움직여 천사처럼 잠든 모습을 확인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워서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딜런을 지켜보던 도중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에 발소리를 최대한 죽인 채, 방문을 직접 열었다.
혹시라도 딜런이 소리에 놀라 깰 수도 있었으니까.
“주인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무슨 손님?”
“그것이…… 황후 폐하…….”
황후가 미리 연락도 넣지 않고 막무가내로 찾아왔다?
그럼 굳이 환영해 줄 이유는 없었다. 보수파의 수장으로 남을 생각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깟 자리 율리아만 찾는다면 당장에라도 집어던질 수 있었으니까.
곧 황제를 볼 건데, 굳이 황후를 만나 여기서 쓸모없는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돌려보내.”
“……께서 오신 게 맞지만, 황후의 신분이 아니라 마님의 절친 신분으로 오셨다고 전해 달랍니다.”
“당장 응접실로 안내해.”
황후나 클로이 영애로 온 거라면 정말 상대할 가치가 없지만, 율리아의 절친 신분으로 온 거라면 말이 좀 달라진다.
요람에서 잘 자고 있는 딜런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한 후에야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절친은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이곳에 온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런지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뭐, 어느 쪽이든 별 상관은 없었지만.
“무슨 일로 방문하신 겁니까.”
“딜런은 무사한가요?”
“…….”
“율리아의 친구로, 친구의 아기가 걱정되어 묻는 말이에요.”
“제가 율리아의 아기를 해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무사하면 됐어요. 본론만 간단히 말할게요.”
그녀는 종이 쪼가리를 내 앞에 내밀었다.
“이게…….”
“율리아가 지내는 곳의 위치가 적힌 종이에요.”
당장 그 종이를 빼앗으려고 했지만, 여자는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그녀의 절친답게 이 여자 역시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율리아에게서 공작을 떨어뜨리는 게 친구를 위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사자들끼리 대화를 해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
“이렇게 직접적으로 알려 주는 데엔 조건이 있어요. 즉위식에 참석한 다음에 떠나 주세요.”
“……알겠습니다.”
긍정의 대답이 나와서야 그녀는 율리아가 거주하고 있는 위치가 적힌 종이를 건네주었다.
“율리아의 정신 상태는 그리 건강하지 못해요. 그건 감안해 주세요.”
“네.”
“그럼 이만 갈게요.”
황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말은 대충 흘려들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말은 결코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딜런이 이곳으로 온 건 율리아의 의지가 아니라, 제 의견이었어요.”
뭐? 딜런을 내게 보낸 게 율리아의 의지가 아니라, 황후의 의견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