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그러니 공도 공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군.”
율리아가 죽었다라…….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믿을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이었다면 믿을 법한 말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부친 장례식에 머리카락 한 올 내비친 적이 없었으니까.
내게 죽었다고 거짓말을 할 정도로 율리아는 내가 싫은 걸까.
그렇다면 용서받기는 글렀군.
“사별이니, 재혼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테니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놈의 재혼. 율리아 외의 사람과는 결혼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는데.
율리아도 그렇고 이 남매는 대체 왜 내게 재혼을 권유하는 건지.
나는 율리아가 아닌 이상 그 누구와도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는데. 물론, 율리아도 재혼할 일 없도록 이혼을 허용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뭐, 재혼하든 안 하든 그건 공의 선택이니. 내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겠지.”
“율리아가 정말 죽은 게 맞습니까.”
“…….”
황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께서 제게 율리아가 죽었다고 그리 통보하시면 제가 순순히 믿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믿든 말든. 그건 공의 의지겠지.”
“그럼 폐하는 죽지도 않은 사람을 사망 처리할 생각이십니까.”
아마 저대로 가게 놔둔다면, 율리아를 서류상으로 사망 처리할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기를 내게 넘겨주지 않고 조용히 키웠을 테니까. 아니, 어쩌면 율리아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다시 생각하면…… 율리아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닌 이상, 내게 절대로 양육권을 넘겨줄 리가 없었다.
아직 율리아는 내게 화가 많이 났을 테니까.
“율리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어떤 생각으로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건!”
“제가 선황제 폐하의 밑에서 아무런 대가도, 말도 없이 충견으로 살아온 지난날에 대해서는 폐하가 가장 잘 아시겠죠.”
선황제가 시키는 건 군말 없이 다 했다.
그 이유는 선황제가 율리아의 부친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율리아의 소식을 알려 주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점이 컸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지저분하고 더러운 일을 전부 뒤에서 조용히 처리했다.
“제가 그런 일들을 전부 도맡아 해 왔던 건, 황가에 대한 충심이 깊어서가 아니라…… 율리아를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유감이네.”
“이제 더는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겁니다.”
“공이 이전부터 율리아의 거처를 개인적으로 찾는 것을 알고 있었네. 그러나 찾지 못하지 않았나?”
“…….”
“이번에도 별수 없을 거라고 생각되는군. 허튼 생각은 관두고, 아기나 똑바로 키우는 게 좋아 보이는데.”
“살아 있는 게 맞군요.”
나가려는 황제의 손이 살짝 흠칫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거면 됐다.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게 사실이라는 거. 이거 하나면 충분했으니까.
“폐하께서 율리아를 숨긴다 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공이 율리아를 찾지 않는 게, 율리아를 진짜 위하는 거라고 말해 두지.”
알고 있었다. 내가 진정 율리아를 위한다면 그녀를 놓아줘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무척이나 이기적인 사람이라, 결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율리아가 내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나를 죽이는 것. 본인이 죽어서는 내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죽더라도 나를 죽여야만 했다. 본인이 죽어서 내게서 벗어나려 한다면, 나도 기꺼이 따라 죽을 테니까.
“정말 율리아에게 큰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
황제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방금 황제의 태도로 정말 율리아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게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 문제가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딜런…….”
정말이지 율리아를 닮은 구석이라고는 머리카락 하나밖에 보이질 않았다.
나머지는 정말 내 자식이 맞다는 걸 증명할 정도로 너무나도 나를 닮아 있었다. 그래도 그게 싫지는 않았다.
율리아의 아기였으니까. 사랑하는 그녀의 아기라면 기꺼이 애정으로 키우는 게 맞으니까.
소중한 존재였다. 내가 지켜야 하는 또 다른 생명.
“너도 엄마가 함께 있어 주는 게 좋겠지.”
빤히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세상모르게 곤히 잠든 모습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안에서 일렁였다.
이 모든 건 전부 내 업보겠지. 아기를 가진 율리아의 옆에 있어 주지 못했던 것도, 지금 두 사람과 함께 있지 못하는 것도.
지금 율리아는 어떠한지.
도대체 상태가 어떠하기에 나를 피해 1년 동안 얌전히 숨어 있던 사람이 내게 아기를 보낸 건지.
건강하기만을 바랐다. 나머지는 내가 전부 감당하면 되니까.
* * *
“콜록콜록!”
목구멍이 타오르는 듯한 이 끔찍한 고통에 숨조차 쉬기 버거웠다.
호흡 하나 하는 게 이렇게 아픈 거라면 숨을 쉬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숨이 멎어 영영 깨어나지 않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황녀님!”
“하아……. 윽!”
이어지는 통증은 심장에서 울렸다. 누군가 내 심장을 손으로 잡아 뜯는 감각에 몸부림쳤다.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구르지 않는 이상 이 터질 듯한 고통을 견뎌 낼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고 싶어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아픔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 살려 줘…….”
“황녀님! 진통제이니, 삼키세요…….”
자신이 유모라고 밝힌 사람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내게 약을 먹였다.
온몸이 불타며 죽을 것만 같았는데, 약을 먹고 시간이 흐르자 차츰 괴로움이 덜어지며 숨통이 트였다.
숨 쉬는 게 이제는 편안했다.
“하아, 하아…….”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안정적으로 돌아오는 호흡과 심장 소리에 안도감이 들었다.
고통이 멎었으니, 이제 몸을 움직이기 위해 침대에서 내려와 일어서는 순간 시야가 기우뚱하며 기울었다.
우당탕탕-.
두 다리가 몸을 지탱하지 못해, 그대로 큰 소음을 내면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으윽…….”
“황녀님! 아직 혼자 걷기에는 무리인가 봐요. 무리하지 마세요…….”
내가 넘어지자 유모는 한걸음에 달려와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워, 다시 침대에 앉혔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아직 혼자서 거동하기엔 몸에 문제가 많았다. 근육보다는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게 큰 문제 같았다.
움직이려 하는 순간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유모는 벌벌 떨고 있던 내 손을 꼭 잡아 주더니, 아래에 앉아서는 나를 올려다보며 무척이나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황녀님, 괜찮을 거예요. 제가 황녀님의 곁에 있어 드릴게요.”
“…….”
“정말 아무런 기억도 안 나세요?”
“응…….”
무언가를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머릿속에서 거대한 장벽이 기억을 가두고 있다는 느낌에 가로막혔다.
무척이나 중요한 걸 잊어버린 알 수 없는 기분이 불편했다.
“황녀님. 여기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한적한 곳에서 지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옮길 준비를 했는데……. 언제 가실래요?”
“……오늘 가더라도 상관없어.”
왠지 떠나면 안 될 것 같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지만, 주변에서는 내가 떠나는 걸 바라는 것 같았다.
그들의 바람대로 떠나 주는 게 맞겠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그들의 바람을 들어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몸이 아픈 것과 거동이 불편한 건 숨길 수 없었지만, 지금 느끼는 이 알 수 없는 감정은 숨길 수 있었다.
“조용히 갈래.”
“네. 폐하께서도 신경 많이 써 주셨어요. 별장에서 지내더라도 부족함은 전혀 없을 거예요.”
“응.”
황족이니까. 최소한의 대우를 받더라도 불편하진 않을 텐데.
왜 심장 한편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걸까. 마치 심장을 잃어버린 것처럼. 분명 심장은 잘 뛰고 있는데.
유모의 부축만으로는 거동이 힘들었기에, 다른 시녀와 함께 두 사람이 도와주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몸이 약해 빠진 건지.
“아, 지금 폐하께서는 외출 중이시라, 폐하께 작별 인사는…….”
“괜찮아. 바쁜 거니까……. 굳이 인사할 필요는 없겠지. 괜히 귀찮게 굴고 싶지는 않아.”
“괜찮아요! 작별 인사는 하고 가도 돼요.”
“……그냥 빨리 출발하자, 유모.”
나는 황성의 불청객 같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 있는 기분에 얼른 이곳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황녀라고는 하지만…… 무언가 불편했다. 가슴 한편이 무언가로 억눌린 듯 답답했다.
황성에서 나간다면 이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채워질까. 아니면 불안감을 씻어 낼 수 있을까.
둘 중 하나만 되더라도 괜찮았다.
“떠날 준비는 끝났다고 했잖아. 가자.”
“황녀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렇게 해야죠.”
“응. 고마워, 유모.”
“하지만…… 황녀님. 이번에 내려가시면 다시 올라오는 게 힘들 수도 있으세요.”
“괜찮아.”
오히려 그걸 바랄지도 모르겠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왠지 내 몸은 황성을 거부하는 듯했다.
본능적으로 황성이 나를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내가 내 몸의 반응을 잘못 해석하는 걸 수도 있지만, 황성이 아닌 곳에 가면 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진정될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면서 움직이지만, 그럼에도 몸은 쉽게 휘청거리며 몇 번이고 넘어질 위기에 처했다.
“조심하세요, 황녀님.”
간신히 유모와 함께 마차에 탄 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만끽했다.
유모를 바라보지 않은 채, 오로지 시선은 창밖으로 고정하고 입을 열었다.
한참이나 망설였던 질문이었기에, 마음 정리가 끝난 지금에야 물어볼 수 있었다.
“유모, 내가 기억해야 할 사람이 있지 않아?”
그저 떠보는 말이었다. 누군가 머릿속에 아른거렸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 전혀 기억이 나지를 않았으니까.
유모라면 알 것만 같았다. 내 머릿속에서 아른거리는 이 의문의 존재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의문의 존재가 곧 이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일 것만 같았다. 확신은 아니었지만, 의심은 됐다.
“응? 유모? 괜찮아. 편하게 말해 줘.”
“황녀님…….”
유모가 내게 무언가를 숨긴다는 것은 눈치가 아무리 없어도 알아챌 수 있었다.
표정은 감쪽같이 숨겼더라도, 거짓말을 들킬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불안하게 흔들렸던 눈빛은 숨기지 못했으니까.
“유모는 알고 있잖아? 내가 지금 기억해야 하는 사람이 누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