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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101화 (101/141)

#101화

“체스터.”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간절하게 듣고 싶었던 그리운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으니까.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본능처럼 환청이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찾고 또 찾아도, 황제가 워낙 꽁꽁 잘도 숨겨 놔서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고개를 돌리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율리아?”

망토를 써서 얼굴을 가리고, 내게서 등을 보이고 있었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저 여자가 율리아라는 것을.

찾고 또 찾았던,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빌어야 하는 내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존재.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끌어안고 싶은 마음에 단숨에 발걸음을 움직였지만, 이내 멈출 수밖에 없었다.

“…….”

율리아가 내게서 등을 돌렸다는 것과 내 이름을 먼저 불렀다는 것.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나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나를 꺼린다는 뜻이었으니까.

내가 여기서 다가간다면 율리아는 분명히 놀란 얼굴로 도망칠 것이다. 그녀가 또다시 내게서 멀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더는 다가갈 수가 없었다. 내게는 율리아에게 다가갈 자격 따위는 없으니까.

“당신이…… 이곳에 돌아온 것만으로…… 저는 만족해야겠죠.”

그녀가 황성으로 돌아온 거라면 내게는 그녀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거니까.

성급한 마음에 주어진 기회도 놓쳐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지금은 침착한 게 옳았다.

결국 율리아를 쫓아가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더는 율리아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공허한 집으로.

“주인님, 오셨습니까.”

“돌아왔다.”

그녀와 대화를 해 본 것도 아니고, 시선이 얽혔던 것도 아니고, 스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고작 율리아가 지금 수도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두웠던 세상이 밝아졌다.

“누가 돌아왔…… 혹시 마님께서 돌아오셨습니까?”

“그래. 언제든 그녀를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그녀를 생각하면 지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녀와 어울릴 최고의 것들로 전부 바꾸는 게 좋겠지.”

“예, 그리하겠습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맞이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끝내 놓도록.”

“예.”

집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모처럼 가벼웠다.

아직 율리아는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볼 수 있는 곳에 있지 않은가.

그거 하나로 족했다.

살아 있는지. 건강은 한지. 다친 곳은 없는지. 잘 먹고는 있는지. 이 모든 것들이 궁금해도 예전처럼 알 수 없는 것보다는 멀리서라도 볼 수 있는 지금이 더 나았다.

책상 위에 놓고 수없이 들여다보았던, 따로 주문했던 율리아의 초상화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보고 싶었습니다.”

그녀의 초상화에 머리를 기대었다가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옆의 벽면에는 율리아가 찢은 우리의 초상화가 있었다.

불완전하긴 하지만, 찢긴 조각조각들을 모아 붙들어 놓긴 했다.

그랬는데……. 이어붙인 자국이 선명한 초상화가 왜 지금의 우리 사이처럼 느껴질까.

“율리아…….”

사랑하는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눈을 감았다.

율리아가 황성에 온 지금이 나와 그녀의 사이를 되돌릴 수 있는 기적과도 같은 기회였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더는 예전처럼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겠지.

그건 싫었다. 율리아가 나를 보며 화사하게 웃어 주기만을 바랐다.

그녀가 이곳에서 떠난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잠을 청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다음 날이었다.

어떻게 하면 우연을 가장한 채 그녀를 볼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던 차에, 황성에서 편지 하나가 날아왔다.

바로 뜯어 내용을 확인한 순간,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황제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였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율리아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감정에 벅차야 할까?

아니면 슬퍼할 율리아를 생각하며 나도 함께 슬퍼해야 할까?

“하……. 이런 생각을 하다니……. 이제는 나도 무뎌졌나 보군.”

과거에 갑작스럽게 예고도 없는 사고로 인해 부모님이 모두 곁을 떠났을 때, 그 감정이 어떠했는지.

그때는 사방이 적인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에……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때, 기적처럼 그녀를 만났다.

나를 기다려 줄 사람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때는 좋았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그 지옥에서 악착같이 살아남게 해 주었던 내 원동력이 율리아였으니까.

“이유가 무엇이든…… 무뎌진 게 맞겠지.”

일단 옷부터 갈아입었다. 그녀의 부친인 황제의 부고 소식은 결코 거짓이 아닐 테니까.

울고 있을 그녀를 보면 품에 안고 토닥여 주며, 위로해 주고 싶었다. 내가 옆에 있어 주겠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내게 의지해 주지 않을까.

나도 이해한다고. 지금 느낄 그 감정이 얼마나 버거운지 나도 전부 겪어 봤다고.

그리 속삭이며 여린 사람이라 펑펑 울고 있을 그녀를 달래 주고 싶었다.

머리 정돈까지 끝난 후에야 망토까지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황성으로 출발하지.”

“예.”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을 대동한 채, 황성까지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모든 귀족들이 전부 모이는 건…… 이번이 몇 년 만이려나.”

황궁에 도착한 후 저절로 시선은 그녀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움직였다.

만약 황성에 다시 돌아온 것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그녀는 참석해야만 했다. 부친의 장례식인데 참석하지 않을 리는 없었으니까.

최소한 얼굴은 비출 것이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날만 온 게 아니라 장례식이 끝나는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출석했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율리아는 부친의 장례식에 마지막 날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총애받았던 황녀가 황제의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건 보편적인 일은 아니었다.

만약 이전에 그녀가 황성에 왔다는 걸 알지 못했더라면 죽었다고 확신했을 수도 있었다.

율리아는 분명히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그런데 왜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거지?

“후…….”

품은 의문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황실 기사단의 제복을 입은 기사들을 대동한 채 율리아의 오빠가 품에 아기를 안은 채 공작저로 들어왔다.

사전에 연락도 없이, 막무가내로.

어쩌면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게 이 남매의 닮은 점일지도 모르겠다.

아직 즉위식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황제의 사망과 동시에 황위가 넘어간 것은 기정사실이니 호칭은 ‘황제 폐하’가 맞는 거겠지.

“폐하, 어떠한 일로 연락도 없이 방문해 주신 겁니까.”

“이런 식으로 대면하게 될 줄은 몰랐네만…… 이건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

“…….”

“당장 응접실로 가는 게 좋겠군.”

“네. 그리하겠습니다.”

그녀의 혈육이니 예의를 차리는 게 맞겠지. 어쩌면 율리아의 행방을 알려 주러 온 걸 수도 있고.

밑져야 본전이었다. 무엇보다 황제이기 전에 그녀의 오빠였으니까.

바로 응접실로 안내했고, 집사는 자연스럽게 다과를 금방 내왔다. 어차피 먹지도 않을 거겠지만.

그는 자신이 데리고 온 기사들을 전부 내보내고 응접실에 나와 단둘만이 남았을 때 입을 열었다.

아, 단둘은 아니었다. 아기가 포함되어 있으니.

“아직 서류상으로는 율리아의 남편이니 찾아온 건데.”

“……율리아가 죽기라도 했습니까.”

죽었을 리가 없다는 걸 알았기에 내뱉을 수 있는 말이었다.

멀쩡하게 며칠 전까지 살아 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고작 며칠 사이에 그녀가 죽었을 리는 없지 않은가.

물론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지금은 몸이 약한 그녀가 큰 충격을 받아 쓰러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래도 죽었을 리는 없지 않은가.

“유감이지만, 그러하네.”

“…….”

씁쓸하게 말하는 목소리 때문일까. 왜 저 말이 진실처럼 느껴지는 건지.

정말 부친의 죽음이 너무 큰 충격으로 다가와 약한 몸에 무리를 주어 시름시름 앓기라도 하는 건지, 아니면 앓다가 위독한 상황에 치닫기라도 한 건지.

적어도 죽은 건 아닐 거였다. 아니, 반드시 아니어야만 했다.

나는 그녀가 죽었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기는 원래 우리가 키우려고 했지만…… 그래도 친부가 있는데, 우리가 멋대로 키우는 건 아기에게 못할 짓이라.”

“아……기를 말씀이십니까?”

“그래. 율리아가 남긴 아기지. 뭐, 공이 아기를 키우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아기는 황가의 일원으로…….”

“제가 키우겠습니다.”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그녀의 아기인데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할까.

단지…… 그녀에게 아기를 원치 않는다고 했던 이유는…… 그녀가 잠들었을 때 주치의가 진찰한 바로는, 아기를 낳기엔 너무 약한 몸이라고 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작은 확률이라도 그녀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존재를 원치 않는다고 한 거였다.

나는 율리아의 안위가 우선이었으니까.

두 번 다시 차게 식은, 얼음처럼 차가워 혈색을 찾아볼 수도 없는 창백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한 그녀를 볼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래. 공이 그리 말한다면…… 우리가 키울 수는 없겠지.”

황제의 품에 안겨 있던 아기를 넘겨받았다.

율리아를 떠올리게 하는 찬란한 은빛 머리카락을 가졌지만, 나머지는 누가 보더라도 내 자식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또 그녀와 닮은 점은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서질 것처럼 연약하다는 것.

일부러 그녀가 아기를 갖지 않도록 관계를 가질 때마다 철저히 피임을 했는데, 언제였을까.

술에 취해 이성보단 본능이 더 앞섰을 때, 아마도 시기상으로 그때 생긴 아이 같았다.

“아기의 이름은 딜런이라고, 선황제 폐하께서 지어 주셨네.”

“그럼 율리아는…….”

언제 볼 수 있을지. 아기를 내게 넘겼다는 건, 그녀가 내게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야기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괜찮았다. 천천히, 아니,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었다.

그동안 잘 지냈었냐고 안부를 묻고 싶었고, 아기를 가졌을 때 옆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외롭게 둬서 잘못했다고 그녀에게 사죄하고 싶었다.

“……언제 볼 수 있습니까?”

그런데 황제의 입에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던 말이 나왔다. 그것도 무척이나 태연한 목소리로.

직접 며칠 전 그녀를 보지 않았더라면 정말 믿을 법한 무척이나 태연하고 자연스러운 어조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율리아는 죽었네.”

어디서 믿지도 않을 거짓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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