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언제 준비한 건지. 내가 지내던 궁으로 들어오자 가장 먼저 요람이 눈에 띄었다.
요람에 딜런을 조심스럽게 눕히고, 바로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딜런.”
낯설게 느껴지는 아기의 이름을 입에 담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오동통한 뺨을 살짝 건드렸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무척 낯설었다. 엄청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촉감이 좋아서 또 건드려 보고 싶었다.
아직은 곤히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계속 볼을 괴롭힌 탓일까. 굳게 닫혀 있던 눈이 열렸다.
“너는…….”
체스터를 너무 닮았어. 특히 새빨간 눈동자가 반사적으로 그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내가 기억하는 삶에서 무수히 봐 왔던, 그의 눈빛.
나를 경멸하는 눈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던 눈도, 전부 똑똑히 기억했다.
그래서 더욱 그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체스터가 미운데, 완전히 싫어할 수는 없었다.
너무 오랜 시간 그를 사랑해서.
이제는 지칠 법도 한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쉽게 잠재워지지 않았다.
“아빠가 보고 싶을까?”
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만큼, 너는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네 아빠를 보고 싶어 할까?
네가 아빠를 보고 싶어 하지만 않는다면…… 앞으로 체스터와 얽힐 일이 없을 터였다.
요람에 조심스럽게 머리를 기대었다.
“딜런. 네 아빠가 주지 못하는 사랑까지 다 내가 줄게.”
“우으!”
“보고…… 싶다.”
그를 향하는 내 마음이 지독했다.
체스터는 내 생각도 하지 않을 게 뻔한데. 늘 나 혼자만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전전생도, 이번 생도, 변함없는 이 지독한 짝사랑.
이번 생에서 이 짝사랑을 끊어 내야겠지.
“딜런, 나는 너만 있으면 돼.”
그럴 거야. 반드시 그래야만 해.
수없이 늘 되새겼으나 지켜지지 못했던 다짐을 속으로 또다시 반복하며, 아기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 * *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음이 틀림없었다.
아니, 오히려 신은 내게 불행을 원하는 게 분명했다.
“……오빠. 아니잖아.”
“율리아.”
“어제는…… 어제는 정말 아무런 이상 없었잖아!”
“……율리아.”
“분명히…… 분명히 괜찮았잖아…….”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움직였잖아.
약간 안색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음 날 죽을 것 같은 느낌도 아니었잖아.
왜? 왜, 어째서?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게 아닌 이상,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믿고 싶지 않다는 게 맞았다.
“내가! 내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아니면…… 절대로 믿지 않을 거야, 오빠…….”
어제 멀쩡하게 걸어 나왔던 아빠의 침실 문고리를 붙잡았다.
문을 열면 아빠가 잠들어 있는 모습으로 있을 테니까.
오빠의 짓궂은 장난이라고 치부하고 싶었다.
“비켜, 오빠. 거슬리게 하지 말고.”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오빠가 방해했다.
자꾸 내 앞을 가로막고, 문을 열 수 없게 나를 붙잡았다.
마음대로 되지 않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율리아! 진정해!”
“진정은 무슨 진정이야! 당장 확인할 거야!”
“너! 너…… 지금 건강도 안 좋잖아. 그냥 안 보는 게 나아……. 널 위해서니까…….”
“아빠가!”
큰 소리를 내며, 나를 붙잡아 막는 오빠의 손을 뿌리쳤다.
“아빠가…… 정말…… 죽었을 리 없잖아…….”
말을 하나하나 내뱉을 때마다 울컥이는 감정에 금방이라도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아직 울고 싶지 않았다.
아빠의 생사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닌 이상,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네가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직접 확인해, 율리아.”
“응.”
“너무 충격……받지는 말고.”
오빠는 마지못해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을 열었다.
바로 침대로 달려가 새하얀 천을 거두었다. 그러자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아빠의 얼굴이 두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빠가 죽었다는 사실을.
진실을 인지하자 심장은 두근두근 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뛰고, 몸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머리에서 지끈거리는 알 수 없는 통증이 느껴짐과 동시에 다리가 휘청거리며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아…….”
“율리아!”
오빠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더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둔기로 얻어맞은 듯 머리가 얼얼하게 아팠으니까.
* * *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 정신이 몽롱했다.
두 눈을 떴을 때는 분명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천장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디인지. 그 무엇도 기억나지 않았다.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몸을 일으켜야 할 것 같아서 움직였다.
“율리아! 정신이 들어?”
“……누구?”
모르는 여자가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나…… 세실이잖아! 나를 전혀 못 알아보겠어?”
“세……실?”
이름을 입에 담았다. 분명 기억에 없는 이름인데, 왜 낯설게 느껴지지가 않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 너! 이름이 뭐야!”
“내 이름……?”
내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머리에서는 지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다급히 손으로 뜨거운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런 행동은 아무런 효능이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머리가 쪼개질 것만 같아서.
“잠시만 가만히 있어! 황궁 의부터 부를 테니까!”
“…….”
“그리고…… 네 오빠도 불러올게!”
그렇게 말한 여자는 다급히 밖으로 나갔다.
오……빠?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내 가족 구성원이 어떠한지 기억이 날 리가 만무했다.
머리는 깨질 것처럼 아파 오는데, 입에서는 헛웃음만이 터져 나올 뿐이었다. 마치 몸 어딘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가만히 아무런 감정도 없는 표정을 짓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시점에서 갑자기 문이 벌컥 하고 열리는 소리가 났다.
“율리아!”
찬란한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무척이나 걱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또다시 아까 그 여자와 똑같은 이름을 되풀이했다.
이러면 모르고 싶어도, 본능적으로 알 수밖에 없었다.
내 이름이 율리아라는 사실 정도는.
상황을 파악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나를 부른 남자는 내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멍하게 있던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몸은…… 괜찮니?”
“……누구세요?”
“율리아……? 내가…… 내가 누군지 기억 안 나?”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다시 본 그의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번져 가고 있었다.
근데 왜 내 심장에서는 아릿한 통증이 느껴지는 건지.
“나는…… 하나뿐인 네 오빠야.”
“오……빠?”
“응. 네 오빠.”
또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이번엔 낯선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황궁 의. 율리아가 나조차도 기억 못 하네.”
“예?”
“그 점 참고하고, 몸 상태나 어떠한지…… 확인했으면 하는데.”
“예. 알겠습니다.”
둘이 무슨 얘기를 하더니, 황궁 의가 내게 가까이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황녀 전하. 기억나는 게 있다면 뭐라도 말해 주시고, 정말 기억이 없으면 없다고 말해 주세요.”
“…….”
무언가를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며 아무런 기억도 없다는 것을 표현했다.
“그럼 이제 진맥을 해 보겠습니다.”
황궁 의는 내 손목 위에 손가락을 올리더니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을까.
황궁 의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자신이 오빠라고 주장하던 남자에게 다가갔다.
“율리아, 금방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줄래? 별일 아닐 거니까.”
오빠라는 사람은 방 밖으로 완전히 나가기 전에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저런 말을 남겼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창밖으로 돌려서, 멍하니 파란 하늘을 바라봤다.
* * *
방 밖으로 나오자마자, 황궁 의는 곤란한 얼굴을 한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
“폐하…….”
전하였던 그의 호칭은 어느새 폐하로 바뀌어 있었다.
선황제의 죽음으로 인해 즉위식만을 남기고 황위가 계승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황녀 전하께서는…… 선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신 게 충격으로 닿았던 모양입니다.”
“……그래. 원래 몸이 아주 건강하던 애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건데!”
“그럼…… 황녀 전하의 아드님인 딜런 전하는…….”
“숨기는 게 율리아에게 좋겠지. 모두 함구하도록 조치하고, 딜런은…… 내 호적에 올려서 황자로 자라게 하든지…….”
그는 자신이 앞으로 내뱉을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면 지크베르트 공작에게 진실을 알려 주고, 직접 키우게 하든지. 이건 선택하고 싶지 않은데.”
“폐하……. 황녀 전하께는 알리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무얼?”
“딜런 전하의 존재를요.”
“아니. 차라리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지금이 더 나을 테지. 자신이 누군가와 결혼한 사실도, 자식이 있다는 사실도.”
“폐하는…… 그게…… 정녕 황녀 전하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 이건 전부 율리아를 위해서야.”
그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했다. 오로지 자신의 선택은 율리아를 위함이라고 쐐기를 박으면서.
이내 인기척을 느낀 그는 몸을 돌려 발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폐하!”
세실이었다.
“주제넘을 수도 있지만…… 딜런의 존재를 율리아에게 숨긴다면…… 딜런에게 미안하지 않을 자신 있으세요?”
“…….”
세실의 말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 자신이 없었으니까.
“율리아에게 숨길 거라면…… 딜런을 위해서라도 친부에게 맡기는 게 낫지 않을까요?”
“지크베르트 공작에게…… 내 조카를 보내라?”
“폐하도…… 알고 계시잖아요. 지크베르트 공작은…… 아직 율리아를 못 놓고 있다는 걸요.”
“…….”
“그러니 딜런에게 잘해 줄 거예요. 적어도 딜런이 지크베르트 공작의 아이이기 이전에, 율리아의 아이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딜런을 지크베르트 공작에게 넘기면서,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 죽었다고 하세요.”
그럼 율리아에 대한 감정을 버릴 수밖에 없겠죠. 그게 집착이든, 미련이든, 사랑이든 간에.
-라는 말이 세실의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단지 세실은 율리아를 위한 가장 최선의 해결책을 내놓았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