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몸을 회복할 겨를도 없었다.
아이를 낳은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바로 떠나야만 했다.
아빠가…… 위독하다니.
아기를 품에 안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편지의 내용을 함께 보았던 유모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녀님! 당장 움직이기에는 무리예요!”
기우뚱거리며 침대 아래로 몸이 쓰러질 뻔했지만, 유모가 재빨리 나를 부축했다.
다행히 아기도 다치지 않았다.
유모의 말이 맞았다. 아직 움직이기엔 힘들었으니까.
그걸 지금 몸소 느끼기도 했고.
“적어도 오늘 하루는 푹 쉬시고 떠나기로 해요.”
“응, 그러는 게 좋겠다.”
하지만 아빠가 걱정됐다. 오빠가 그런 편지를 보낼 정도면…… 정말 위독하다는 건데.
“황녀님, 아기님은 이리 주세요.”
“응.”
“푹 주무세요. 내일 일어났을 때 몸이 괜찮으시면 출발해요.”
유모의 말에 피식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알았어, 유모.”
아빠가 걱정되었지만, 몸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상황에서는 출발할 수 없었다. 그러니 내 몸을 회복하는 게 우선이겠지.
내 몸이 멀쩡해야, 아빠도 볼 수 있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 * *
다행히 일어났을 때는 혼자 걸을 수 있었다.
유모는 떠날 준비가 끝난 내게 마지막으로 망토를 둘러 주었다.
그리고 나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몸이 좋지 않은 나를 대신해 아이를 품에 안은 채로.
“황녀님, 괜찮을 거예요.”
“……그래야 할 텐데.”
모든 게 멍했다. 그래서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는 게 고작이었다.
사실 겁이 났다.
이렇게나 일찍 가족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건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염두에 두지 못한 상황이었다.
당연하게도 아빠한테 아기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심장이 미친 듯이, 발작을 일으키듯 정상적인 범위를 벗어나 팔딱팔딱 뛰었다.
“……괜찮을 거야.”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렸다.
반드시 괜찮아야만 해. 그래야만 해.
겨우…… 이제야…… 전생의 그림자에서 벗어났는데.
아빠가 위독하다니.
분명 여기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잖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차게 식은 손끝이 덜덜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러니 불안해하지 말자.
그냥 지금은 아빠한테 가는 거. 황성으로 어서 빠르게 가야 하는 것만 생각하는 거야.
원작에서 아빠가 죽는 시기는 벗어났잖아. 아니, 전생에서 아빠가 죽는 시기는 지났잖아.
전생에 아빠 건강에 문제는 없었잖아.
그러니까. 절대로 죽지 않을 거야.
불안한 마음을 꾹꾹 억누르며 계속해서 바깥 풍경에 시선을 고정해 두었다.
* * *
“황녀님, 이제 도착한 것 같아요.”
“아…… 응…….”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마차가 황성에 도착한 이후였다.
어떻게 황성까지 온 건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유모는 내게 후드를 덮어 주며 내 얼굴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게 단단히 가렸다.
여기는 황성이지만, 혹여나 미약한 확률로 체스터를 마주칠 수 있으니까.
마차에서 내린 후 조심스럽게 아기를 품에 안고, 근 일 년 동안 보지 못했던 황성으로 들어갔다.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지는 곳.
“후우…….”
아빠에게 가는 발걸음이 왜 이렇게 망설여지는 건지.
심호흡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시선 끝에 닿은 사람으로 인해 움직이던 발이 제자리에서 멈췄다.
멀리 있다고 하더라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너무도 사랑했던 사람이기에, 멀리 있어도 선명하게 보였다.
바람에 흐트러지는 새까만 머리카락.
공허해 보이는 피처럼 붉은 눈동자.
새까만 제복 차림.
큰 키와 제복을 입고 있음에도 숨겨지지 않는 다부진 체격.
“……체스터.”
저절로 그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정말 무의식으로 터져 나온 말이었기에,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동시에 이쪽으로 그의 얼굴이 향하는 게 느껴지자마자,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절대 알아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유모는 짐을 정리하러 자리를 비웠고, 그는 내가 여기에 있을지 상상하지도 못할 테니까.
그리고 나랑 눈을 마주친 것도 아니고, 체스터가 아닌 내가 먼저 그를 발견했으니까.
나를 알아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불안한 마음에 심장은 콩닥콩닥하는 작은 소리를 내며 빠르게 뛰었다.
“…….”
인영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나라는 건 절대로 눈치채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가 있는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닌,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본능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초식 동물이 맹수를 마주쳤을 때 미친 듯이 도망치는 그 행동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시선이 닿지 않도록, 익숙하기 짝이 없는 황성을 돌고 돌아 아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반기는 건, 아빠가 아니라 오빠였다.
“율리아.”
“오빠, 아빠는……?”
어두운 표정을 한 오빠의 얼굴에 애써 눌러 두었던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니라고.
절대 아닐 거라고 부정해 왔던 생각이 현실로 들이닥칠 수 있다는 불길함으로 변해 감정을 갉아먹었다.
“아빠는…… 왜 보이지 않고, 오빠만 있어!”
“율리아, 일단…… 일단은 좀 진정하자.”
“진짜…… 진짜로…… 아빠가 많이…… 위독해?”
“이 아이가 내 조카인가?”
오빠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게 아닌, 말의 주제를 바꾸려 들었다.
내 품에 소중하게 안고 있던 아이를 자연스럽게 데려가 안았다.
“오빠.”
“내 조카의 이름은 뭐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목소리 낮춰, 율리아. 아기가 놀라.”
“오빠는……!”
무어라 쏘아붙이려 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지금 오빠와 입씨름을 하며 시간을 낭비할 틈이 없었으니까.
“아기 이름은…… 아빠한테 지어 달라고 할 생각이었어.”
“그래?”
“응. 그래서 지금 아빠 상태가 많이 안 좋아?”
“……율리아, 너무 놀라지 마. 나는 네가…… 충격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왜…… 그렇게 겁을 줘? 그 정도로 아빠가…….”
정말 오늘내일하는 상태야?
그 물음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그게 기정사실이 되어 버릴까 두려워서.
“그래도 손자 이름 하나는 지어 주실 수 있으실 거야, 율리아.”
“……지어 줄 필요 없어.”
그깟 이름 하나 지어 주는 게 뭐가 중요해.
단지…… 단지 내가 원하는 건 아빠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 주는 거 하나인데.
내 아이의 이름은 충분히 내가 지어 줄 수 있는데.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율리아.”
이어지는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목소리에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시선을 소리가 들린 곳으로 옮기자, 안색이 좋지는 않지만, 거동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 아빠의 모습에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던 불안한 마음은 물에 녹아내린 듯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아빠!”
그래. 아빠가 위독할 리가 없잖아.
아빠가 죽을 운명일 리가 없잖아.
쓸데없을 정도로, 괜한 걱정이었다. 아빠는 이렇게 멀쩡한데.
그냥 잠깐 아빠 몸 상태가 좋지 않았을 뿐, 지금은 충분히 회복된 걸 거야.
아빠는 황제잖아. 실력 좋은 황궁 의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빠 건강이 나빠진다 한들 그걸 회복 못 시키겠어?
“이제는 괜찮은 거 맞아요?”
“그래. 오랜만에 보는구나.”
다정한 아빠의 목소리에, 불안하기 짝이 없던 마음은 안정을 찾아갔다.
아빠에게 달려가 폭 안겼다.
다시 어린애로 되돌아간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린애처럼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다.
“걱정…… 많이 했어요.”
“네가 왔다는 소식을 들으니, 몸이 아주 괜찮아졌단다.”
“다행……이다…….”
“걱정 끼쳐서 미안하구나.”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무척이나 상냥해서 안심되었다.
“우리 딸……. 몸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했을 텐데…….”
“아빠가 멀쩡하니까. 그걸로 됐어요.”
그거면 충분하니까.
“율리아, 이제는 우리 손자 얼굴을 봐야 하지 않겠니. 그래서 손자의 이름은 어떻게 되니?”
“아……! 아기 이름은…… 아빠가 직접 지어 줘요.”
아빠는 자연스럽게 오빠의 품에서 아기를 받아 안았다.
아기는 나보다 그를 더 닮았다.
보면 볼수록, 계속 그가 떠오르게 할 정도로……. 특히 눈이 너무나도 닮았다.
방금 전에도 찰나의 순간 스치듯 봤던 그의 눈동자가 똑똑히 기억났다.
예전보다 살이 빠졌고, 뭔가 초점을 잃은 사람처럼 공허해 보이는 눈동자.
멀쩡하게, 오히려 더 잘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조금 다른 모습에 더욱 뇌리에 남은 걸지도 몰랐다.
“딜런.”
“네?”
“딜런이라는 이름이 좋겠구나, 율리아.”
“……딜런.”
아기의 이름을 입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예쁜 이름이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아빠. 그럼 아기는…….”
황족의 성을 붙여야 하는지. 아니면 체스터와 동일한 성을 붙여야 하는지.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아기는…… 딜런 베아트리스야? 아니면 딜런 지크베르트야?”
흔들리는 눈으로 아빠를 바라봤다. 움직이던 아빠의 입술은 이내 닫혔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아빠는 결국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다시 열었다.
“어느 호적에 올리느냐에 따라 다를 거란다.”
아빠의 말을 이해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지…… 네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아직 서류상…… 부부라…… 지크베르트 가문의 호적으로 올라갈 거란다.”
“안 돼. 그건 안 돼요, 아빠.”
체스터에게 아기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숨길 수 있다면 계속 숨기고 싶었다.
나의 행방도, 아기의 존재도.
“그 사람한테 알리고 싶지 않아요.”
아직도 체스터가 했던 말이 기억 속에 너무나도 생생하게 남아 있어서.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 말이.
“그냥…… 그냥! 그 누구의 성도 붙이지 않고, 조용히…… 한적한 곳에서, 아니, 다시 돌아갈래요.”
지금까지 지냈던 그곳으로.
“그래. 율리아, 네가 그걸 바란다면 그리하는 게 맞겠지.”
“아빠!”
“하지만 오랜만에 황성에 왔으니, 조금 오래 머물다 돌아갔으면 하는구나.”
아빠의 입가에서 부드럽게 번지는 미소에 나 역시도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지금 이 불완전한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정말이지 괜한 걱정이었다. 그런데 왜 불안한 마음이 내게서 떠나지를 않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