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그럼 현재 율리아의 건강은 어떠합니까?”
쓸데없는 생각들은 전부 접고 떨쳤다.
그러자 그녀의 건강이 제일 먼저 걱정되었다.
“그래도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으로는 건강에는 조금의 문제도 없다고 했지만, 혹시 모르니 의원을 더 보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나마 건강에 문제가 없어 보인다는 것에 안도해야 할까.
대체 왜 아이를 가진 거지. 철저하게 피임을 했는데. 뒤늦게 의문이 들었다.
“자네의 애가 맞을 테니, 그 점은 의심하지 않아도 되네.”
“네.”
외도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율리아가 다른 남자를 만나기라도 했다면 진작 눈치챘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서 조용히 살 거라고 했으니 그곳에서 딴 남자를 만났을 리도 없을 테고.
결국에는 내 아이라는 것을 알았다.
옆에 있을 수만 있다면 옆에 있어 주고 싶었다.
먹고 싶은 게 있다면 전부 구해다 주고 싶고, 두 다리로 걷지 않아도 되도록 내가 늘 그녀를 안고 다니고 싶었다.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소중해서라기보다는, 율리아가 소중해서.
혹여 다치지는 않을까. 아프지는 않을까.
걱정들이 일렁였다. 작고 여린 그녀가 힘들어할 게 눈에 선명해서.
“율리아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공작 몸이나 잘 챙기게.”
“……네.”
“술이나 약은 끊고.”
“그러겠습니다.”
다시 율리아를 만났을 때는 지금과 같은 엉망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우리 딸을…… 잘 부탁하겠네.”
“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다시 율리아를 품에 넣게 되면 더 사랑해 주고, 아껴 주고, 지켜 주고 싶었다.
* * *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언제든 그녀가 돌아오면 맞이할 수 있도록.
그녀가 좋아할 만한 것들로 가득 꾸며 놓고 싶었다.
다시 왔을 때 이곳에 미련이라도 느껴서, 떠나지 못하게 붙잡으려고.
“주인님?”
“집사, 당장 온실을 만들지.”
율리아가 온실을 좋아한다고 들었으니까.
율리아가 이곳에 돌아오기 전에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 두고 싶었다.
그리고 아이까지도 함께 자랄 수 있도록.
그래. 아이도 있었지.
“집사, 아이가 지낼 방을 새로 꾸미도록 해.”
“예? 갑자기 아이가 지낼 방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하루라도 빨리 준비해 두는 게 좋겠지.”
만약 율리아가 다시 수도로 돌아온다면 이곳에서 지내는 게 좋을 것이다.
영지보다는 수도가 더 따뜻하니까.
그녀를 만날 때는 맨정신으로, 제정신인 상태로 만나야 하니 이제 약과 술은 끊어야겠지.
“술과 약은 전부 처분해.”
“……네, 그리하겠습니다.”
다시 사랑하는 그녀를 볼 생각을 하니, 기뻤다.
꿈에서만 간간이 나오던 그녀를 조만간 현실에서 볼 생각을 하니, 심장이 간지러웠다.
잃어버렸던 봄을 되찾을 수 있다는 그 희망이 생각보다 달콤했다.
* * *
화사한 백금빛 머리카락. 푸르고 맑고 보석과도 같은 선명한 하늘빛 눈동자.
전형적인 선한 인상을 지닌 밝음의 대명사와도 같은 남자.
이드리안 블레어 소공작이었다.
그는 부하인 남자에게 받은 보고서를 보더니,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 친구가 미쳤다?”
“예. 최근 술과 약을 전부 처분했다고 했으나…… 행적이 제정신이라 볼 수가 없습니다.”
“흐음……. 황녀 전하께서 수도를 떠나고 이제야 온전히 미쳤나 보네. 이러면 황녀 전하께 감사 인사를 해야 하나.”
이드리안은 몸을 의자에 편히 기대고 팔락팔락 소리를 내며 보고서를 넘겼다.
“하, 그렇게 죽기 살기로 아득바득 버티던 사람이 여자 하나에 이렇게 망가지다니.”
“…….”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나한테 사랑 같은 걸 할 사람으로 보이냐 했는데, 알고 보니 여자에 미친 놈이었네.”
“그리고 지크베르트 공작은 황제가 내린 명령을 비밀리에 수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권력에 눈이 먼 건지……. 아니겠지. 체스터는 황제가 시킨다고 해도 본인 의지가 없으면 하지 않을 녀석이야.”
“그럼…….”
“본인 의지로 황실의 개를 자처한 거겠지. 여자한테 미쳐서.”
이드리안은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무심하게 보고서를 책상에 툭 내려놓았다.
“황녀 전하가 수도에 와 주셔야겠어.”
“네?”
“우리도 황녀 전하가 있는 곳을 찾아봤지만, 전부 실패했잖아?”
이드리안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우리가 황녀 전하를 찾아가지 못하니 어떻게 해야겠어?”
“……그럼.”
“당연히 황녀 전하를 불러들여야지.”
“소공작님, 그 말은…….”
“황제가 죽거나, 황태자가 죽거나, 아니면 황태자비가 죽거나. 셋 중 하나겠지.”
분명 이드리안의 웃는 얼굴은 천사와 다름없는데, 악마가 천사의 탈을 썼다는 느낌이 선연했다.
“가장 확실한 건 부모의 죽음이겠지. 부모의 죽음에는 오기 싫더라도, 수도로 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
“소공작님…….”
“그리고 이제 더는 황제의 쓸모가 없어졌잖아. 그럼 황실을 흔들어야지.”
“예.”
“독의 양을 늘려.”
이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고는 창문을 열더니, 바깥의 바람을 얼굴로 만끽하며 해사하게 웃었다.
“폐하께서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똑같이 나가야지.”
“네.”
“이후의 더 큰 혼란은…… 황태자비의 죽음이겠지.”
이드리안은 그 누구보다도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웃는 천사가 그려진 한 폭의 그림처럼 눈부시게.
* * *
“황녀님, 날이 뜨거워요. 양산이라도…….”
“아기가 햇빛을 받고 싶대.”
“하지만 너무 더워요, 나무 그늘에라도 계세요.”
“응. 알겠어, 유모.”
이제는 누가 보아도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볼 만큼, 배가 볼록하게 나와 있었다.
조심스럽게 배를 쓰다듬으며 나무 그늘 밑에 놓인 의자에 조심스레 앉았다.
공기는 더웠다.
“아기는 여자아이일까? 아니면 남자아이일까?”
“잘 모르겠지만, 황녀님을 닮은 여자아이면 좋겠네요.”
“……그래?”
체스터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아니, 사실은 체스터에게 내 아이라면 성별에 상관없이 사랑해 줄 거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아이를 싫어한다는 그런 생각조차 해 보지 않은 말이 아니라.
나와 함께 아이를 무척 사랑해 줄 거라는 말을 체스터에게 원했다.
“나는…… 상관없어. 누구를 닮든, 어떤 성별을 가진 아이든.”
눈을 천천히 감았다.
분명 내가 원했었던 평온이었는데. 평온한 이 지금이 왜 이토록 불편하게 느껴지는지.
왜 나는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질 거라고 생각했을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유모, 아빠나 오빠한테서 온 편지 없어?”
“곧 올 거예요.”
“……체스터 소식은 없고?”
“황녀님…….”
“아니야, 방금 한 말은 잊어 줘.”
실언이었다. 왜 여기서 체스터가 나오는 건지.
내가 생각해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체스터라니?
여기서 왜 체스터가 떠오르는 건데? 너무 미련하기 짝이 없잖아.
바보같이……. 아직도 잊지 못한 거야? 아직도 미련이 뚝뚝 남아 있는 거야?
그의 이름을 내뱉고 나자 후회됐다.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줘, 유모.”
“황녀님이 원하시면 수도로 올라가도 돼요.”
“……아니, 절대로 올라가지 않을 거야.”
“공작 각하가 보고 싶은 거 아닌가요.”
“전혀 안 보고 싶어.”
“네. 황녀님이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러신 거겠죠. 그래도 아기님이 태어나면…… 그때는 수도에 한번 다녀오세요.”
유모의 말에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쿵쿵거리며 거세게 뛰었다.
왜? 심장이 오작동하기라도 하는 걸까. 분명 내 심장인데 내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망설이는 게 유모에게 보였을까.
유모는 마치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사람처럼 다정하게 웃으며 내가 원하는 말을 내뱉었다.
“황제 폐하나, 황태자 전하를 한 번 정도는 직접 뵙는 게 좋을 테니까요.”
“……응.”
나는 우연으로라도 체스터를 보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가족을 보러 가는 거니까.
편지로는 한계가 분명한 그리운 가족들을 직접 보러 가는 것뿐이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한 번은 보여 줘야 하니까.
그러니 나는 태어난 아기를 보여 주러 가는 거야.
“직접 뵙고, 아기님의 이름을 지어 달라 하세요.”
“응!”
“황녀님이시잖아요.”
“……그렇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고작 멀리서 체스터를 스치듯 볼 수 있을 거라는 확실하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는 것으로도 불안감이 물에 빠진 솜사탕처럼 녹아내렸다.
우습게도, 나는 체스터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었다.
* * *
“황녀님! 아드님이에요!”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아니, 이미 온몸이 식은땀으로 덮여 찝찝하기 짝이 없었다.
녹초가 된 몸은 침대에 흐물흐물하게 늘어지며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아기를 품에 안고 싶었다.
그래서 불안하게 떨리는 팔을 뻗었다.
“하아, 하……. 유모…….”
그러자 유모는 품에 안고 있던 아기를 내게 넘겨주었다.
머리카락에는 검은색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칠흑처럼 새까만 그의 머리카락이 아닌, 황족의 상징이라는 듯 찬란하게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이 자리 잡고 있었다.
풍성한 은빛 속눈썹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는 체스터를 떠올리게 하는 선명한 핏빛을 띠고 있었다.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올라오는 이 알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은 뭘까.
“……닮았어.”
찬찬히 아기를 살피니, 머리카락만을 제외하고는 단번에 머릿속에 그가 가득 찰 정도로 닮았다.
눈동자가 똑 닮아서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체스터를 닮았다. 이목구비까지.
그렇게 품에 쏙 안기는 자그마한 생명을 요리조리 살피는 중이었다.
“황녀 전하!”
매번 아빠와 오빠의 편지를 가져다주는 이가 다급히 이쪽으로 다가와 숨이 가득 찬 목소리로 날 찾더니 급박하게 쥐고 있던 종이를 넘겨주었다.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치자,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고작 한 줄이었지만 모든 사고를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율리아, 아버지가 위독하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