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술과 약에 취한 채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숨을 쉬던 중이었다.
지고하신 황제께서 황성으로 또다시 부른 것은.
이런 폐인 같은 몰골을 보일 수는 없으니, 씻은 후에 격식 있는 옷으로 갖춰 입은 후 황성으로 출발했다.
“큭, 크큭…….”
이제 저택에는 율리아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저택에서 좋아하던 건 그 무엇도 없었다.
그녀를 붙잡아 둘 만한 하녀조차도 없는 건. 전부 내가 그리 만들었으니까. 전부 내 업보였다.
율리아가 나 외에 다른 사람과는 대화하는 것조차 싫었기에, 고립시킨 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처음에 그녀가 시중드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꺼려서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독이 되어, 그녀가 내 곁에 있을 만한 미련조차도 남지 않게 만들었다.
그녀를 향한 독점욕이 이렇게 되돌아올 줄은 몰랐다.
“당신의 부친이 이번에는 무슨 명령을 내리실지.”
제국민들은 다들 전쟁 영웅이라 나를 칭송하지만, 사실상 살인귀와 다름없었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살아 있을 수 없는 전장이었기에, 누군가를 죽여야만 살아 있음을 느꼈었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더라도 살아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게 당신인데.
당신이 곁에 없는 저는 결국 다시 살인귀 같은 삶으로 돌아가게 됐네요.
“이런 일이 처음부터 제게 맞는 일이었던 건지.”
사람을 베고, 죽이고, 찢고, 부수는 게 쉬웠다.
내게서 돌아선 율리아의 마음을 되돌리는 것보다는 망가뜨리는 게 쉬웠다.
애원하고 빌고 기어도 결국에는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 꼭꼭 숨어 버려서.
손을 들어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손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피가 묻었었는지.
전생의 당신도 결국 잘못되고 어리석은 제 선택으로 죽게 했으니…….
후회를 돌이키기 위한 지금의 삶에서 전생의 죗값을 전부 되돌려받는 건지.
“각하, 도착했습니다.”
마차에서 내렸다. 또다시 황성이었다.
율리아가 황성에서 지낼 때는 기분 좋고, 설레는 마음과 가벼운 발걸음으로 왔었다면.
지금은 공허한 황성에 무의미한 일을 하기 위해 왔기에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그녀의 부친이 오라고 한 것이니, 온 거였다.
황제를 만나기 위해 안내받아 온 곳은 알현실도, 집무실도 아니었다. 다이닝 룸이었다.
“……페하?”
“앉게. 뭐…… 공작의 생활 패턴을 보아 아직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했겠지.”
“…….”
“아니, 말은 정정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니.”
“하명하실 일이 있다면 어서 하명해 주십시오. 이행하겠습니다.”
“됐네, 일단 자리에 앉…… 쿨럭쿨럭!”
“폐하?”
건강에 문제가 있어 보이는 기침 소리에 동공이 확장되었다.
“일단 앉게, 공작.”
“……예.”
내키지는 않았지만, 일단 앉았다.
“내 건강은 길어 봤자 올해를 넘기기 힘들 거라네.”
저 말을 내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황제는 좀처럼 생각을 읽기가 어려운 사람이었기에 저절로 긴장되었다.
“그리고 늘 말했지만 난…… 우리 딸의 행복을 바라네.”
“…….”
“그렇게 우리 딸이 어른이 되고 난 이후, 처음으로 펑펑 우는 모습을 봤다네.”
“많이…… 울었습니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울리고 싶지 않았는데, 사랑스러운 그녀를 내가 울렸다는 게 심장을 아프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화사하게 웃는 얼굴이 제일 잘 어울리는 사람인데.
“많이 울었지. 뭐…… 우리 딸이 그렇게 울며 이혼할 거라 난리를 칠 만한 이유는 당연히 있었겠지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적어도 공작이 우리 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 적은 없다고 생각하네.”
“……폐하.”
“뭐, 지금껏 자네에게 시킨 일이야…… 자네가 그리한다 했으니 시킨 거고.”
“예.”
“내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아. 그리고 내 건강 상태에 대해서는 우리 딸은 모른다네.”
“……그럼 왜 제게 건강 상태를 알려 주시는 겁니까.”
“내가 죽으면 우리 딸도 어쩔 수 없이 황성에 오겠지.”
황제가 죽으면 당연히 그녀도 수도로 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황제를 죽이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생각만 하고 실행하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의 목숨을 빼앗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나로 인해 우는 모습을 볼 자신이 없어서.
“그때 붙잡으면 좋겠군.”
“……네.”
“흠……. 이건 개인적인 질문이지만, 왜 공작은 아이를 싫어하는 거지?”
“아…….”
저절로 옅은 웃음이 입가에 퍼졌다.
아이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율리아의 아이라면 그녀만큼 사랑해 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아이는 필요 없다고 했던 이유는…….
“율리아의 몸이 많이 약합니다.”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죽을 일은 없다고 했지만, 아이가 태어날 때가 문제라고 했다.
아이는 무사히 태어나겠지만, 산모의 몸이 생각보다 약해서 운이 나쁘면 죽을 수도 있다고.
만약 아이를 낳고도 죽지 않는다면 천운이지만, 몸이 약해져 걷거나 뛸 수 있는 시간보다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 시간이 더 길 거라고.
율리아가 그런 삶을 살게 두고 싶지 않았다.
만약 아이의 탄생으로 율리아가 죽는다면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 아이를 온전히 사랑해 줄 자신이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잡아먹고 태어난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해 줄 자신이 없어서.
그리고 태어나서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운이 나쁘면 아이가 태어나면서 죽을 수도 있고, 운이 좋다 해도 시름시름 앓아 갈 거라 했습니다.”
“…….”
“하지만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문제없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 해서……. 아, 이건 율리아는 모릅니다.”
그녀가 잠들었을 때 공작가 주치의에게 진단을 부탁해 알아낸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조사에 의하면 그녀의 모친도 그녀가 태어나면서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되며 결국 죽었다고 했으니까.
유전이라면 더 위험했다.
율리아가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최대한 위험 요소를 배제하고자 했다.
“율리아 모르게 확인했던 사안이라, 모를 겁니다.”
“……그래서 자네는 아이가 싫다고 말했던 건가.”
“예…….”
“그럼 솔직하게 말하지 그랬나.”
솔직하게 말하자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솔직하게 말했다면 그녀는 아마도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계속 졸랐을 테지.
타들어 가는 내 속도 모르고.
어차피 확률이 높을 뿐이지. 무조건 그리되는 건 아니지 않냐며, 나를 설득하려 들었을 테니까.
“생각보다 그녀는 아이를 갖고 싶어 하더군요. 솔직하게 말했다면 이런 게 무슨 이유가 되냐며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을 게 분명합니다.”
“흠……. 공작의 판단이 옳았다는 생각이 드네.”
“저는 그녀의 목숨을 담보로 아이의 탄생을 원하지 않으니까요.”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두 눈에 담아낼 자신도 없었다.
오랫동안 율리아와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고 싶었다. 욕심이라는 걸 알지만 그녀는 욕심을 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게 과욕이었기에 지금 그녀가 내 옆에 없는 거겠지.
“과욕이 화를 불렀나 봅니다.”
나의 행복은 율리아가 온전하게 살아 있는 채로 사랑하는 건데.
그녀의 행복은 나와 달랐던 모양이다.
“……내가 죽으면 아마도 시끄러워지겠지.”
“네.”
“나는 공작이 우리 아들인 태자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길 원하네.”
“그럴 겁니다.”
율리아의 하나뿐인 형제니까.
그녀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나 역시도 지킬 거니까.
두 번 다시는 그녀를 포함한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을 지워 낼 생각이 없으니까.
“율리아는 이런 어두운 부분을 모르게…… 부탁하네.”
“그럴 겁니다. 지저분하고 더러운 건…… 저와는 어울려도, 율리아하고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율리아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고, 그 사이에서 눈부시게 웃어야 했다.
내가 하는 이런 더럽고 지저분하고 악취가 풍기는 일은 모르는 채, 고결함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야 했다.
아, 나와 그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구나.
그녀는 빛인데. 나는 그녀의 빛을 죽이는 어둠이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지금껏 그래 왔듯,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사랑하는 그녀에게 이런 악취가 진동하는 일을 보여 주고 싶지도, 들키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그녀가 겁을 먹어 뒷걸음질 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나를 보는 눈빛에 공포나 두려움이 담겨 있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이건 공작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해 주는 거지만.”
황제는 잠시 뜸을 들이며 내가 모르는 중요한 사실을 말하려는 듯했다.
대충 봐도 원래 말해 줄 생각이 없었는데, 말해 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공작을 못 믿어서 율리아와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니라, 지금 율리아에게는 휴식이 필요해서 그런 거니 이해해 주면 좋겠군.”
“이해합니다. 지금은…… 이혼 소송을 보류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내게 유책 사유가 없다 하더라도, 황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혼이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황제가 마음먹고 이혼을 강요한다면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혼은 가능했다.
어느 정도 황제가 나와 그녀의 이혼을 그리 반갑게 보고 있지는 않기에, 늦어지는 거였다.
“크흠, 율리아가…… 아이를 가졌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가 쓰레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역겨울 정도로 내가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와 그녀를 연결하는 유일한 존재가 혼인 신고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생긴 아이라는 사실이.
다시 그녀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다는 희망으로 보였으니까.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