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누군가를 죽이고, 베고, 찢고, 부수는 건 내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게 가장 익숙한 일이었다.
전장에서 지내던 시절이 가장 편했으니까. 물론,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하명하시면…… 즉시 처리하겠습니다.”
“공은 일 처리가 빨라 매우 마음에 드네.”
저따위 말이 아닌, 율리아의 위치를 알려 주면 좋으련만.
아마 황제는 내게 율리아가 어디서 살아가고 있는지 절대로 말해 주지 않겠지.
그녀가 먼저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이상.
하지만 적어도 이혼만큼은 보류하고 싶으니, 어쩔 수 없이 황실의 개 노릇을 하고 있었다.
율리아가 나를 개처럼 다룬다면 군말 없이 개처럼 굴 텐데.
황제의 사냥개로 산다는 건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공작가의 사병을 우리 딸의 행방을 찾는 데 쓰기엔 지금 하는 일에도 인력이 부족하지 않나.”
“…….”
“찾기도 힘들겠지만, 만약 찾아낸다 해도 과연 우리 딸이 공작을 반가워할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만나고 싶지 않다면 거짓이겠지만, 그래도 멀리서라도 그녀를 볼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단지, 잘 살고 있는지.
어딘가 아프지는 않은가. 그 정도만 확인하고 싶었다.
“공작도 알겠지만, 우리 딸은 화나면 꽤 무서워지는 타입이라.”
“…….”
“율리아가 화가 풀릴 때까지 기다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협박해 율리아의 거처를 알아내서 데려오고 싶었다.
여린 손목과 발목에 사슬을 채워 내 허락 없이는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두고 싶었다.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도 그녀가 나만을 바라보게.
율리아를 독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됐다. 내가 잘하는 게 망가뜨리고 부수는 거라지만, 그녀만큼은 소중하게 대하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차라리 내가 찾지 못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찾아냈다면 결코 신사적인 행동을 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
“……하명하실 게 없으시다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도 술에는 의존하지 않는 게 좋겠지.”
“술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제는 약에 의존할 뿐.
술은 이제 더는 내게 이 끔찍한 괴로움을 잊게 해 주지 못하니까.
율리아가 이런 내 추악한 모습은 몰라서 다행이었다.
그녀와 결혼한 후에 수도로 돌아오면서 그녀 모르게 황제의 명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을 처리했었는지.
기억도 흐릿했다.
단지 황명으로 처리했던 이들의 피 냄새가 내게 배인 건 아닐까 걱정됐을 뿐.
적어도 율리아에게는 내가 사람을 죽이는 것과 죽이고 난 이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아름답고 깨끗한 것들만 보며 평온과 아늑함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고결하게 살아가길 내가 원했으니까.
“우리 딸이 보면 참 좋아하겠군.”
“…….”
“쯧, 그래도 폐인처럼은 지내지 않는 게 좋겠네. 혹여 우리 딸이 나중에 말을 바꿀 수도 있으니.”
황제의 말대로 지금 내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율리아의 빈자리는 너무 컸다.
그녀와 헤어진 후로는 내내 고독과 공허 그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고, 눈을 뜨면 스스로가 점점 미쳐 간다는 것이 느껴졌다.
하루에도 정신이 몇 번이고 오락가락했다.
다시 한번 더 황실을 무너뜨리고, 이번에는 그녀를 손에 넣는 생각을 했다.
나만을 바라보게. 나 외에는 볼 수조차 없게.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감춘 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래. 다음에 또 할 일이 있으면 그때 부르겠다.”
“네.”
밖으로 나오자 꽃잎이 눈앞에서 휘날렸다.
벌써 봄이었다. 봄은 왔는데, 내 마음은 아직도 겨울에 멈춰 있었다.
율리아가 없는 삶은 생각보다 잔혹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눕는 순간 그녀의 빈자리가 시리게 느껴졌으니까.
품에 닿는 따뜻한 온기도, 말랑하고 부드러운 몸도 전부 없었다.
“율리아.”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을 놓아준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아주 많이, 당신이 수도를 떠나게 둔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좀 더 당신한테 처절하게 빌며 애원했다면 당신은 제 곁을 떠나지 않았을까.
점점 미쳐 가는 게 느껴집니다. 이대로 미쳐 가면 안 되는데.
당신을 부수고 망가뜨려서라도 곁에 두고 싶다는 추악한 욕망이 나를 지배하게 두어서는 안 되는데.
“……용서해 주세요.”
당신한테 빌 테니까. 개처럼 애원할 테니까.
발 닦개처럼 당신의 말이라면 뭐든 다 들을 테니까. 옆에만 있어 주세요.
저는 결코 당신을 잊을 수 없을 테니까.
지은 죄가 명백해서, 감히 당신을 원한다는 욕망을 품을 자격이 없다는 걸 알지만.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적인 인간이라, 당신이라는 금단의 열매를 자꾸만 탐하게 됩니다.
“당신이 어서 돌아오지 않으면…….”
정말 돌아 버릴지도 모르겠으니까.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힘들고, 맨정신으로는 버틸 수가 없어서.
술에 의존하다가, 더는 술마저도 쓸모가 없어져서 조금씩 약에 손을 대게 됩니다.
황제가 사랑하는 그녀의 위치를 절대로 내게 알려 줄 리가 없을 테니.
그녀를 위한 일이라고, 그녀에게 속죄하는 길이라고 나를 속이며, 충견처럼 황제에게 복종하면서 그녀를 찾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도 율리아를 절대 놓지 못할 테니까.
“……전생에는 당신이라는 구원을 죽여 곁에 없었는데.”
애꿎은 바람만이 머리카락을 스쳤다.
봄처럼 싱그러운 그녀가 당장에라도 내 품에 안겨 오길 원하는데, 그 바람은 욕심이 되었다.
“회귀한 지금은 구원과도 같은 당신이 제 잘못으로 인해 곁에 없네요.”
이곳의 봄은 왔는데, 당신이라는 봄이 곁에 없어서 저의 계절은 아직 겨울에 멈춰 있습니다.
눈을 감았다.
난 이번 생에서 당신을 만난 그 순간부터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시간이 없었는데.
당신의 관심 한 조각이라도 받고 싶어서.
몸에 상처를 스스로 만들기도 했었다. 당신의 관심이 아닌 걱정이라도 받고 싶어서.
잠시 당신의 옆자리를 비운 사이에, 당신이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질투심에 곧바로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갔었다.
다른 남자 앞에서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보기 싫었습니다.
그 웃음은 그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율리아, 당신은 제 것인데.”
그녀가 없는 황성에는 오래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황성이 그녀가 오랫동안 살아온 장소이기 때문이겠지.
“큭.”
이런 나를 비웃었다.
그녀가 곁에 없던 시간이 더 길었는데, 왜 나는 공허함을 느끼는 건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그녀가 없는 공허한 저택으로 애써 옮겼다.
* * *
황제가 명령을 내리지 않는 시간을 소비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술 혹은 약.
둘 중 하나에는 취해야만 버틸 수 있었다.
율리아와 비교한다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미약한 것들이지만, 이거라도 없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역겹고 추악한 시커먼 욕망이 당장에라도 나를 잠식할 것만 같아서.
절대로 저질러서는 안 될. 반복해서는 안 될.
한번 저지르는 순간, 나와 그녀의 사이를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려는 더러운 욕망이 꿈틀거렸다.
“율리아…….”
결코 반역은 생각해서는 안 될 금기였다.
반역은 그녀마저도 죽음으로 몰아가는 극단적인 방법이었으니까.
나는 살아 있는 율리아와 다시 사랑하고 싶은 거지. 죽은 율리아를 붙잡고 울부짖고 싶은 게 아니니까.
시선을 내리니 왼손 약지에 끼워진 그녀와 한 쌍으로 맞춘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과연 율리아도 이 반지를 끼고 있을까. 아직 빼지 않고 있을까.
궁금했다. 아직 율리아에게 마음이 남아 있는지.
그녀가 수도를 떠나기 전에 봤을 때는 끼워져 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후우…….”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녀가 떠올라서, 잠깐이라도 그녀를 잊기 위해 술을 삼켰다.
아니, 그녀를 잊는다기보다는 그녀의 빈자리를 잠시나마 망각하기 위함이었다.
눈을 감았다. 그럼 환영이라도 보일 테니까.
‘체스터!’
눈부시도록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부르는 율리아의 모습이 회상되었다.
품에 쏙 안기던 작고 여린 생명체.
허리는 한 손에 붙잡힐 정도로 얇고 가녀렸으며, 그대로 안아 들면 깃털처럼 가벼웠던 몸.
모든 게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그녀만이 없었다.
그녀의 흔적이 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그녀가 환상이 아니었다는 게 이리도 선명히 남아 있는데.
“주인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집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적당한 때 잘 왔다.
더는 술에 취하지를 않으니, 약에라도 취해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을 테니까.
“약을 가지고 와.”
“주인님, 이런 모습을 마님이 보신다면…….”
“마님……. 그래, 아직은 이혼하지 않았으니까.”
아직은 법적으로 부부였다. 내가 이혼을 해 주지 않고 버티는 중이니까.
부부라는 관계는 내가 포기하면 바로 끊어져 버릴 그녀와 나 사이의 유일한 연결 고리였다.
지금 나와 율리아는 내가 억지로 붙잡고 있는 관계였다.
내가 놓으면 영영 남으로, 아무런 사이로도 남지 않는 그런 관계.
“집사는…… 율리아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
“돌아오실 겁니다, 주인님.”
부질없는 희망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희망에 붙잡혀 흔들렸다.
그녀의 부친인 황제가 나를 이용하고, 그녀가 무엇을 하고 사는지조차도 알려 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사냥개처럼 쓰이는 건.
아니, 충견처럼 군말 없이 황제에게 복종하는 건.
전부 율리아의 부재 때문이었다.
“아니, 그녀는 돌아오지 않아.”
알고 있었다. 절대로 그녀가 내게 돌아오지 않을 것을.
그러니 황제는 내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는 거겠지.
율리아가 내게 돌아오고자 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는 거니까.
“하지만…… 내가 찾아가는 방법은 있지.”
“주인님…….”
“계절이 가기 전에, 황성을 잘 살피고 뭔가 멀리 가는 듯한 이가 있다면 추격해.”
황제라 할지라도, 그녀와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는다면 분명 사람을 쓸 테니까.
그럼 그녀의 소재지가 어디인지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럼 그 끝에는 율리아가 있을 테니까.”
돌아오지 않는 그녀를 만나는 방법은 내가 그녀를 찾아가는 것뿐이니까.
뺨을 맞더라도 상관없었다. 단지 그녀의 손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될 뿐.
그저 잘 지내는지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