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95화 (95/141)

#95화

앞으로 내가 지낼 곳은 무척 조용했다.

사람 구경도 거의 힘들 거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 정도로, 숲속에 커다란 저택 하나만 달랑 있었다.

사람의 발소리보다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더 잘 들릴 것만 같은 곳이었다.

“유모.”

“네, 황녀님.”

“나 주변을 돌아다니고 싶어.”

“그리하세요. 폐하께서 이곳에서는 황녀님이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고 하셨으니까요.”

유모는 자연스럽게 내게 담요를 둘러주었다.

이미 두꺼운 드레스를 입어서 따뜻한데.

유모가 따라오려는 듯한 모습에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혼자 돌아다닐래.”

“네. 그럼 담요는 꼭 두르고 계세요.”

“응. 그럴게.”

혼자 바깥으로 나갔다.

이곳의 겨울은 눈은 내리지만, 수도에 비해 춥지 않다고 들었다.

눈이 소복히 쌓인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다.

“……아가야.”

한 손으로는 담요를 여미고, 다른 손으로는 아직 나오지 않은 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 안에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어지며 휘날렸다.

온몸을 파고드는 바람은 무척이나 시원했다.

좀 더 이 부드러움에 녹아들고 싶었다.

“여기가 한국이었다면…….”

눈을 감고 바람을 만끽했다.

새로운 것들을 아이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직접 볼 수는 없더라도, 내가 느끼는 감정을 전달해 줄 수는 있을 테니까.

소중한 아이가 아름답고 깨끗한 것만 보고 느끼길 원했다.

이 아이는 사랑을 가득 담아 지극정성으로 소중하게 키워야지.

단지 아쉬운 게 있다면, 전생에 살던 곳이었더라면…….

“……아이의 성별은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입덧은 나아지고 있었다.

몇 가지 음식들은 입덧 없이 먹을 수 있을 정도니, 다행이었다.

내가 잘 먹어야 아이가 아무런 문제 없이 건강하게 쑥쑥 자라날 테니까.

“어……?”

차가운 무언가가 피부에 닿았다.

고개를 들자, 하늘에서는 새하얀 함박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왜 여기서 체스터가 떠오르는 건지.

눈은 새하얀데, 왜 새까만 그가 어른거리는지.

“……보고 싶어.”

체스터가 미운데. 그가 미워 죽겠는데.

그를 미워하는 마음보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몸이 멀어지니까 오히려 그가 더 그립게 느껴졌다.

“보고 싶어, 체스터.”

괜히 그를 떠난 걸까. 약간 후회감이 밀려왔다.

그냥 그때 모르는 척……할 걸 그랬나.

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거라 할지라도,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걸.

체스터가 주는 거짓된 애정에 취해 있었어야 했는데.

“아냐, 아니야!”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도대체 나는 방금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다시금 배 부근을 손으로 매만졌다.

이 안에 그의 아이가 있잖아. 체스터는 아이를 무척 싫어하잖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아이를 갖는 걸 싫어했으니까.

만약 내가 아이를 가진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아이를 지우라고 할 게 분명했다.

“참아야 해. 체스터가 보고 싶어도…… 그리워하면 안 돼.”

아이를 위해서라도 내가 체스터를 잊어야만 했다.

사실 수도에서 떠난 이유는 체스터를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보다는, 그가 나 말고 다른 여자를 만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사랑하는 남자가 나 외의 다른 여자와 어울리는 모습을 두 눈에 담아낼 자신이 없어서.

이미 전전생에도 경험했듯, 사랑하는 남자의 시선이 내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한다는 건 심장을 아프게 했으니까.

“너를 꼭 지킬 거야, 아가야.”

배를 팔로 소중하게 감쌌다.

* * *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다.

시간이 이만큼이나 흐른 만큼, 몸에도 확실히 변화가 있었다.

배가 눈에 보일 만큼 볼록하게 나왔으니까.

새로운 계절이 찾아오기 전에, 아빠와 오빠는 선물을 보내왔다. 태어날 아기에게 줄 선물인 걸까?

홀로 방 안의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창밖을 내려 보았다.

“……없는 건 당신 하나인데, 나는 모든 걸 다 가졌는데.”

마음속에는 공허함이 가득했다.

시간이 지나면 무뎌질 줄 알았는데, 멀어질수록 보고 싶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체스터는 더욱 내 마음속에서 선명해졌다.

“당신 하나만 갖지 못한 것뿐인데…….”

체스터, 왜 나는 당신을 놓지 못하는 걸까.

아직도 당신을 향해 뛰는 내 심장이 마치 저주를 받은 것만 같아.

당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빨라지는 심장 소리가 싫어.

“황녀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유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유모.”

체스터의 생각을 밀어내고 평소처럼 유모를 맞았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응, 무척 괜찮아.”

“꽃이 무척 예쁘게 피었는데, 꽃구경이라도 가시겠어요?”

피식-.

유모의 말에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응. 많이 예뻐?”

“네, 정말 예쁘게 피었답니다. 아기님께도 꼭 보여드리고 싶을 정도로요.”

“그래? 그럼 꼭 가야지.”

의자에 앉아 있던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유모와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정말 유모의 말대로 바깥에는 다양한 꽃들이 만개했다.

“그…… 황녀님.”

“응.”

“이혼 소송은 아직 진행 중이랍니다…….”

“응.”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그가 순순히 이혼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체스터에게는 내가 필요했으니까.

그게 내 몸이든, 내 배경이든, 내 신분이든.

뭐가 되었든 체스터에게는 내가 필요했다. 그러니 순순히 이혼해 주지는 않겠지.

정말 체스터의 말대로 그에게 합당한 유책 사유는 없으니 더더욱 이혼은 힘들 테니까.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어.”

“황녀님.”

“그냥…… 아기가 무사히 태어날 때까지만이라도 떨어져 지내는 것만으로 충분해.”

아무리 체스터라 해도, 태어난 아이를 죽이지는 않겠지.

그러니 배 속에 있는 이 소중한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만, 체스터와 마주치지만 않으면 된다.

무엇보다 그가 재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나 말고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

“유모.”

꽃잎들이 바람을 따라 흩날렸다.

그저 멍하니 세상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너무나도 파랗고, 세상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뺨을 스쳐 지나가는 부드러운 바람에 눈을 감았다.

“진짜 봄이 왔네.”

봄은 이미 왔는데, 내 옆에는 당신이 없네요.

눈도, 꽃도, 전부 당신과 함께 볼 거라 믿어 왔는데.

지금 내 옆에는 사랑하는 그가 없었다.

“황녀님, 차를 내어 올까요?”

내 공허한 마음을 알아차린 듯 유모가 물었다.

“응. 다과도 같이.”

유모는 차와 다과를 준비하기 위해 안으로 향했다.

전전생의 나는 지금쯤 차갑고 깊은 황궁 호수 안에서 차갑게 얼어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 나는 살아 있었다. 죽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가족들도 무사히 살아 있었다.

그리고 내 안에는 소중한 생명이 존재하고 있었다.

“당신만…… 내 곁에 없을 뿐인데. 모든 게 평온한데.”

나는 왜 이 평온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고작 체스터 한 사람만 없을 뿐인데.

공허했다.

“왜 내 삶에 당신이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웠다. 체스터가 보고 싶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리라 생각한 내가 너무나도 어리석었다.

윤회를 거쳐서 사랑한 남자인데. 겨우 몸이 떨어진다고 마음이 식을 리가 있을까.

내 삶의 빈 여백을 오로지 체스터로 채워 왔는데.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흡!”

다시 율리아의 삶을 반복했을 때도, 내 머릿속에서 체스터가 늘 존재했으니까.

나는 전생에서 그나마 벗어났던 거였다.

그를 내게서 완전히 지워 내려면 죽고 이 삶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부여받아 이 삶의 기억 없이 살아가야 했다.

그것만이 내가 체스터를 잊고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신은…… 나한테만 잔인해.”

이 삶을 번복하게 한 신은 나의 불행을 바라는 것 같았다.

나의 괴로움과 고통, 그리고 아픔과 시련.

이런 것들을 내게 원하는 것만 같았다. 가혹하게도.

“황녀님, 차와 다과를 가지고 왔어요.”

“아, 유모.”

유모는 능숙하게 내 앞에 있는 테이블에 먹을 것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척했지만 실은 모든 게 재미없었다. 즐거움도 느낄 수가 없었다.

체스터가 없는 나의 삶은 무채색과도 같다는 것을 그를 떠난 후에야 깨달았다.

그에게로 돌아가고 싶으면서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교차했다.

“체스터는 잘 지내고 있어?”

최대한 무심하고 아무렇지 않게 질문을 던졌다.

아마 유모는 체스터가 요즘 어찌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황녀님…….”

“잘 살고 있어?”

나 없이도? 내가 없으면 죽을 것처럼 굴던 남자였는데.

전부 연기라는 걸 알아도, 혹시나 진심이 아니었을까 하는 헛된 생각이 들었다.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릇된 희망을 품었다.

“……저도 제국 수도와 관련된 소식을 몰라서……. 죄송합니다, 황녀님.”

“그럼 나랑 이혼은 제대로 된 거고?”

“아직…… 이혼이 안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적어도 다른 여자를 곁에 두지는 않았겠네.

그거면 충분했다.

사랑하는 남자의 옆에 내가 아닌 다른 여자가 있지만 않다면 괜찮았다.

내가 이기적이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두 번은 그의 눈이 내가 아닌, 딴 여자를 보는 모습이 싫어서.

내가 아닌 다른 여자랑 잘 사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조금 궁금한데.”

전에 봤던 것처럼 폐인처럼 지내고 있을지.

아니면 신경 써야 할 내가 없으니 평소와 다름없이 잘 지내고 있을지.

“알아내기는 힘들겠지?”

“……죄송합니다, 황녀님.”

“괜찮아.”

어차피 체스터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아니까.

* * *

율리아가 없는 황성에 굳이 온 이유는 하나였다.

그녀의 부친을 만나기 위해서.

율리아를 숨겨 둔 장본인이니, 그녀가 어디에서 살아 숨 쉬는지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였으니.

율리아를 보기 위해서는 뭐든 할 생각이었다.

“폐하.”

“지크베르트 공.”

그래서 황실의 더러운 일들을 전부 뒤에서 처리하는 황가의 사냥개가 되었다.

내게서 등을 돌린 율리아를 고작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서.

그녀가 짖으라면 짖고, 핥으라면 핥고, 기라면 기려고 했는데.

지금 나는 황실의 더러운 일들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수고가 많네.”

“폐하, 그녀는 지금…… 어디에서 지내고 있습니까.”

“우리 딸은 잘 지내고 있지. 상실감이 꽤나 컸던 모양이더군. 수도에 한 번을 오고 싶다고 하지를 않으니.”

율리아의 앞에서는 착하고 자상한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없는 지금은 능구렁이 같은 황제였다.

황실에 누가 될 만한 온갖 더러운 일들을 내게 서슴없이 시켜 댔으니까.

그것도 율리아를 방패 삼아.

내가 그녀에게 지은 죄가 많이 있고, 눈앞의 황제에게도 전생에 저질렀던 일도 있어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일이 힘든가? 뭐, 공작이 이 일들을 하기 싫다면 이혼을 승낙해 주면 되네.”

“……아닙니다.”

쯧, 능구렁이 같은 황제.

도대체 어디에 율리아를 숨겨 둔 건지 도저히 찾아내지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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