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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94화 (94/141)

#94화

“쯧.”

골치가 아팠다. 율리아와의 마찰이 벌써 빠르게 퍼져 나갔는지 반대파의 기세가 등등했다.

단 한 번도 율리아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지만, 이럴 때면 그녀의 존재감이 더더욱 확실히 느껴졌다.

승전보와 함께 군사력으로 저쪽 계파를 견제하는 것도 한계에 봉착했을 때, 구세주처럼 율리아가 품 안에 들어왔다.

“하…….”

율리아는 사막 속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전쟁에서 시달려도 그녀를 만날 때만큼은 모든 걸 잊고 숨을 쉴 수 있었다.

때 묻지 않은 그 순수함.

예쁜 얼굴과 부드럽고 말랑한 고운 피부, 숨결조차도 달콤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만 같던 여자.

오늘따라 율리아가 더 그리웠다.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그 달콤함에 취하고 싶었다.

말랑하고 뜨거운 그녀의 입술을 삼키고 싶었다. 벌어진 입술 틈새에 있는 그녀의 숨결을 탐하고 싶었다.

“……이만 회의를 파하지.”

황제의 말을 마지막으로, 회의는 끝났다.

보수파의 수장이 된 이유는…… 오로지 권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쓸모가 없어졌다.

권력도, 명예도, 재력도.

이미 그 모든 것을 동원해서 찾고자 하는 사람을 찾았으니까.

그러나 결국 얻지 못했다. 가장 얻고 싶은 그녀를 제외하고 남은 전부를 얻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회의가 끝나고 나오는 길이었다.

황성에 온 김에 율리아의 얼굴을 스치면서라도 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렁였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아직은 내게 그럴 자격이 없었으니까.

“각하.”

황성 밖으로 나서던 도중 다급히 다가온 부하가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이지.”

“그게…… 부인께서 떠나셨다 합니다.”

예상 못 한 일은 아니었지만, 막상 그녀가 떠났다고 하니 심장이 있던 곳이 허전해지는 기분이었다.

무릎까지 꿇고 눈물을 내보이며 처량하게 매달린다면 율리아의 동정심을 자극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흔들리는 눈빛에 희망을 얻은 찰나.

거짓말처럼 율리아는 내게서 등을 돌렸다.

그때의 감정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자존심도 내버리고 밑바닥까지 내보이며 매달렸으나,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으니까.

“……떠났다고.”

다시는 내게서 등을 돌리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하루의 시작과 끝은 율리아였는데, 그녀가 없으니 삶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사람이 망가진다는 게 무엇인지. 처절하게 온몸으로 깨닫는 중이었다.

“추적해.”

자존심도 전부 내다 버렸다.

정말 율리아가 내게 돌아와만 준다면 주인의 말을 잘 듣는 개새끼처럼 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본인이 한 말을 지켰다.

조용히 떠나서 살겠다는 말을.

아직 이혼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떠났다.

“……더는 신사적일 필요는 없겠지.”

최대한 신사적으로 행동하고 싶었다.

전생을 기억하지 못했던 때도, 밖으로 새어 나오는 쓰레기 같은 욕망을 억누르느라 힘들었다.

온전히 나만을 향해 주는 그 미소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그 웃음을 보존시키고 싶었다. 그랬던 만큼 지극정성으로 율리아에게 사랑을 속삭였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끝을 흐렸다. 역시. 그래도 아직은 최소한의 신사적인 행동은 남겨 두는 게 좋겠지.

율리아는 내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녀도 나와 함께 과거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지만, 나보다 먼저 기억이 떠올랐거나 어쩌면 처음부터 전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 또다시 그녀를 잃는 비극이 반복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니, 추적만 하고, 위험에 빠진다면 지켜라. 그리고…… 그저 행적만 보고하도록.”

“네. 각하.”

“머리카락 한 올도 다치지 않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지켜라.”

언제든 다시 보려면 율리아의 위치를 알아야 하니까.

“그녀의 주변에 가족을 제외한 남자가 접근하면 죽여라.”

“네.”

말을 마치고, 내가 내린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움직이는 부하의 모습을 확인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하늘이 맑아서 심장이 더 아렸다.

그때 했던, 다음 생이 존재한다면 그녀를 사랑하겠다는 그 말은 이루어졌다.

가장 행복하던 순간에, 가장 깊은 절망 속으로 떨어졌다.

내가 회귀한 건 기회였으나, 축복이 아닌 저주였다.

그녀가 느꼈을 감정을 조금이라도 내가 느끼게 만든 저주였다.

“……후회합니다.”

좀 더 당신에게 자유를 주지 말걸.

방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올 수 없도록 구속할걸.

나 외의 사람은 볼 수 없도록 꼭꼭 숨겼어야 했는데.

당신이 가진 그 미소가 너무나도 눈부셔서.

“어리석은 선택을 했습니다.”

당신을 완벽하게 가두어야만 했는데.

새장 속에서 살아도, 새장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했는데.

전부 내 불찰이었다.

다시 그녀를 손에 넣으면 이렇게 허무하게 놓아주지 않으리라.

“잡히면 이제 놓을 생각이 없으니…… 최선을 다해 제게서 도망치세요, 율리아.”

저는 최선을 다해 당신을 다시 손에 넣을 테니까.

* * *

하루하루 죽어 가지만, 그래도 율리아에 대한 말을 듣는 것이 유일한 삶의 낙이었다.

당연하게도 율리아의 행선지가 어디인지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으리라 생각했다.

“각하…….”

“그래. 율리아는 어디로 가고 있지?”

“그것이…… 추격하던 기사들이…… 주검으로 발견되었습니다.”

“…….”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정예병으로 보냈던 걸로 기억하는데, 죽었다고?”

“예.”

율리아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포크와 나이프 그 이상으로 무거운 건 들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인데 어찌 검을 들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녀의 부친이 뒤를 봐준다는 건데.

정예병 두 명이 주검으로 발견될 정도면…… 꽤 여럿이 붙은 모양이었다.

그럼 적어도 율리아의 안전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그거면 충분했다.

사랑하는 여자의 안전히 확보되었으니까. 적어도 어딘가에서 위험에 처했을지 몰라 불안해할 걱정은 덜어 낸 셈이니까.

그렇다고 생각해야만 했다.

“……다치지는 않겠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으니까.

주먹을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조금의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장이 통째로 뜯겨 나간 듯한 고통에 파묻혀서.

율리아가 나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떠났다는 사실이 다시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황녀님의 소재지를 파악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녀가 멀쩡하게 잘 사는지 직접 듣지 않으면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내가 이기적이라는 것을 안다.

“최대한 빠르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찾아와, 반드시.”

당신이 곁에 없으면 정말 미쳐 버릴 것만 같아서.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빠르게 다시 옆에 두고 싶었다.

“네, 각하.”

고개를 숙여 보인 부하가 밖으로 나갔다.

이제 방에 혼자 남았으니, 몸을 의자에 편히 기대었다.

황제가 직접 숨기는 거니, 결코 그녀가 어디에서 지내는지 찾는 건 쉽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어디에서 지내는지 알아내기 위한 제일 간단한 방법은 황제를 찾아가는 거지만.

과연 율리아의 부친인 황제가 나를 만나 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후…….”

또다시 두통이 일렁였다.

화가에게 그녀 몰래 부탁했던 율리아의 초상화를 조심히 꺼냈다.

그 누구보다도 웃는 얼굴이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자.

우는 얼굴이 예쁘지 않다는 건 아니었지만, 우는 모습을 보면 심장이 아렸다.

사랑하는 여자를 울리고 싶지 않았다. 늘 웃게만 해 주고 싶었는데……. 모든 게 어그러졌다.

헛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율리아.”

후회됩니다. 당신을 좀 더 완벽하게 내 품에 가두었어야 했다는 후회감이 밀려듭니다.

당신이 없는 삶은 당신을 만난 그 순간부터 생각한 적이 없는데.

율리아, 당신이 미치도록 보고 싶습니다.

* * *

사람이 점점 미쳐 간다는 게 무엇인지 전생보다 처절하게 깨닫는 중이었다.

전생에는 그녀의 몸이라도 곁에 두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녀가 살아 있는데도 볼 수조차 없었으니까.

자존심 따위는 전부 내다 버린 지 오래였기에, 황제에게 알현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큭!”

전생에 보았던 율리아는 망령이 맞았나 보다.

지금은 내게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점점 비정상적인 역겹고 지저분한 욕망이 나를 집어삼켰다.

다시 그녀를 만나는 순간, 그녀를 내 곁에 묶어 두고 싶다고.

다시는 나를 떠나지 못하도록 꽁꽁 묶어 가둬 두고 싶다는 추악한 욕망이 조금씩 올라왔다.

손에 힘이 실리자 쥐고 있던 술잔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파편에 긁힌 건지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대충 지혈만 하고 있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부하가 들어왔다.

“찾았나.”

아닐 걸 알면서도 옅은 희망을 품고 물었지만,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보아 듣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이번에도 못 찾았다는 보고일 테니까.

“각하……. 죄송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마음먹고 숨겼다면 찾는 게 더 이상하겠지.”

“죄송합니다…….”

“아마 황실 소유여도, 황실 소유로 나오지 않는 곳에 있을 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황실 소유의 별장들을 죄다 뒤져 봤지만,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황실 소유이되, 황실의 명의로 소유하지 않은 곳에 율리아를 보냈을 거다.

이제 그걸 찾아내는 것이 관건인데.

“그곳을 알아내라.”

“네.”

생각 이상으로 너무 잘 숨었다.

꼭꼭 숨어서 머리카락 한 올조차 내비치지 않는 그녀가 야속하기만 했다.

집무실에서 나와 그녀의 흔적을 제일 잘 느낄 수 있는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일하게 저택에서 그녀의 체취가 짙게 배어 있는 곳.

상큼하면서 달콤한 그녀의 향기는 이제 아주 옅게 남아 있었다.

“다시 보면…… 그때는 절대 안 놔줄 겁니다.”

그러니 잡히지 마요. 다시는 당신을 놓아줄 생각 없으니까.

저는 이기적인 사랑밖에 할 줄 모릅니다.

이번에는 순순히 놓아주었지만, 두 번은 놓아줄 생각 없으니 열심히 숨어요.

내가 미쳐 버려서 죽을 때까지…… 나한테 잡히지 마요, 율리아.

“당신을 사랑합니다.”

목을 태우던 갈증이, 이제는 온몸으로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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