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정신이 없었다.
계속 흘러넘치는 눈물을 갈무리하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손등으로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을 닦고, 다시 유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혼이나 내 거처에 관한 건 아빠가 알아서 다 해 줄 테니까.
“…….”
다시 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조금 시끄러웠다.
“유모, 무슨 일 있어?”
“황녀님……. 그게…….”
“이게 다 뭐야?”
궁 안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는 상자들이 가득했다.
차마 뜯어서 내용물을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누가 보냈는지 알려 주지 않았지만, 왠지 누가 보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누가 보낸 거야?”
“지크베르트 공작 각하께서…… 보내셨습니다.”
“그렇구나.”
내 환심을 사기 위해서일까.
내 환심을 사기 위한 체스터의 방법은 돈을 지불하고, 사치품을 내게 안겨 주는 건지.
그는 매번 물질적인 것으로 떠난 내 마음을 붙잡으려고 했다.
“……결국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멩이일 뿐인데.”
비소가 입가에 실렸다.
“예쁘고 값비싼 돌은…… 내게 필요 없는 건데.”
단지 내가 체스터에게 바랐던 건.
온전한 애정이었다. 내가 그를 사랑했듯, 그도 나를 사랑해 주길 바랐었다.
하지만 그건 전전생부터 이번 생까지 내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나 따위가 감히 가질 수도, 넘볼 수도 없었던 거였다. 체스터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지지 않는 남자였다.
“돌려보내, 유모. 아무 말도 나오지 않도록, 단 하나도 남김없이…….”
“네.”
“그리고…… 아니야. 그냥 그가 보낸 것들만 전부 도로 돌려보내. 다시는 이런 것들을 보내지 말라는 말도 덧붙여서.”
“그리하겠습니다, 황녀님.”
그의 선물 공세가 부담스러워서 돌려보내는 게 아니었다.
이 물건들을 곁에 둔다면. 볼 때마다 체스터가 생각날 것만 같아서.
그럼 흔들릴 테니까.
하지만 나는 흔들려서는 안 됐다.
“…….”
조심스럽게 배 부근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아직은 조금도 나오지 않았지만, 이 안에는 내가 사랑하는 이의 아이가 존재했다.
나는 이 소중한 생명을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지켜야만 한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아이를 만드는 것도 거부했으니까.
“유모, 나 먼저 들어갈게.”
“네. 황녀님.”
* * *
다음 날 아침이었다.
배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를 위해 아침도 제대로 먹었다.
곧 황성을 떠날 테니, 정원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궁 밖으로 나갔다.
“…….”
밖으로 나온 순간, 후회했다.
창문으로 먼저 확인을 해야 했는데, 내 불찰이었다.
나는 어느새 나타난 체스터에게 물었다.
“왜 왔어요.”
“당신이……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
체스터는 갑자기 두 무릎을 꿇었다.
“율리아,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돌아와 주세요.”
쿵- 쿵-.
심장이 뛰는 소리가 이토록 커다랬던가.
꼭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당신이…… 곁에 없으면 죽을 것만 같습니다.”
“……거짓말.”
“당신이 없는 삶은…… 지옥 같습니다.”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내게는 이제 지켜야 할 존재가 있었다. 만약 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체스터가 알게 된다면?
그렇게 아이를 끝까지 원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어떻게 나올지 조금도 예상되지 않았다.
“그럼 지옥에서 살아요.”
“…….”
“제가 당신과 함께 있던 시간보다, 당신과 함께하지 않은 순간이 더 기니까…….”
충격을 받은 듯 보이는 체스터의 표정에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다시 당신은 일상을 찾아가겠죠.”
“율리아…….”
“당신이 이혼 후에, 다른 여자를 만나든 만나지 않든 신경 쓰지 않을 테니…… 이혼하면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요.”
거짓말이었다.
사실 체스터가 나와 이혼을 한 후에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을 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앞으로…… 우리 다시는 볼 일이 없으면 좋겠어요.”
“…….”
“전에 했던 약속은 유효해요. 이혼해도 저는 재혼은 하지 않을 거니까.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여생을…….”
왜.
왜 이 이상 입술이 떨어지지를 않는 건지.
“홀로 지낼 테니까…….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라면 더는 걱정할 필요 없어요. 당신과 이혼한 후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테니.”
“율리아, 제 옆에 있어 주겠다는…… 선택지는 없는 겁니까?”
“…….”
“당신이 원한다면 뭐든 해드리겠습니다. 단지 당신이 제 옆에만 있어 주신다면…… 뭐든 해드리겠습니다.”
절박한 외침.
하지만 이 절박함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나는 구분할 수가 없었다.
이미 내 머릿속은 온전히 그를 믿고 싶다는 필터가 있어서.
체스터와 관련해서는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당신이 짖으라면 짖고, 기라면 기고, 핥으라면 핥는 개새끼처럼 굴겠습니다. 당신이 제 옆에만 있어 주신다면…….”
“제가 당신한테 원하는 건 이별이에요.”
“…….”
“그리고 앞으로 당신을 보지 않는 거예요.”
모질게 말하고 돌아서려고 했다.
그런데 체스터에게서 쉽게 등을 돌릴 수가 없었다.
체스터는 소리 없이 두 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으니까.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당장에라도 울고 있는 체스터를 꽉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울고 있는 체스터를 바라보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감정을 배제하고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억누르며 말을 내뱉었다.
“더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율리아.”
“그러니…… 매달려도 소용없어요. 이미 제 마음은 당신한테서 떠났으니까요.”
전전생과 상황은 바뀌었다.
그때는 내가 체스터에게 매달렸는데, 이번 생은 이유가 어찌 되었든 체스터가 나한테 매달리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체스터에 의해 모든 걸 빼앗겼으나, 지금 나는 체스터에게서 그 무엇도 빼앗지 않았다.
아니, 빼앗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는다면…… 나도 함께 무너질 것만 같아서.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아요. 저는 저의 삶을 살 테니까요.”
그대로 등을 돌렸다.
산책하려 했지만, 그럴 기분이 전혀 나질 않았다.
이대로 여기에 더 머물다가는 체스터에게 넘어갈 것만 같아서.
더는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걷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더니 궁 안으로 들어선 이후로 뛰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방 앞까지 가서야, 고장 난 듯 달리던 다리가 멈췄다.
그제야 숨을 쉴 수가 있었다.
무리가 될 정도로 뛰었던 건지. 폐가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다.
쿵쿵거리며 뛰는 심장은 달려서인지 아니면 체스터를 봐서인지.
구별이 가질 않았다.
“황녀님?”
“……유모.”
“무슨 식은땀이……. 당장 목욕물을 준비할게요!”
다급하게 유모의 팔을 붙잡았다.
“가지 마…….”
“황녀님?”
“나만, 나만…… 혼자 두고 가지 마……. 옆에 있어 줘…….”
이 날뛰는 심장을 조금이라도 빨리 진정시켜야만 했다.
당장에라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으니까.
* * *
“황녀님,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응.”
준비가 끝났다는 말에, 편안하게 앉아 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체스터는 그날을 마지막으로 더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상처받은 듯한 그의 표정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며 나를 괴롭혔다.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머릿속에서 체스터를 떨쳐 내기 위해 노력했다.
“……근 일 년간은…… 황성으로 돌아올 일은 없겠지.”
“네.”
“조금은…… 보고 싶을 것 같아.”
체스터가 분명히 보고 싶을 거야.
하지만 그곳에서 체스터를 보지 않으며 그에 대한 애정을 떨구어야만 한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었다.
심장이 뜯겨 나가는 고통과 다름없겠지만, 견뎌야만 했다.
손으로 홀쭉한 배를 어루만졌다.
이 안에는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가 존재했다. 이 소중한 생명을 그에게서 지키기 위해 그를 향한 내 마음을 버려야만 했다.
조용히 홀로 아이를 키울 생각이니까.
“율리아.”
“오빠…….”
아빠는 오늘 대전 회의가 있어, 배웅해 주지는 못했다.
충분히 이해했다.
그 회의에는 체스터도 참석할 테니, 그걸 취소한다면 내가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그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오빠와 세실의 배웅을 받는 것으로도 충분히 안정되었다.
떠나기 전에 오빠를 끌어안았다.
따뜻한 온기 어린 체온은 오빠가 살아 있음을 나타냈다.
전전생처럼 온기 하나 없이 차갑고 싸늘한 주검이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율리아, 가서 몸조리 잘하고.”
“응.”
“필요한 게 있으면 꼭 말을 하고.”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래. 조심해라.”
“응.”
다음으로 옆에 있는 세실을 끌어안았다.
“나는 항상 네 편이야, 율리아.”
“응……. 고마워.”
“아기가 태어나면…… 돌아올 거지?”
“음……. 최대한 수도로 돌아오지 않으려고.”
“……그래. 지크베르트 공작님 때문이지?”
“그렇지…….”
체스터에게도 그리 말했으니까.
조용한 곳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나는 내 삶을 살아갈 거니, 당신도 당신의 삶을 살아가라고.
그리 말했다.
최대한 수도로, 황성으로 오지 않는 게 나와 아이를 위해서도 좋겠지.
“그럼, 내가 나중에 네가 있는 곳으로 갈게.”
“…….”
예상하지 못한 말.
하지만 심장부터 따뜻해지는 말이었다.
그랬기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꽃처럼 번져 가는 거겠지.
“고마워.”
이제는 정말 출발해야만 했기에 마지막으로 인사를 한 후에,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출발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에 눈을 감았다.
“……안녕.”
이제 정말 안녕이었다.
내가 수도로 돌아오지 않는 이상, 체스터를 볼 일은 없을 테니까.
있는 듯, 없는 듯.
숨을 쉬는 듯, 쉬지 않는 듯.
고요하고 평화롭게 사람이 별로 없는 곳에서 평온함 속에 녹아들어 살고 싶었다.
“사랑했어요.”
체스터.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먼지가 눈에 들어간 건지.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