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허전함은 뒤로하고, 아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예정보다 하루는 더 늦게 돌아온 거니까.
“아빠.”
“그래, 율리아. 마음을 정했니?”
“이혼 소송…… 준비해 줘.”
“……그래. 지크베르트 공이 결국 서류에 도장을 찍어 주지는 않았구나.”
사실 그가 잠든 틈을 타 집무실에서 도장을 훔쳐 찍을 수도 있긴 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아마도 도덕심 때문이겠지. 허락 없이 도장을 훔치는 건 범죄니까.
“아빠, 그리고…… 이제 조용한 곳으로 내려갈래.”
“네가 지내기 좋을 곳에 편히 있을 수 있도록 준비를 끝내 놨단다.”
“……당장은 말고.”
조금은 수도에 있고 싶었다.
수도에서 내가 완전히 떠나면 우연이라도 체스터를 볼 수 없을 테니까.
결국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내가 그를 사랑해 왔던 시간은 결코 한 번에 사라져 없던 것이 될 수는 없었으니까.
그를 사랑하는 나의 운명은 가혹하리만치 암담했으나, 그 시간이 무의미한 건 아니었다.
결국 체스터의 존재는 지금의 나를 살아 있게 했으니까.
“조만간…… 한 일주일 후에 떠날게, 아빠.”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렴. 네가 떠나고 싶을 때 떠나고, 떠나기 싫다면 떠나지 않아도 된단다.”
“……응, 이제 좀 쉴래.”
“그래.”
“그, 돌아가기 전에…….”
총총걸음으로 다가가 아빠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내 아빠는 내 등을 토닥거리며 다독여 주었다.
“힘든 게 있다면 말하고.”
“응…….”
“우리 딸이 원하는 건 다 해 줄 테니까.”
“내가 원하는 건…… 그냥 아빠랑 오빠가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해.”
불안함은 느리지만 천천히 사그라들며 평정심을 찾아갔다.
“둘 다 내 곁을 떠나지만…… 않으면 난 그걸로 충분히 만족하니까.”
그러니, 이번에는 죽으면 안 돼. 내 가족들이 이번 생에선 죽지 않도록 할 테니까.
이 따뜻함을 잃고 싶지 않았다.
이 안락함을, 이 소중함을 두 번 다시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이만 가서 쉴게.”
“그래. 편히 쉬렴. 이혼은…… 알아서 다 처리해 줄 테니, 율리아 너는 편히 쉬기만 하면 된단다.”
“응!”
아빠는 바쁘다는 걸 알았기에 방 밖으로 나와 다시 내가 지내는 궁으로 향했다.
“황녀님.”
그곳에서는 유모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유모!”
“목욕물 준비해 뒀어요. 바로 씻으실 건가요?”
“응!”
자연스럽게 바로 욕실로 향했다.
“아, 유모……. 나 혼자 씻을 수 있어.”
“네, 황녀님. 수건은 여기에 있고, 옷만 바깥에 가져다 두겠습니다.”
“응, 고마워.”
유모는 금방 나갔다. 입고 있던 드레스를 벗어 두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욕조에 몸을 천천히 담갔다.
따뜻한 수온이 온몸을 감쌌다. 머리를 뒤로 젖히며 머리카락까지 전부 욕조 속 물에 잠기게 움직였다.
“하아…….”
하루아침에 사라질 감정이 아니었다.
생을 거듭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정해진 운명처럼 사랑이라는 감정에 휩쓸렸다. 이 감정은 며칠 사이에 지워질 크기가 아니었다.
그를 사랑한다는 감정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이미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다만 나와는 다르게 체스터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심장을 아프게 했다.
그 사랑한다는 말이 당장 벗어나려는 나를 붙잡는 올가미로 느껴졌으니까.
“……육체적인 관계로 시작했으니까.”
지금도 온몸에 붉은 열꽃이 수를 놓은 듯 가득 피어 있었다.
어쩌면 이건 당연한 결말이었다.
사랑받는다고 생각했다. 그의 조심스러운 행동이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있어 절대 깨져서는 안 될 희귀하고 비싼 소모품일 뿐이었다.
“하, 하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며 수면 위에 파동을 일으켰다.
생각보다 나는 체스터를 많이 사랑하고 있어서.
착각이었지만 그가 주는 애정이 너무 달아서.
생각보다 더 아팠다.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눈물샘을 삼켰는지, 두 눈에서 눈물이 마르질 못했다.
“울지 마……. 나는 잘못한 거 없잖아…….”
* * *
씻고 나와 놓여 있는 슈미즈로 갈아입고, 거울로 가까이 다가갔다.
당연한 거지만,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그나마 붓지는 않아 울었던 게 선명하게 표 나지는 않았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탈탈 털고, 어깨에 걸친 채 욕실 밖으로 나와 방으로 향했다.
“황녀님, 식사는 방에서 하실 거죠?”
“응.”
방으로 들어오자, 음식 냄새가 확 느껴졌다.
그런데 왜 나는 음식 냄새를 맡으면…….
“우욱!”
……구역질이 치미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내 몸의 반응에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황녀님?”
“우웩!”
“당장 황궁 의를 불러올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유모는 다급하게 방 밖으로 나갔다.
나 역시도 이 치미는 구역질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고 바깥바람을 쐬었다.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음식 냄새가 옅어지자, 좀 나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메슥거렸던 속은 확실히 괜찮아졌다.
이내 사람들의 발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황녀님!”
“……아, 유모. 나 이제 괜찮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진찰을 받아 보세요.”
“……응.”
창문은 열어 둔 상태로, 의자에 앉아 팔목을 황궁 의에게 내밀었다.
황궁 의는 조심스럽게 맥을 짚었다.
“황녀 전하, 혹시…… 월경이 멈추지 않았습니까?”
“어…….”
예정일에 하지 않아, 그저 늦어지나 싶었다.
순간 황궁 의가 왜 그걸 묻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내가 임신할 리가 없잖아. 체스터가 피임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예정일보다 늦어지기는 하지만, 임신은 아니야. 그냥 몸이 안 좋아져서 그런 걸 거야.”
“하지만…… 황녀 전하, 임신이…… 맞습니다.”
“…….”
“황녀 전하께서 부군과 이혼하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지면…… 이혼은 힘드시겠죠.”
당황스러웠다.
내가 왜? 내가 왜 아이를 가진 거지?
의문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곰곰이 기억을 되살렸다.
그와 잠자리를 가졌을 때, 그리고 그가 피임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가에 대해.
“사실이 알려지길 원치 않으신다면 이 방 안에 있는 사람들과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만이 입을 다물면 될 겁니다.”
“그래……. 일단, 일단은…… 아빠한테 먼저 알려야 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방 밖으로 향했다.
내가 갑작스럽게 움직이자, 유모는 황급히 내게 숄을 둘러 주었다.
“유모…….”
“괜찮아요, 황녀님. 다 방법이 있을 거예요.”
언제나처럼 내게 힘을 주는 유모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휘청이는 발걸음으로 아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딱 한 번. 체스터가 딱 한 번 피임을 안 한 적이 있었다.
고작 한 번이었다.
아빠의 집무실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아빠…….”
“율리아? 무슨 일이라도 있니?”
“나…… 어떡해?”
아빠를 보자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런 내 움직임에 놀랐는지. 아빠는 단걸음에 내게 다가와 끌어안아 주었다.
그러자 안도감이 들며 긴장이 탁 풀렸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흐어어엉! 아빠……. 끅, 끄윽……. 나 어쩌면 좋아…….”
궁금한 게 많겠지만, 아빠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내 등을 토닥여 주며 내가 먼저 말을 제대로 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끅, 끄윽……. 나…… 나 아이를 가졌대……. 아빠…….”
“괜찮다. 전부 괜찮을 거란다, 율리아.”
“흐윽……. 나, 나…… 체스터랑…… 이혼할…… 거야.”
반드시 이혼해야 했다. 아이를 가졌으니 더더욱 이혼해야만 했다.
체스터는 아이를 가지길 싫어했으니까.
그렇기에 나의 임신 사실은 더더욱 그에게만큼은 숨겨야 했다.
“그래. 율리아……. 아빠가 다 해 줄게.”
“끅……. 절대로, 절대로 체스터한테는…… 알리면 안 돼!”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 제대로 숨 좀 쉬어 보렴.”
등을 토닥여 주는 아빠의 손길에 어린아이가 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더 서럽게 울었다. 투정을 부리듯.
옛날과는 다르게 어린애처럼 범람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펑펑 울었다.
“율리아, 네가 원한다면 바로 떠날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단다.”
“끅, 끄윽……. 흐윽…….”
“떠나더라도 네 이혼 건은 이 아빠가 알아서 잘 처리해 주마.”
그만 울어야 하는데.
충분히 울었다고 생각한 머리와는 다르게 몸은 아직인지 한번 터진 울음은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아이를 낳을 생각이라면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조용한 곳에서 머물고, 그게 아니라면 아직 늦지 않았을 테니…….”
“……낳을 거야.”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였다.
지금은 미움과 배신감이 더 크지만 미련스럽게도 그를 향한 사랑은 남아 있었다.
사랑 없이 생긴 아이가 아니었다.
아빠 없이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내게는 아이에게 아빠 없는 아이라는 꼬리표가 느껴지지 않도록 키워 낼 권력이 존재했다.
황녀의 자식.
결국에는 황족이니까. 황족으로 태어나면 죽는 그 순간까지 황족의 대우를 받으니까.
“나랑…… 태어날 아이를 지켜 줘, 아빠…….”
“우리 딸. 아무 걱정하지 말렴. 모든 건 이 아빠가 다 감당할 테니, 너는 그저 웃기만 하렴.”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나를 지켜 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게 안도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아빠가 아직은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까.
이제 더는 가족이 죽을 거라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아직 황실은 건재하니까.
“당장 떠나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니, 조만간 떠나는 걸로 하자꾸나.”
“응…….”
“따뜻하고 경치 좋은 곳으로, 전에 말해 둔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준비시켜 두마.”
고개를 끄덕였다.
“이혼은…… 소송으로 들어가면 쉽진 않을 거란다. 서로에게 유책 사유가 없으니.”
“…….”
“금방 끝나지는 않을 거란다. 일 년이 될 수도 있고, 오 년이 될 수도 있겠지.”
“괜찮아. 그냥…… 체스터랑…… 떨어져 지내는 거면 충분해!”
“그래.”
나는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그에게서 숨기고 지켜야만 했다.
이기적인 나를 위해.
사랑하는 체스터를 보지 않아도 나를 살아갈 수 있게 해 줄, 나의 버팀목이 되어 줄 반드시 사랑스러울 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