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율리아.”
귓가에 달콤하게 울려 퍼지는 나직한 음성.
그 목소리에 쿵쿵거리며 거센 반응을 보이는 바보 같을 정도로 솔직하게 뛰는 심장이 원망스러웠다.
심장이 멈추던 그 순간까지도 사랑했던 끔찍한 저주와도 같은 운명이라는 굴레를, 이번에는 벗어나고 싶었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그를 사랑하는 이 심장을 멈추고 싶었다.
“사랑합니다.”
“…….”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합니다, 율리아.”
체스터는 내 이름을 달콤하게 속삭여 부르며, 사랑한다는 독과 같은 말을 내뱉었다.
나는 왜…….
대체 왜…….
그의 말에 굳은 다짐이 아주 쉽게 흔들리는 걸까.
전전생도 사랑 때문에 죽었으면서. 죽어서도, 그리고 살아서도 본능적으로 애정을 갈구하는 내가 싫었다.
“당신이…… 제 옆에 있어 주길 원합니다, 율리아.”
“…….”
“어릴 때 돌아오면 옆에 있어 주겠다고 했던 약속……. 저버리지 말아 주세요.”
너무 애절한 눈빛.
간절함이 뚝뚝 묻어나는 눈동자.
정말 나를 원한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지기는 했다. 단지, 마음이 아니라 내 육체를 원할 뿐이지만.
이번을 마지막으로, 더는 보지 않을 거야.
오늘을 기점으로 미련도, 감정도 전부 털어 내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거야.
그렇기에 저 애원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율리아……. 저는 당신이 없으면 안 됩니다, 저를 버리지 마세요.”
“……버리지 않아요.”
단지 떠날 뿐.
남은 삶은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고, 비참한 감정도 느끼지 않은 채, 평온하고 조용하게 지내고 싶으니까.
무엇보다도 이번 생은 죽음이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전에도 죽을 뻔했으니까. 더는 생명의 위협을 받고 싶지 않았다.
팔을 뻗어 그를 가까이 잡아당겼다.
“…….”
체스터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뜨거운 호흡이 피부 위로 고스란히 닿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고는 그대로 내 손을 온전히 덮어 버리는 그의 손.
다리 사이로 얽혀 들어오는 그의 무릎.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머릿속을 뿌옇게 흐리는 무척이나 짜릿하면서도 멍한 감각.
눈시울에 소량의 액체가 고였다.
“읏……!”
달뜬 숨이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몸이 파들거리며 떨리고 손에는 저절로 힘이 실렸다.
“율리아,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흐으……. 체스터…….”
“사랑합니다.”
“아, 체스터…….”
“사랑해요, 율리아.”
귓가에 달콤하게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와 머릿속으로 폭풍처럼 밀려 들어오는 황홀함에 저절로 몸이 들썩였다.
선명하게 보였던 창문 밖의 달이 더는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눈앞이 뿌옜다.
내 발목을 그는 한 손에 거머쥐었다. 그러고는 내 발등에 입을 맞췄다.
천천히 안으로 밀려드는 그의 몸에 내 몸은 바르르 떨렸다.
“으흑!”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
정신 역시도 아득해져 갔다.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고, 더운 숨을 토해 냈다.
* * *
밝은 햇살이 눈꺼풀 위로 느껴지자마자, 바로 눈을 떴다.
내 몸을 꼭 끌어안고 있는 체스터의 팔을 손으로 살짝 밀자 풀렸다.
생각보다 훨씬 쉽게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손가락 끝으로 그의 뺨을 건드렸다.
굳게 감긴 두 눈에 조금의 균열도 나타나지 않았다.
깊이 잠든 사람처럼.
그가 깨지 않고 잠든 지금이 벗어나기 최적의 상황이었지만, 생각보다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체스터.”
그의 이름을 입 안에 머금고 속삭여 보았다.
앞으로는 더는 보지도, 만나지도, 그 이름을 부를 일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건 마지막이 될 테니. 혹여나 그를 떠난 후에 미련이 남아서 그를 보고 싶다는 감정이 나를 붙잡으면 안 되니까.
마지막이니까. 작별 인사 같은 거니까.
그렇게 변명하며 내 어리석고 미련이 뚝뚝 넘치는 행동을 스스로 정당화시켰다.
“사랑했어요.”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리는 허리가 통증을 호소했다.
곱게 의자에 걸쳐 놓은 드레스를 입고, 구두로 갈아 신고, 조용히 방 밖으로 나갔다.
저택 밖으로 나왔다.
그의 도장이 찍힌 서류는 없었지만, 황성으로 돌아가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마님!”
“……집사?”
뒤에서 집사가 다급히 달려오며 저택 밖으로 나가려는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마차를 내오겠습니다.”
“……응.”
집사가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저택 바깥으로 나가는 것에만 급급해 걸어서 황성으로 갈 뻔했다.
“금방 준비해 오겠습니다.”
“후원에 있을게.”
“예, 마님.”
발걸음을 후원 쪽으로 돌렸다.
부드러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쳤다. 풍향을 따라 흐트러졌다.
두 눈을 사르르 감고, 코끝을 스치는 향긋한 꽃향기에 취했다.
천천히 눈을 뜨며 저택 창문 쪽으로 무심코 시선을 옮겼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내가 갇혔던 방의 창문에 사람의 형체가 비쳤다 사라졌다.
“…….”
체스터일 리는 없었다. 그였다면 밖에 있는 나를 보고서 당장 달려 나왔을 테니까.
“마님.”
이내 뒤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체스터는 없었다.
“준비가 다 됐습니다.”
“……가죠.”
준비되었다는 마차에 탔다. 마차 창문 밖으로 보이는 지크베르트 공작저에서 차마 시선을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어김없이 미련이라는 감정이 내 고개를 돌렸으니까.
지크베르트 공작저가 점점 멀어져서 더는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고개를 원래대로 돌릴 수 있었다.
황성에 도착했다.
체스터가 나를 가둘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서도, 그런 가정에서도 벗어났는데.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모든 게 어색했다.
“…….”
무엇보다도 심장 부근이 허전했다.
마치 심장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 * *
아직도 침대에 그녀의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만 같단 착각이 일렁였다.
율리아가 누워 있던 자리를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쓸었다.
‘사랑했어요.’
그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율리아는 내가 그녀에게 선사한 그 악몽을 전부 알고도 날 사랑했던 건가 싶어서.
다시 돌아온 그녀를 놓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결국 놓아주었다.
“율리아…….”
그녀가 편하게 황성으로 돌아가도록 집사에게 말해, 마차를 준비해 주었다.
창밖으로 후원을 걷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게는 이제 그녀를 붙잡을 자격이 없어서.
단지 내게 주어진 건, 멀리 떨어진 채 그녀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이혼은…… 안 됩니다.”
붙잡을 자격은 없지만, 나는 이기적인 인간이라…… 결코 그녀가 바라는 이혼을 해 줄 생각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결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놓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이 내게 허락된 거지만.
다른 남자의 옆에서 햇살 같은 웃음을 짓는 율리아를 보고 싶지 않았다.
“…….”
순간 이쪽을 바라본 그녀의 행동에 다급히 몸을 숨겼다.
그녀가 저기서 나를 볼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는 걸 알면서도 숨었다.
잠시 후 다시 시선을 내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후원에서 보이지 않았다. 마차가 움직이는 걸 보니, 그 안에 있는 듯했다.
“율리아, 이번에는 당신이 제게서 도망칠 길을 열어 주었지만…… 두 번은 없습니다.”
전부 알면서 놓아주었다.
이곳에서 그녀가 떠나는 순간, 더는 그녀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놓아주었다.
그게 그녀의 행복이라면.
나는 이미 한 번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었으니, 이번에는 그녀가 행복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했다.
그녀가 나로 인해 전생에 불행했었으니, 이번에는 내가 불행해야만 했다.
율리아를 절망 속으로 밀어 넣었던 전적이 있는 나 따위가 그녀의 옆에서 행복할 자격 따위는 없었으니까.
“그러니…… 도망쳐요.”
나라는 사람에게서.
당신에게 절망을 안겨 주었던 내게서.
소중한 당신의 사람들을 죽였었던 내게서.
영영 떠나세요.
제가 당신이 그리워져서 당신을 찾아갈 것처럼 미쳐 버려도, 결코 제가 당신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하지만 돌아와 줘요.”
지금은 내게서 등을 돌리고 떠나가고 있지만.
혹시.
만약.
조금이라도 마음이 다시 돌아온다면. 제 곁으로 돌아와 주세요.
“제 마음이 변할 리는 없으니까. 죽고 나서도 저는 이 자리에서 당신을 기다릴 테니까…….”
마음이 변하면 언제든 돌아올 당신을 위해.
이곳에서 홀로 지낼 테니까.
언제라도 다시 마음이 제게로 돌아선다면 제 곁으로 돌아와요.
돌아오는 조건으로 무엇을 걸어도 됩니다.
내 심장을 원한다면 기꺼이 내어 드리고, 이 목을 원한다면 기꺼이 잘라 줄 테니까.
“……다시 돌아온 당신이 제게 개처럼 짖으라면 짖을 테니까.”
제발…… 저를 완전히 버리지 마요.
두 눈에서 뜨거운 액체가 고이다 흘러넘쳐 뺨을 타고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가 없는 일주일을 겪었기에, 그녀라는 존재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또다시 그녀가 없는 악몽 같을 기약 없는 나날이 이어질 걸 생각하니, 끔찍했다.
“벌받는 건가.”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었던 건 내게 기회가 아니라, 형벌이었던 건지.
아직도 몸에 율리아의 체온이 남아 있다는 착각이 들었으니까.
율리아를 만지고, 끌어안으면 불안한 내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어제 그렇게 넘어가면 안 됐는데.
그녀의 치명적인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 그녀가 더 오해할 걸 알면서도 넘어갔다.
이 모든 건 내가 한 행동에 대한 업보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내게서 등을 돌린 그녀의 모습을 뒤에서만 바라봐야 한다는 건 꽤 가혹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율리아…….”
사실 나는 그녀를 사랑해서는 안 됐는데. 내 주제에 그녀를 사랑하는 건 죄와 다름없는데.
나는 결국 해서는 안 되는 사랑을 했다.
그랬기에 사랑하는 율리아가 없는 삶은 이젠 지옥이 되었다.
나는 지금 지옥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