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지금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율리아.”
지독하게도 달았다.
그 말을 들은 귀를 녹여 버릴 만큼 무척이나 달콤했다.
전전생부터 듣고 싶었던 말을, 이제야 들었다.
“저는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
“그래서 당신과 이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시 전처럼 잘 지내요, 율리아…….”
그런데 왜 나는 이 말이 그리 기쁘게 느껴지지 않는 걸까.
알 수 없는 착잡함이 나를 삼켰다.
가장 듣고 싶었던 순간에 듣지 못했던 말이었기에 그런 걸까.
아니면 나는 체스터의 저 달콤한 말을 믿지 않고 있는 걸까.
“저를 믿지 않아도 됩니다. 단지…… 제 옆에만 있어 주세요.”
“제가 왜요?”
이렇게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어리석은 심장은 콩닥거리며 뛰고 있었다.
그나마 얼굴이 붉어지지 않는 것을 다행히 여겨야 할 정도로,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 감정이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저는 다시 황녀로 돌아갈 거예요.”
“율리아, 제가 더 잘해드리겠습니다!”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게 진심이라 해도…… 아무 소용 없어요.”
나는 날 사랑한다는 그의 말을 조금도 믿지 못하겠으니까.
지금조차도 저 사랑한다는 말이 정치적으로 아직 내가 필요해서 붙잡는 말로만 들렸다.
체스터는 내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언제든 나를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내 이용 가치는 거기까지인 거겠지.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으면 버려질 소모품.
“난 당신을 더는 믿지 못하겠으니까!”
그러니 아이도 가질 필요가 없다고 한 거겠지.
보통 사랑하면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 게 보편적인데, 아이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체스터는 내게 말했다.
매번 빠짐없이 피임하는 그의 행동에서, 나와의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율리아…….”
“당신 얼굴 보고 싶지 않아요.”
“……제가 어떻게 당신한테 더 애원하면 되겠습니까?”
천천히 고개를 돌려 체스터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당신이 원하는 건 전부 하겠습니다. 개처럼 짖으라면 짖고, 핥으라면 핥겠습니다.”
“…….”
“그러니 버리지 마세요.”
체스터는 두 무릎을 전부 바닥에 꿇었다.
그리고 내 허리를 팔로 단단히 휘감아 붙잡으며 세상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저는 당신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전부 하겠다고요?”
거짓말.
내가 지금 원하는 건 하나도 들어주지 않으면서.
내가 내뱉은 말 중에서 본인이 들어주고 싶은 것만 들어줄 거면서.
“네. 당신이 원하는 거는…….”
“이혼해 줘요.”
“…….”
“깔끔하게. 제가 가지고 온 서류에 도장만 찍어 줘요.”
“……그건.”
“어려운가요? 거짓말이 맞았네요. 내가 원하는 건 전부 해 주겠다고 한 말.”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으니, 실망할 건 없었다.
“결국 당신은 제가 원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게 제 입에서 나오길 원하는 거잖아요.”
“율리아…….”
“황성으로 돌려보내 줘요.”
“이혼만 철회한다면 보내드리겠습니다.”
결국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은 단 한 입도 먹지 않았다.
달콤한 디저트의 향은 내게 먹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오히려 역함이 몰아쳤다.
“혼자 있고 싶어요.”
“……네. 편히 쉬세요.”
이번에는 순순히 말을 들으며 밖으로 나갔다.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또다시 바깥에서 문을 잠근 듯했다.
의자에 머리를 다시 기대고 눈을 감았다.
혼란스러웠다.
이런 전개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해서. 그가 나를 방 안에 가둘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혼을 순순히 해 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아예 방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할 줄은…….
“하아…….”
살짝 눈을 뜨고 테이블을 보자,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잔뜩 있었다.
분명 내가 좋아하는 것들인데, 왜인지 바라만 봐도 입 안에 역함이 가득했다.
“우욱……!”
속이 메스꺼웠다.
음식 때문인 건가 싶어,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향했다.
있는 힘껏 창문을 열려고 했지만, 열리지 않았다.
결국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은 채, 손바닥으로 입을 덮고 헛구역질을 했다.
하지만 더부룩한 속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하아, 하…….”
바깥으로 나갈 방법이 무엇도 없었기에, 황성으로 내 소식을 전달할 수도 없었다.
바닥에 앉아, 화사한 햇살이 드리워지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게 내리쬐는 그 햇빛이 너무나도 찬란하고 뜨거워, 도로 눈을 감았다.
“……또다시.”
새장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누군가 꺼내 주기를, 혹은 누군가 잠긴 새장의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기분.
지독하게 익숙한 이 기분을 떨쳐 내고 싶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이 커다랗고 안락한 감옥 속에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간단한 방법.
하지만 그 방법을 알면서도 실행하고 싶지는 않았다.
체스터는 나를 순순히 보내 줄 생각이 없을 테니, 말로만 이혼을 철회하겠다 하고 황성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
그러니 그를 안심시킨 후에, 기회를 봐서 조용히 돌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혼을 철회하겠다는 거짓된 말로 현혹해서, 그에게 내가 한 말이 진심이라고 믿을 만한 행동을 하면 된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동안 고민은 매우 길어졌다.
밝은 해가 드리워졌던 하늘이 붉은색의 노을빛으로 바뀔 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창가 문턱에 머리를 살짝 기대고 다시 사색에 잠겼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율리아…….”
이어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 가까워지는 발소리.
무릎 아래로 파고드는 팔과 내 허리를 받치는 손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체스터는 그대로 나를 들어 안았다.
“바닥은 차갑습니다.”
“…….”
“저녁 가지고 왔으니…… 먹어요.”
또다시 그의 품에 안긴 채, 의자에 앉혀졌다.
그는 자연스럽게 테이블을 치우고, 그 위에 가지고 온 음식을 놓았다.
“당신이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한 입도 안 먹었잖아요. 그러니 저녁은 먹어요.”
“…….”
“불편한 부분이 있으면 말해 주세요. 필요한 것도 말하고요.”
“창문이 안 열리는 게 불편해요.”
“……그럼 제가 안에 있을 때는 열어드리겠습니다.”
“됐어요.”
딱히 배가 고픈 건 아니었지만, 줄 때 먹기로 했다.
아까보다는 속이 괜찮아져서 먹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고기를 한 입에 먹기 좋게 썰어 입 안에 쏙 넣었다.
다행히 역겨움이 느껴지거나, 헛구역질이 올라오지는 않았다.
조금 더 먹고, 결국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체스터.”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심호흡 후, 다물었던 입술을 다시 열었다.
“제가 원하는 건 해 주겠다고 했죠.”
“……네.”
“가까이 와요.”
이런 말은 또 잘 들었다. 그에게 손해가 없는 것만 골라서.
체스터는 가까이 오라는 말에 정말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손을 뻗어 그의 옷깃을 붙잡고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잡아당겼다.
“……율리아?”
그대로 눈을 감으며 그의 옷깃을 마저 잡아당겨 그의 입술 위에 내 입술을 포개었다.
체스터는 이런 내 행동을 예상치 못했는지 흠칫하는 게 맞닿은 입술을 통해 느껴졌다.
입술을 벌리자 뜨거운 숨이 점막으로 엉겨 붙었다.
익숙한 만큼 달콤한 숨결. 열린 입술 틈새로 파고들어 오는 그의 혀.
타액을 내 안으로 밀어 넣으며 침범한 그의 혀가 얽혀 들어왔다.
진득하게 맞닿는 살덩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의 옷깃을 잡던 손에서 힘을 풀고 목에 팔을 둘렀다.
츕 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입술이 떨어졌다.
“하아…….”
“율리아, 왜…… 이렇게 행동합니까.”
“……좋았잖아요.”
“저는…… 당신이 원치 않으면 안 합니다.”
“당신은 나랑 이러는 거 좋아하잖아요.”
그가 말하는 그 사랑이 아주 거짓은 아니라면 그건 내 몸에 대한 애정일 것이다.
나와 몸을 섞는 행위를 했던 기억을 되살려 보면 그는 싫어한 적이 없었으니까.
“율리아…….”
“싫어요?”
“…….”
“예전부터 좋아했잖아요. 내 몸.”
그는 나와 잠자리를 갖는 것을 좋아했다는 걸 알았다.
“내가 원하는 건 해 준다면서요.”
“율리아…….”
“이건 당신도 원하는 거잖아요.”
“이런…… 식으로는 원하지 않습니다.”
“거짓말.”
뻔한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랬기에 그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주어 가까이 끌어당겼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인 거 알아요.”
“…….”
“그게 아니면 이젠 제 몸도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 그럼 거짓말은 아니네요.”
“율리아,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렇다고 해 줄게요.”
“진심입니다! 저는…… 당신이 없으면 안 된단 말입니다…….”
누가 보면 진심인 줄 알겠네.
정치적으로 내가 필요한 거면서. 나를 사랑한 적 없으면서.
바보 같은 나를 붙잡기 위한 애절함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겠죠.”
그의 입술 위로 내 입술을 포개었다.
원치 않는다면서 입술을 겹치자 능숙하게 틈새로 혀를 밀어 넣었다.
타액과 함께 안으로 파고든 살덩이가 안에 있는 혀를 옭아맸다.
뜨거운 숨결이 좁은 틈 사이로 오가며 누구의 호흡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뒤엉켰다.
“하아…… 흡!”
잠시 떨어졌던 입술은 내가 공기를 마시자마자 다시 맞물렸다.
체스터의 목을 휘감고 있는 팔에는 저절로 힘이 실렸다.
그의 손이 내 등 뒤로 향한 채 허리를 감싸고 무릎 아래를 팔로 받치며 나를 안아 들었다.
움직이면서도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입술.
내가 내뱉는 숨 조각 하나조차도 놓치지 않겠다는 집요함이 혀끝에서 절절하게 느껴졌다.
이내 등은 푹신한 침대에 닿았다.
새하얗고 부드러운 시트 위로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사르르 쏟아졌다.
“하아, 하…….”
한참이나 닿아 있던 입술은 이제야 떨어졌다.
맑고 시원한 공기가 한 번에 폐 속으로 밀려 들어오면서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열망이 고스란히 녹아난 핏빛 눈동자와 시선이 뜨겁게 얽혔다.
그의 머리가 목덜미에 가까워지더니 그 위에 말캉한 입술이 닿았다.
“흣……!”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촉에 뜨거운 숨을 토해 냄과 동시에 몸이 흠칫하고 떨렸다.
목덜미에서 어깨 쪽으로 옮겨 가는 그의 입술에 의해 옷도 함께 밀리며 벗겨지고 흐트러졌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체스터는 나를 사랑한 게 아닌, 단지 내 몸을 원한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