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울고 있는 체스터의 얼굴에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꼭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게 울고 있는 모습이,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종이는 구겼으면서 애절하게 울었다.
“도장 찍어 줘요. 그거면 그냥 깔끔하고 조용하게…….”
“율리아, 제가…… 제가 전부 잘못했습니다!”
“……당신이 잘못한 건 없어요.”
굳이 따지자면 잘못한 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제 지쳤다. 그를 사랑하는 삶이 지겨웠다.
“이혼만 해 주면 혼자 조용히 내려가서 살 거예요.”
“율리아…….”
“그러니 이혼해 주세요.”
“저는,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전에도 말했듯, 당신이 하는 말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분할 수가 없어서요.”
구분할 수가 없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나와 체스터 사이에는 신뢰나 믿음이라는 게 존재할 수가 없었으니까.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오늘도 느꼈다. 나와 그는 육체적으로 엮인 관계였다는 것을.
“무엇보다…… 당신은 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제 몸을 원하는 것뿐이잖아요.”
체스터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 몸을 원하는 거였다.
육체적으로 얽히지 않았다면 내 결말은 죽음이었겠지.
내가 원하는 건, 조용한 퇴장이었다.
내 죽음 이후의 삶을 전생에 읽은 소설이 알려 주었지만, 지금의 삶은 그 내용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내게 주어진 남은 삶은 평온한 곳에서 혼자 쉬고 싶었다.
“오해입니다!”
“오……해.”
그는 또다시 내게 오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체스터는 비밀이 많았다.
“매번 오해라고 말하고…… 제게 숨기는 건 많고……. 당신은 단 한 번도 제게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준 적 없잖아요.”
“율리아.”
“왜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지어요?”
왜 그렇게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지을 자격 없잖아.
상처받은 표정은 당신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하는 거잖아.
“당신이 무슨 자격이 있다고!”
“……이혼은 안 됩니다.”
“제가 여기에 온 건…… 당신이랑 이혼하려고 온 거예요.”
더는 죽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더는 그를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도장 찍어 줘요.”
“……율리아, 저는 순순히 이혼해 줄 생각…… 추호도 없습니다.”
“조용히 떠나, 혼자 살게요. 그러니 협조해 줘요.”
“율리아……. 저를 버리지 마세요…….”
체스터는 내 앞에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꼭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게 굴었다. 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내 앞에 두 무릎을 바닥에 꿇고는 내 다리에 머리를 기대었다.
“제가,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이혼만은…… 하지 말아 주세요, 율리아.”
“…….”
“당신을 사랑하는 건 진심입니다. 다른 건 다 믿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변함없는 진심입니다, 율리아.”
내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안쓰러울 정도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하는 그의 모습에 드는 생각은.
저게 연기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다.
더는 보이는 대로 믿지 않았다. 약해 보이는 모습에 흔들리는 게 아니라, 불신이 먼저 들었다.
“제 옆에 있어 주겠다……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같은 말만 반복하고…… 오해라면서 변명도 똑바로 안 하고.”
그의 변명을 들어 보고는 싶었기에 바로 나가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변명을 늘어놓는 게 아닌 어설픈 눈물로 날 붙잡으려 들었다.
사실 전부 오해가 아니라 사실이니까 변명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도장 찍어요. 깔끔하게 서로 갈 길 가요.”
나는 나의 길을, 당신은 당신의 길을.
“율리아…….”
“당신이 아이를 갖지 말자고 했을 때…… 알았어야 했는데.”
“그건!”
“아이가 생기면 육체적 관계를 맺지 못하니까 그런 말을 한 거잖아요. 당신은 날 그 이상으로 봐 주지 않았는데.”
어차피 나와 아이를 만들 생각이 없었다면 언젠가 부서질 관계였다.
서로 몸이 멀쩡한데, 아이를 가지는 데 조금의 하자도 없는데.
아이를 갖지 말자니?
나는 사실 아이를 원했다. 여러 명이 아니라 한 명 정도는 생각했었다.
후계 때문이라기보다는 사랑하는 남자를 똑 닮은 아이를 가지고 싶었다.
“……어차피 지금이 아니더라도 결국 이렇게 됐을 거예요.”
“율리아!”
“정말 당신이 아이를 싫어해서 그런 말을 했던 거라면…… 당신의 부인이 제가 아니더라도…… 그리 말했을 거라면.”
“…….”
“어쩌면 황녀인 저를 원했던 이유도…… 황녀라는 신분이 있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정치적으로만 이용하려던 게 아니더라도.
전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면 그가 나와의 결혼에 집착했던 이유를 조금도 연관시킬 수 없었다.
나를 그렇게나 경멸했던 남자가, 이번 생에서는 결혼하자고 한 행동이 모순적이었다.
전전생의 그와 이번 생의 그가 다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계기라고는 육체적인 끌림 외에는 없었다.
그러니 나와 그 사이에서는 정신적 사랑이라는 건 존재할 수가 없는 단어였다.
“가신들에게 감히 이혼이나 첩을 들이라는 귀찮은 소리를 듣지 않을 거란 계산도 있던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율리아.”
“당신은 원래 결혼할 생각이 없었잖아요.”
흔들리는 눈빛.
전전생의 그는 결혼을 극도로 싫어했다. 이유는 제대로 모르겠지만, 이번 생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
“지금 제가 당신한테 원하는 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 주는 거예요.”
“제발, 율리아……. 이혼은 안 됩니다……. 아니, 안 되는 게 아니라…… 싫습니다.”
“……당신이 재혼해도 신경 안 쓸게요.”
“율리아……. 제가 왜 당신을 두고 재혼 따위를 합니까?”
애처롭게 구는 체스터와 더는 함께 있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구겨진 서류를 다시 펴서 그의 앞에 놓았다.
집무실 밖으로 나가기 전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체스터를 보지 않은 채 말을 내뱉었다.
“생각할 시간을 줄게요. 도장 찍으면 바로 황성으로…….”
“이혼해 줄 생각 없습니다.”
“…….”
“당신이 아무리 황족이라 하더라도…… 제가 저 서류에 도장을 찍어 주지 않는 이상, 쉽게 이혼 못할 겁니다.”
쉽게 이혼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 서류에만 도장을 찍어 준다면 서로 조용하게 끝낼 수 있었다.
귀찮고 복잡한 절차 없이.
서로가 원한 깔끔한 이혼.
“제게는 유책 사유가 없습니다. 저는 불륜을 저지르거나, 정부를 들인 적도, 당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도 없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마도 유책 사유가 없으니 아빠가 저 서류에 도장을 찍어 오라고 했던 거겠지.
성격 차이를 이유로 이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율리아…….”
체스터는 나가려는 나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내 치맛자락을 잡고 머리를 바닥에 떨구며 떨림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보다 훨씬 더 잘하겠습니다…….”
“…….”
“당신이 짖으라면 짖고, 당신이 기라면 기고, 핥으라면 핥겠습니다.”
“…….”
“그러니…… 이혼은…… 이혼만은 철회해 주세요, 율리아…….”
가련하게 구는 그를 끝내 외면했다.
애원하는 그를 두고 발걸음을 방 밖으로 옮겼다.
이대로 지크베르트 공작저에서 나갈 생각이었다.
“읏……!”
그 순간 처절하게 애원하던 체스터는 내 팔목을 붙잡더니 나를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갔다.
벗어나려고 했지만, 성인 남자의 악력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이 내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
“이거 놔!”
다리에 힘을 줘 버텨 보려 했고, 그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빼내려 발버둥도 쳐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체스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끝에 다다른 곳은 낯선 방이었다. 그는 나를 방 안에 넣고는 그대로 방문을 닫아 버렸다.
“뭐 하는 짓이야!”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문고리를 잡아당겨 봤지만, 철컥거리는 소리만 날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바깥에서 문을 잠근 건지, 아니면 문을 열 수 없게 어떠한 다른 조치를 해 둔 건지.
“당장 열어요.”
“……안 됩니다.”
“열어요.”
“이 문을 열면…… 당신은 망설임 없이 이곳에서 나갈 생각이라는 거 압니다.”
“…….”
“이혼…… 다시 생각해 보세요. 이혼 생각을 버린다면…… 그때 나갈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정말 그렇게 방 안에 갇혔다. 그 말을 끝으로 더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내게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는 건 조금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 갇혀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현실이 받아들여졌다.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창문 밖으로 나가는 것.
고개를 돌리자 바로 창문이 보였다. 바로 달려가 봤지만 이미 내 행동을 예상한 듯 창문은 조금도 열리지 않았다.
이곳으로 들어온 문이 아닌, 다른 문도 열어 봤지만 보이는 건 드레스와 보석들뿐이었다.
침대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뭐야.”
마치 이 방은 누군가를 가둘 생각으로 설계된 것만 같았다.
채광도 좋고, 답답함을 크게 느끼지 못할 정도로 넓었다. 그러나 이곳에 머물 생각은 없었다.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방문 밖으로 나가는 거 하나였다.
이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아빠는 내가 마음이 변해서 다시 그와 화해했다고 생각하겠지?
안 돼. 꼭 이혼해야 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는 순간,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율리아.”
안으로 들어온 건 체스터였다.
그는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다시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옆에 있던 테이블에 가지고 온 음식을 놓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것들로 가지고 왔습니다.”
“…….”
삐걱거리는 소리와 동시에 검은 그림자가 내 위로 드리워졌다.
이내 가까이에서 비누 향이 났다.
“먹어요, 율리아.”
“…….”
“당신이 잘 먹는 것들을 위주로 가지고 왔습니다.”
몸이 공중으로 뜨는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금방 착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체스터는 누워 있던 나를 가볍게 들어 안고는 의자에 앉혔다.
“……저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이혼에 대해서는 여기서 천천히 생각하세요.”
“왜 저를 붙잡아요?”
“제게는 당신이 없으면 안 되니까요.”
체스터는 내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코끝에 닿는 달콤한 디저트 향에 처음으로 거북함을 느꼈다.
그와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채, 울컥거리는 마음을 갈무리했다.
심호흡한 후에, 최대한 떨리지 않는 음성으로 아무렇지 않아 보이게 내뱉으려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날 사랑하기는 했어요?”
목구멍에서 맴도는 수많은 말 중에 왜 하필 이 말이 먼저 나간 건지.
말을 내뱉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제일 쓸모없는 질문을 해 버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