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그의 뺨을 내려친 손을 꽉 말아 쥐었다.
변명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체스터를 때릴 생각이 없었다.
차마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때린 건 미안해요.”
이 말만 하고 바로 나가려고 했는데, 그의 뺨을 내리친 손목을 붙잡혔다.
그는 주먹을 쥐고 있는 내 손을 강제로 펴더니,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유리로 된 공예품에 금이라도 간 것처럼.
“아픕니까.”
왜 내게 아프냐고 묻는 거지?
때린 건 나고, 맞은 건 체스터인데. 왜 뺨을 맞은 네가, 당신을 때린 나를 걱정하고 있는 거야?
이조차도 연기일까.
“당신이 때린다면 기꺼이 맞아 주겠습니다, 율리아. 그러니…… 저를 이곳에 버려두고 가지 마세요…….”
“…….”
“사랑합니다, 율리아.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간절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에 찰나 흔들렸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내 손목을 그의 손에서 빼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갔다.
그를 보지 않으면 이 알 수 없는 떨림을 멈출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마님?”
“……황성에 갈 생각이야. 그러니 바로 갈 수 있게 준비해 줘.”
“네, 마님.”
이제 다시 율리아 지크베르트 공작 부인, 그리고 마님이 아닌, 황녀 율리아 베아트리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를 사랑해야만 하는 게, 그리고 그에게 이용만 당해야 하는 게 내게 정해진 운명이라면.
이번에는 그 운명을 기꺼이 깨부수려고 한다.
이게 또다시 나를 숨게 만드는 일이라 할지라도.
* * *
“황녀가…… 황성으로 돌아갔다고?”
“네. 그리고 황녀 전하께서 지크베르트 공작의 뺨을 내리쳤다고 합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남자의 입꼬리는 살며시 위로 올라갔다.
“흠……. 당분간은 가만히 지켜보는 게 좋겠지.”
* * *
황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내가 발걸음을 향한 곳은 아빠가 있는 집무실이었다.
“……율리아?”
“아빠가 그랬지? 아빠는 내 행복을 바란다고.”
“다친…… 거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아빠. 아빠는 내 행복을 바란다고 했잖아.”
몸이 떨어져 있더라도, 사는 집이 다르더라도, 나와 그를 연결하고 있는 법은 사라지지 않았다.
체스터와 나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 내기 위해서는…….
“이혼할 거야.”
“…….”
“그러니 아빠가 도와줘. 나 이혼할 거야.”
“율리아, 혹시 싸워서 그런 거라면…….”
막무가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나는 사랑이 아니었다면 결혼할 생각이 딱히 없었다.
그러니 사랑이 없는 그와 나 사이에서 부부라는 관계는 내게 있어 무의미한 거였다.
“아니, 이혼할 거야. 아빠.”
“……율리아, 한동안 여기서 지내며 머리라도 식히는 게 좋지 않을까?”
“…….”
“쉬면서 다시 생각해도, 이혼한다는 생각이 변함없으면…… 그때 이혼하는 게 어떠하겠니.”
“……알았어, 아빠.”
아빠의 말대로 일주일 정도 황성에서 지내며 머리를 식혔지만, 이혼할 거라는 마음은 변함없었다.
요즘 들어 다소 감정 기복이 심해졌음이 느껴졌지만, 배신감 때문이라고 치부했다.
다시 과거와 같은 정신병이 도지는 게 아니라고, 나를 다독였다.
일주일 후에 다시 아빠를 찾아갔다.
“아빠, 이혼할 거야.”
“……그래. 네 뜻이 정 그러하다면 그러는 게 맞겠지.”
“이혼하면…… 한적한 곳에서 조용하게 살고 싶어.”
“그래. 준비해 두마.”
“응.”
아빠는 내게 서류를 건넸다.
“거기에 지크베르트 공작의 사인만 받아 오면 된다.”
“……응.”
원래 이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 뒷배는 황제였으니, 마음만 먹으면 이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단지 소송이 걸리면 복잡해지지만, 서로 합의하에 하는 이혼이라면 절차가 덜 복잡하고 간단하며 깔끔하니까.
“대화를 다시 해 보고…… 마음이 또 바뀌면 이혼하지 말고.”
“변함은 없을 거야, 아빠.”
“……그래.”
이혼 서류를 들고, 황실 마차에 올라탔다.
더는 지크베르트 가문의 문양이 아닌, 황가의 문양이 커다랗게 새겨진 마차만을 타겠지.
지크베르트 공작 부인이 아니라, 이제 베아트리스 황녀로 돌아오는 거니까.
일주일 만에 다시 보는 거였다.
황성에서 지내는 동안 손에 난 상처도 흉터 하나 남지 않고 깨끗하게 치료됐다.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마차는 금방 지크베르트 공작저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순간, 안의 분위기가 무언가 변했음을 느꼈다.
“…….”
“마님, 어서 오시지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를 보는 사용인들의 눈빛이 마치 구원자를 본 눈과 다름없지 않은가.
왜?
“주인님은 지금…….”
“지크베르트 공이 있는 곳으로 바로 안내해.”
“……네.”
집사는 군말 없이 체스터가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황성에서 지내며 수백 번을 상상하고 수백 번을 연습했다.
그러니 연습했던 대로 잘만 말하면 되는데…….
집무실의 문이 열리는 순간, 조금도 상상하지 못한 광경이 두 눈에 들어왔다.
엉망으로 쌓여 있는 서류들, 깨지거나 비어 있는 술병들, 그리고 지독한 알코올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
집사는 문을 닫고 밖으로 사라졌다. 그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소파에 커다란 남자가 두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엉망이네.”
술병만 깨진 게 아니었다. 부서진 물건들도 곳곳에 보였으니까.
한쪽을 보자, 내가 조각조각 찢어 놓았던 초상화의 종잇조각을 조잡하게 이어 붙여 놓은 게 눈에 들어왔다.
저절로 이혼 서류를 쥔 손에 힘이 실렸다.
천천히 잠든 그에게 다가가, 다리를 굽혀 찬찬히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그동안 이른 아침부터 멀끔한 모습을 보였던 사람이었던 만큼, 지금처럼 잔뜩 흐트러진 모습은 흔치 않았다.
“……겨우 일주일이었는데.”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 그의 뺨을 쓸었다. 체스터의 피부는 거칠어져 있었다.
다시 그의 얼굴을 보자, 차분했던 심장은 팔딱거리며 반응했다.
아직 그를 사랑하는 감정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왜 이렇게 망가져 있어.”
흔들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내 심장이 아직도 체스터를 향해 뛰고 있는 이상,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빠도 그걸 알기에 나를 직접 이곳으로 보낸 건지.
그의 뺨을 천천히 쓸고 있던 손이 그에게 붙잡혔다.
굳게 감긴 눈은 천천히 핏빛 눈동자를 드러냈다.
“율리아…….”
방금 잠에서 깨어나 살짝 잠겨 있지만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손목을 붙잡지 않은 다른 손이 내 허리를 감쌌다.
체스터는 그대로 나를 품으로 잡아당겼다.
“또…… 환영입니까.”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시야가 바뀌며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위에 체스터가 올라타 있었다.
그리고 내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닿았다.
입 안으로 파고드는 말캉한 살덩이에서는 독한 알코올 향이 섞여 있었다.
여린 점막을 훑는 초조함과 다급함이 뚝뚝 묻어나는 그의 혀에 쉽게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밀어내는 게 옳은 거고, 밀어내야만 하는 건데.
왜 나는 그를 받아 주고 있는 건지.
입 안이 얼얼했다. 그의 혀가 훑고 지나간 자리는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어깨를 밀어냈지만, 그의 몸은 조금도 꿈쩍하지 않았다.
“하아…….”
호흡이 엉망으로 흐트러질 때까지 그의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또다시 내게 입을 맞추려는 그의 입술을 손으로 덮었다.
“…….”
“비켜요. 우리 이제 이런 사이 아니잖아요.”
“아…… 율리아……. 진짜 당신입니까?”
“네. 그러니 비켜요.”
체스터는 내 말은 조금도 들리지 않는지. 비키라는 말에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불안했다. 혹시라도 팔딱거리며 뛰고 있는 내 심장 소리가 그의 귀에도 들릴까 봐.
“비키라고……!”
“보고 싶었습니다.”
“…….”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나를 끌어안고 있는 체스터의 팔이 덜덜 떠는 게 내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리고 있는 것까지.
나는 이혼 서류를 가지고 왔는데.
그 서류에 그의 도장을 찍으러 왔는데.
나와 체스터의 관계를 붙잡고 있는 단 하나를 끊어 내기 위해 왔는데.
“저는…… 당신이 없으면 안 됩니다…….”
“…….”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율리아. 그러니…….”
“저는 당신이랑 눈물 젖은 재회를 하러 온 게 아니에요.”
사실 아주 많이 흔들렸다. 그리고 지금도 무척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전전생부터 그에게 듣고 싶었던 달콤한 말들을 지금 전부 내게 쏟아 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탕이 너무 달콤하면 이를 썩게 만드는 것처럼.
체스터가 하는 이 달콤한 말도 내 마음을 썩혔다.
지금 내가 원하는 건.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에서 조용히 사는 거였다.
가족들에게서도, 사랑하는 남자에게서도, 전부 벗어나 평온을 되찾고 조용하게 살아가는 것.
“이러고 있으면 말 못 하니까. 비켜요.”
체스터는 그제야 순순히 내 위에서 내려왔다.
혹시라도 그가 갑자기 마음을 바꿀까, 냉큼 일어나 그의 맞은편 소파로 달려가 앉았다.
그런 다음 옷매무새를 대충 정리하고 살짝 구겨진 서류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제가 말로 하는 것보단 직접 보는 게 이해가 더 쉽겠죠.”
체스터는 서류를 집어 들고는 천천히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팔락팔락.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이 조용히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한 장씩 넘어갈수록 그의 얼굴은 희게 질려 갔다.
“조용히 이혼하고 싶어요. 크게 분쟁을 일으키고 싶지도 않고…….”
체스터는 서류를 든 채, 얼어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서류를 쥐고 있는 손만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서류를 향하고 있는 그의 눈동자는 굳어 있었다.
“당신도 조용히 이혼하는 게 좋겠죠. 그러니 거기에 당신만 도장을 찍어 준다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혼 서류는 그의 손아귀에서 처참하게 구겨졌다.
반사적으로 소파에서 일어나 서류를 구겨 버린 그에게 왜 그러냐고 소리치려고 했다.
“그걸 왜!”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오는 그의 모습에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체스터는 지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