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귓가에 퍼지는 달콤한 속삭임은 순간의 나를 현혹했지만, 이내 이마저도 연기일 수 있다는 것에 몸이 흠칫하고 떨렸다.
지금이라도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내 몸을 감싸는 그의 손에 의해 빠져나갈 수 없었다.
“율리아, 제가 잘못했습니다.”
“…….”
“하지만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건 진심입니다.”
다정한 그의 속삭임은 사슬이 되어 내 몸을 감싸 옥죄었다.
지독한 굴레.
신이 존재한다면 그 빌어먹을 신은 내가 체스터를 사랑할 운명이라고, 그 운명을 나는 감히 벗어날 수 없다고 명시해 주는 것 같았다.
내가 아무리 죽고 발버둥 쳐도 결국 나는 체스터를 사랑할 거라고.
그러니 괜한 헛짓거리는 하지 말고 그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라는 말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당신을 사랑함에 있어서는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
피부 위로 뜨겁게 퍼지는 그의 숨결이 몸을 굳게 만들었다.
내 몸을 꽉 끌어안는 그의 팔이, 내 몸에 채워지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다시 만났을 때, 옆에 있어 주겠다고 했잖아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어떠한 얼굴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그의 손이 풀어지더니 다른 손과 마찬가지로 내 허리를 꽉 휘감았다.
“옆에 있어 주겠다고 했잖아요, 율리아.”
“…….”
“떠나지 마요. 떠나지 말아 주세요.”
나는 지금 내 몸을 꽉 끌어안은 그의 힘에 의해 벗어나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 이 따뜻한 품을 벗어나고 싶지 않아 내가 약하다는 핑계로 안겨 있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건. 내 몸이 아니라 내 정신이었다.
“놔요.”
“……율리아.”
놓으라는 말에 내 허리를 휘감은 그의 팔에는 아까보다 더 힘이 실렸다.
“기다리게 해서…… 바로 당신을 찾지 못해 미안합니다…….”
“놔……요.”
“사랑합니다, 율리아.”
“놔요!”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고 팔을 쭉 폈지만, 오히려 그 바람에 그의 얼굴이 똑바로 보였다.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체스터의 얼굴에 마음이 흔들렸다.
허리를 휘감고 있던 그의 손이 풀어져 내 눈 밑으로 다가왔다.
“울지 마세요, 율리아.”
울고 있는 건 나였다.
그제야 내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나도 모르게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대체 왜?
내가 왜 울고 있는 거지?
지독한 배신감 때문일까? 그도 아니라면…… 어리석게도 그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일까.
“당신이 우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더는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요.”
첫 번째 생도, 이번 생도 어리석게 나는 그를 사랑했다.
결국 나는 끝끝내 체스터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 체스터를 사랑할 운명이라고 정해진 것처럼.
그렇기에 이렇게 얼굴을 보고 있으면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내 다짐이 쉽게 무너졌다.
체스터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생각보다 내 몸을 붙잡고 있던 그의 팔은 쉽게 떨어졌다.
“율리아…….”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나아가던 발걸음이 멈췄다.
바보 같다는 걸 알았다. 어리석은 사랑이란 감정이 퍼진 내 몸은 머리의 통제를 듣지 않았다.
이대로 무시하고 나가야만 하는데.
왜 나는 차마 그의 목소리를 외면하지도, 무시하지도 못한 채 발걸음을 멈춘 걸까.
나는 체스터에게서 어떤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는 건지.
“가지 마세요.”
“…….”
“제가 돌아오면 옆에…… 있어 주기로 했잖아요.”
그림자가 짙어지더니, 익숙한 팔이 내 어깨와 목을 휘감았다.
체스터는 머리를 숙여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율리아……. 제발…….”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에서 그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지만 이제 속지 않을 거야.
그의 거짓된 간절함에, 독에 중독되는 것과 같은 사랑도, 더는 믿지 않을 테니까.
체스터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저 사랑한다는 말은 내가 필요하기에 붙잡기 위한 말일 테니까.
더는 체스터의 달콤한 말에 현혹되어 속아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
나를 감싼 그의 팔을 떨쳐 내고, 떨어지지 않던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었으니까.
아빠와 오빠의 말이 맞았다. 황성보다 더 안전한 곳은 없다는 그 말이.
“율리아.”
이 와중에도 그를 향하는 내 심장이 원망스러웠다.
“평생 용서해 주지 않아도 됩니다.”
“…….”
“단지 옆에만 있어 주세요.”
그 말이 왜 또다시 내 발걸음을 느리게 만드는 건지.
그의 간절한 떨림을 간신히 외면하고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손목이 그의 손에 붙들렸다.
“……뭐 하자는 거예요?”
“율리아, 당신이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오해…….”
단 두 글자가 입 안에서 맴돌았다. 이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는 당신을 단 한 번도 정치적으로 생각한 적 없습니다!”
“……그걸 저더러 믿으라고요?”
“저는…….”
“거짓말쟁이.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당신 앞에서 웃었던 걸 보며 얼마나 재미있어했을까.”
“율리아!”
“애정이 고팠던 황녀가 아무런 의심 없이 의지하니 얼마나 좋았겠어……?”
내가 내뱉는 말인데도, 심장이 예리한 칼날로 난도질을 당하는 것처럼 아팠다.
그대로 몸을 돌려, 체스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알아서 더는 노력하지 않아도, 황녀가 굴러 들어왔는데.”
“그게 아닙…….”
“그래서 처음부터 결혼하자고 했던 거구나……. 왜 그렇게 결혼에 집착하나 했는데…….”
“율리아!”
“……제가 황녀라서 그런 거잖아요. 제가 황녀가 아니었으면…… 결혼하자고 하지 않았을 거잖아요.”
어쩌면…… 나와 잔 이유도, 내가 황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무언가가 크게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려 했는데, 최대한 감정적으로 굴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감정이 제멋대로 앞섰다.
“애초에 제가 황녀라는 걸 몰랐다면…… 애초에 저랑 잤을 일도 없었겠죠.”
“…….”
“제가 황녀라는 걸 알고 잔 거 아니에요? 제가 황녀가 아니었다면…… 당신과 한 침대에서 일어났을 리가 없었겠죠.”
“율리아.”
“당신이 필요한 건! 당신이 소속된 세력을 공고하게 다져 줄 황녀인…… 저잖아요.”
이번 생은 전전생과 다르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다른 점은 그저 체스터가 반역을 생각하는 건 아니라는 거였다.
그뿐이었다.
전전생과 마찬가지로 체스터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제가 황녀가 아니었더라면…… 애초에 당신과 얽히지 않았겠죠!”
“…….”
“당신은 처음부터 제가 어렸을 때 만났던 사람인지…… 몰랐잖아요……. 못 알아봤잖아요…….”
전전생에서도 당신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까 나를 붙잡을 때 했던 말들을 보면 이번 생에서는 어렸을 때 만났던 사람이 나라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지만.
하지만 그가 단번에 나를 알아보지 못한 건 진실이었다.
과연 내가 죽고, 체스터가 그 사람이 나라는 걸 알아차렸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생도 전전생과 다름없이, 체스터는 우리가 유년 시절에 만났던 사람이라는 걸 나보다 빨리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니 우리는 제가 황녀가 아니었더라면…… 절대로 얽히지 않았을 관계라는 거예요.”
“율리아…….”
“저는 당신의 장기말로 남아 있지 않을 거예요.”
왜 당신이 상처받았다는 얼굴을 하는 거야?
상처받은 얼굴을 해야 하는 건 나인데. 왜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이제 이거 놔! 집으로 돌아갈 거야!”
소리쳤지만 체스터는 내 손목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못…… 놓습니다.”
“매번 내 말은 제대로 들어 준 적 없는 거 알아요? 늘 당신 멋대로였던 거…….”
“…….”
“이번에도 똑같아! 또…… 나를 당신 멋대로 휘두르려고 하잖아…….”
내 손목을 붙잡은 그의 손에서는 힘이 풀렸다.
그 틈을 타 재빨리 그의 손아귀에서 내 손목을 빼냈다.
이 이상으로 그의 얼굴을 보면 흔들리다 못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러기 전에 여기서 벗어나야만 했다.
“……율리아.”
계단을 내려가는 중,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나를 애달프게 부르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하지만 무시했다.
외면해야만 이 아픔을 억누를 수 있었으니까.
심호흡을 하고 몸을 돌리지 않은 채, 떨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우리 당분간 시간을 가져요.”
대답은 들을 생각이 없었기에 좀 더 걸음의 속도를 빠르게 했다.
계단 아래로 완전히 내려온 순간이었다. 몸이 벽으로 밀쳐진 건.
체스터는 두 팔 사이에 나를 가뒀다.
“……뭐 하자는 거예요?”
“이대로는 못 보냅니다.”
“…….”
“율리아, 제발…….”
지금 이렇게 구는 건. 아마도 아직은 내가 필요해서겠지.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는 것도, 내 마음을 약하게 만들어 붙잡아 두려는 속셈이겠지.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비켜요. 황성으로 갈 거예요.”
“저는 당신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렇겠죠. 당신은 지금 황녀가 필요한 거니까!”
“율리아……. 저는 당신을 정치적으로…….”
“위선밖에 없는…… 당신과 더는 한 지붕 아래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나를 가두고 있는 팔을 밀어내고 체스터에게서 빠져나왔다.
심장이 쿵쿵거리면서 미친 듯이 커다랗게 뛰었다. 여기서 어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현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랬기에 지금 손만 뻗으면 문고리가 닿을 거리에 있어 움직인 순간이었다.
그 순간 손목이 또다시 붙잡혔다.
“정치적인 이유가 맞다 해도…… 이 정도는 감안할 수 있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안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느낌과 동시에 이성이 아닌 본능이 앞섰다.
살과 살이 부딪히는 마찰음이 집 안을 가득 채웠다.
“아, 아…….”
손바닥이 얼얼했다. 체스터의 고개는 살짝 돌아가 있었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됐다.
나도 모르게 손으로 그의 뺨을 내리쳤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