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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86화 (86/141)

#86화

“안 그래? 엄마의 유언이 아니었다면 나를 이렇게 찾을 이유도 없잖아.”

“율리아…….”

내가 받았던 상처들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가족의 외면이 얼마나 나를 갉아먹었는지,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며 결국 혼자 남겨졌을 때의 아픔을.

오빠는 결코 경험해 본 적 없을 테니까.

오빠는 차기 황제가 될 황태자였고, 나는 황후의 건강을 악화시킨 이름뿐인 황녀였다.

그게 나와 오빠의 차이였다.

오빠에겐 권력이 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권력은 황족들 사이에서는 너무나도 무력했고, 황명 앞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황족이라는 신분마저도.

“나한테 황녀라는 신분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율리아,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야…….”

“오빠가 뭘 안다고 그래? 내가 도와 달라고…… 도와 달라고 손을 내밀었을 때 잡아 줬어야지!”

“미안, 정말 미안해, 율리아…….”

“돌아가. 오빠가 정말 나한테 미안하면 나를 황성으로 데려가면 안 되는 거야.”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내가 무슨 말을 내뱉는 건지도 인지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왜 내 마음은 오빠의 말에 크게 흔들리고 있는 건지.

“율리아,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면 안 될까?”

“…….”

“다시는 그런 일을 만들지 않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기회를 줄 수는 없을까?”

“…….”

“제발…… 율리아…….”

입을 열려는 순간, 흐릿했던 시야는 이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또다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왜 하필 이럴 때 앞이 보이지 않는 건지.

신은 잔혹했다. 최악의 상황을 벗어날 수 없도록 내게 더 최악을 만들어 주었다.

다시는 황성에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못을 박았으나, 결국 또다시 암흑이 되어 버린 시야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기회야.”

“율리아……!”

오빠의 표정이 어떤지는 조금도 알 수 없었다.

흐릿하게 보이는 것도 아니고, 아예 그 무엇도 볼 수 없는 어둠이 내 눈에 빈틈없이 퍼졌으니까.

“나 지금 눈이 안 보여.”

“괜찮아, 율리아. 오빠가 널 안고 가면 되니까.”

몸이 공중으로 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 나를 집어삼켰지만 괜찮았다. 생각보다 오빠의 품은 따뜻해서.

나는 결국 애정에 약했다.

전생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만큼, 가족들의 애정이 얼마나 따뜻하고 달콤한 것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

오빠의 품에 안겨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황성으로 가는 건 알았지만, 바로 아빠에게 가는 건지 아니면 다른 곳에 먼저 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내 누구의 앞에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아마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앞에 있는 건 아빠겠지.

“율리아.”

아빠가 부름과 동시에 오빠는 나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그 순간 나를 껴안는 아빠의 품이 너무 따뜻해서, 서운함은 씻은 듯 녹아내리고 상처는 지금 느껴지는 따스함에 파묻혔다.

“미안하다, 우리 딸. 아빠가…… 많이 미안해…….”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떨림은 내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느껴졌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 손끝이 떨림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결국 나는 가족에게 약했다.

가족이 내게 어떤 일을 행했든, 나는 가족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도 된단다, 우리 딸. 아빠가…… 아빠가 네게 많이 잘못했단다.”

“아……빠.”

“그래.”

“아빠는 날 사랑하지?”

내가 원하는 건 가족의 애정이었으니까.

“그래. 당연히 널 사랑한단다.”

그 말에 죽지 않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서 그 애를 기다리고, 그 애와 함께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 있고 싶었다.

‘너를 데리러 올게.’

왜 이때 그 애가 했던 말이 떠오르는 걸까.

* *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은 사람을 미치광이로 변이시켰다.

그 무엇도 볼 수 없는 시야에 제정신을 유지하기란 어려웠다. 모든 게 무서웠다.

유모 외에는 그 누구도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래 봤자 안에 타인이 들어와도 인식할 수 없었지만.

“유모……. 왜, 왜 아무것도 안 보여?”

유모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러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빠나 오빠보다는 유모가 더 안정을 주었다.

“아무 데도 가지 마…….”

“황녀님, 괜찮아요. 제가 옆에 있어 드릴게요.”

유모는 내 등을 토닥여 주며 불안감에 몸서리치는 나를 진정시켜 주었다.

알 수 없는 불안 증세와 감정이 조절되지 않는 증상이 점차 심해지면서 결국 약을 먹게 되었다.

약을 먹으면 평범한 이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황녀님, 아직도 안 보이세요?”

“……응.”

약을 먹으면 정신적인 증상만이 완화될 뿐, 당장 보이지 않는 눈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단지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바랄 뿐.

“……유모, 나 나가고 싶어.”

“네. 숄만 걸치고 나가죠. 발밑 조심하세요.”

“응.”

유모의 부축을 받아 방 안이 아닌 바깥으로 나갔다.

햇살이 피부로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조금의 풍경도, 햇빛도 두 눈에 담을 수 없었다.

“……다시 들어갈래.”

“황녀님…….”

왠지 모를 박탈감에 다시 실내로 발을 돌렸다.

다시 방 안으로 발을 들인 순간 새까맣던 시야가 걷히고 흐릿하긴 했지만 조금은 빛이 눈에 들어오며 주변이 보였다.

뿌연 연기가 낀 것처럼 보이지만, 이마저도 내게는 기꺼웠다.

하지만 이내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내 몸을 휘감았다. 몸이 떨리며 저절로 실내로 들였던 발을 돌려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황녀님? 갑자기 그렇게 뛰시면 위험해요!”

“하, 하아, 하…….”

궁에서 멀어지자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황녀님? 숨이……. 어서 황궁 의를 불러올게요!”

다시 뜨는 빛 틈새로 찌르는 온몸을 지배하는 지독한 공포는 나를 집어삼켰다.

내게서 떨어지는 유모를 붙잡았다. 누군가 옆에 없는 건 싫은 동시에 무섭고 두려웠다.

“가, 가지, 가지 마……. 유모, 나, 나만 두고 가지 마…….”

“하지만 황녀님의 호흡이…….”

“호, 혼자는 무서워……. 나, 나 두고 가지 마. 옆, 옆에 있어 줘…….”

결국 유모는 덜덜 떠는 나를 꼭 끌어안았다.

“황녀님.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바깥바람…….”

“싫어!”

저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몰랐다.

시야가 확보된 지금은 저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알 수 없는 거대한 공포가 나를 휘감을 것 같았다.

“들어가지 않을 거야. 무서워……. 유모…….”

“……황녀님. 그럼 일단 황태자 전하께 가요.”

“나는 유모만……! 유모만 있어도 돼!”

절박했다. 원인을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저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변했다.

숨을 쉬는 방법이 뭔지 잊었다. 유모의 팔을 붙잡은 손에는 힘이 실렸다.

“황태자 전하! 황녀님께서……!”

“싫, 싫어, 유모……. 부르지 마…….”

유모를 말렸지만 이내 멀리 있던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팔이 무릎 아래로 파고들고 다른 손은 어깨를 감았다. 그리고 몸이 또다시 공중에 가볍게 들렸다.

“헉, 허억…….”

“율리아!”

숨이,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심장 소리가 지나칠 정도로 커다랗게 들리며, 팔딱팔딱 제멋대로 엉망진창으로 뛰어 댔다.

손으로 심장 부근을 꽉 부여잡았다.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아서.

“황궁 의!”

흐릿한 시야 사이로, 오빠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 묻어난 게 보였다.

다급하게 들려오는 음성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러자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으며 제멋대로 뛰던 심장도 차차 안정을 되찾아 갔다.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이제 괜찮아, 나는 사랑받고 있으니까.

그러니…… 안심해도 될 거야.

그 애를 만나려면…… 내가 죽어서는 안 되니까. 나는 아직 죽으면 안 돼.

……꼭 살아 있어야만 했다. 적어도 그 애가 내게 돌아올 때까지.

* * *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왜…… 이런 꿈을 꾼 건지.”

꿈이면 좋겠지만, 부정할 수 없는 유년 시절의 기억이었다.

부질없는 그리움. 다시 살아 봤으나 결국 운명처럼 반복되었던 과거.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분명 엎드려서 잠을 잔 것 같았는데 눈을 뜨니 베개가 아닌, 천장이 보였다.

유리 조각이 박혀 있던 손에서는 더는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손을 들어 보자, 누군가 상처를 치료한 듯 붕대가 감겨 있었다.

몽롱함에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

천천히 방 안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든 사이에 방의 모습은 조금 변해 있었다.

없었던 물건이 보였다. 테이블 위의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음식이 눈에 들어왔다.

방문을 잠가도, 체스터는 마음만 먹으면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갈래.”

어차피 이 안에 내 물건은 없으니까. 그렇기에 몸만 나가면 그만이었다.

다치지 않은 손으로 문을 열자, 벽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체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미동조차 없었기에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건지.

조심스럽게 몸을 굽혀 찬찬히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아직도 그를 사랑하는 건지, 바보 같은 심장은 제멋대로 뛰었다.

손을 뻗어 체스터의 머리카락을 살짝 건드는 순간, 선명한 핏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율리아…….”

나직하게 들리는 목소리. 무척이나 사랑했던 만큼 심장이 찌릿했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제가…… 전부 잘못했습니다. 단 한 번도 저는 당신을…….”

“돌아갈 거예요.”

“어디, 로…… 돌아간다는 겁니까……?”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당신의 집은 여기잖아요, 율리아…….”

이 절박함마저도 거짓인 걸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연기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저는 지크베르트 공작 부인이 아니라, 제국의 유일한 황녀예요.”

“율리아…….”

일어나서 황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체스터는 내 손목을 붙잡더니 그대로 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허리를 단단히 감싸는 팔에는 힘이 실렸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달콤하게 들려오는 나직한 체스터의 속삭임에 애꿎은 심장이 간질거렸다.

이대로 그의 품에 안겨 있으면 안 되고, 체스터를 밀어내야만 하는데.

왜 자꾸 이대로 눈을 감고 그의 품에 안겨 있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지. 생각보다 나는 그를 많이 사랑하고 있었나 보다.

귓가를 파고드는 그의 감미로운 음성은 나를 뒤흔들었다.

“……그러니 옆에 있어 주세요, 율리아.”

생각 이상으로 그의 품은 아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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