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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85화 (85/141)

#85화

처음으로 황성 밖으로 나왔다.

싱그러운 바람, 그리고 푸른 하늘, 시끄러운 사람들의 소리. 바깥은 고요한 황성과 달리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소음으로 가득했다.

그게 싫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사람이 많은 곳이 아닌 사람이 별로 없는 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길을 걷던 도중 언덕을 발견했다. 그저 그 너머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 천천히 그곳으로 걸었다.

“어?”

하지만 이미 안약을 다시 넣을 시간이 지난 지금은 선명했던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온통 암흑은 아니었지만, 모든 것들이 뿌옇게 보였다.

마치 안개가 낀 듯 모든 게 흐릿했다. 제대로 앞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걸었다. 다시 황성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었기에, 계속 나무를 바라보며 언덕 위로 올라갔다.

“…….”

다다른 언덕 위에는 나보다 더 먼저 온 아이가 있었다.

나와 또래로 보이는, 짧은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였다.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애는 왠지 모를 서글픔을 담고 있었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위기가 엄마가 죽었을 때와 비슷하게도 슬프다는 느낌이 들었다.

“안녕?”

그래서 충동적으로 말을 걸었다.

호기심이라면 호기심이었다.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이 과거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어 주길 원했을 때와 닮아 있었다.

또래가 없는데도 이곳에 홀로 있다는 건 그만한 사정이 있을 테니까.

“왜 울어?”

시야는 흐릿했지만, 이 애가 울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

하지만 나를 경계하는 건지 아이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나는 이 소년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소년의 옆에 자리를 잡고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무슨 일이 있어서 울어?”

“…….”

“나랑 말하기 싫어?”

소년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하지만 이 애는 계속 입을 꾹 다물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낼 뿐이었다.

그러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경 쓰지 마.”

계속 말을 걸었는데, 고작 내게 돌아오는 답은 축객령이었다.

저절로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전부 뻔히 보이는데, 이렇게 혼자 있다는 건 위로받을 사람이 없는 건데.

나는 누군가 옆에 있어 주기를 원했었는데.

신경 쓰지 말라는 그 말은 나를 신경 써 달라는 의미라는 걸 알고 있었다.

“뭐, 뭐 하는 거야?”

그래서 이 애를 와락 끌어안았다. 물론 예고하지 않은 행동이기 때문에 놀란 듯 보였지만, 밀어내지는 않았다.

내 생각이 맞았다. 나와 똑같이 이 소년은 마음이 아픈 거였다.

그래서 있는 힘껏 끌어안아 주었다.

“울어도 돼.”

“…….”

“편히 울어.”

누군가의 품에 안겨 우는 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 일인지 나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우는 이유는 알 수 없어도, 홀로 운다는 건 곁에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거니까.

하지만 이 애는 목 놓아 운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울음을 삼키며 눈물만을 뚝뚝 흘릴 뿐이었다.

“이제는 왜 울었는지 알려 줘도 되지 않아?”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이 돌아가셨어.”

“그 마음 이해해.”

“…….”

“나는 엄마가…… 없거든.”

내 말에 아이는 흠칫 몸을 떨었다.

“아빠도, 오빠도 있지만…… 혼자나 다름없거든. 다들 힘들어해서.”

“……나도 혼자야. 그리고 적이 많아.”

“힘들겠네.”

아이를 꽉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시야가 선명하지 않았기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예쁘다는 느낌이 선명하게 와닿았다.

하지만 이내 바로 언덕 아래에 보이는 많은 수의 황실 소속 기사들과 은발을 가진 남자의 형상에 몸이 굳었다.

오빠인지, 아빠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둘 중 누구든 무서웠다.

“나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아.”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에 소년의 표정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다.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가려는 순간, 소년이 다급히 말하며 내 옷소매를 붙잡았다.

“기다려 줘.”

“어……?”

“널 데리러 갈게! 내 자리를 유지하면…… 그때는…… 내 옆에 있어 줘.”

“……응.”

저절로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죽지 말고 살아 있어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나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이 애를 기다리려면 살아 있어야 할 테니까.

“기다릴 테니까. 울지 말고 강해져서 돌아와. 그 누구도 네게 위협이 되지 못하게.”

“반드시 돌아올게.”

“응! 너를 기다리고 있을게.”

“……널 데리러 오면 나는 널 혼자 두지 않을 테니까…… 너도 내 옆에 있어 줘.”

소년에게 마지막으로 웃어 준 후 손을 풀어 내고 그대로 등을 돌려 은발의 남자가 있는 쪽이 아닌, 반대쪽으로 내려갔다.

시야는 아까보다도 더 흐려졌다. 사람의 형체와 머리카락의 색만 간신히 구분될 정도로 앞이 보이질 않았다.

달리고 또 달리다 보니, 어느새 언덕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고개를 들자 분명 파랗던 하늘은 붉은 노을로 물들여져 있었다.

“앗!”

누군가와 부딪혔다. 혹시 부딪힌 이가 아빠나 오빠일 수도 있어, 고개를 드는 것을 꺼렸다.

하지만 이내 귓가에 파고드는 목소리는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괜찮나요?”

“……네.”

그래서 안심할 수 있었다.

고개를 들자 화사한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의 형체가 언뜻 보였다.

황성에 유모가 있긴 했지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여기서 빨리 벗어나야만 했다.

혹시라도 시간을 지체하면 잡힐 수도 있으니 재빨리 멀어져야만 했다.

“괜찮아요!”

넘어졌지만, 훌훌 털고 일어나 사람이 많은 곳으로 뛰어갔다.

그냥 죽어 버릴 생각이었는데, 흑발의 소년으로 인해 차마 죽을 수는 없게 되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절박함이 느껴져서. 그냥 나 몰라라 하면 그만이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인파 속에 휩쓸렸다. 딱히 목적지가 있는 게 아니기에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시끄러운 사람들의 소리가 가득했지만, 차라리 이 소음이 나의 발소리를 덮는다 생각하고 걸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누군가가 나를 안아 들었다.

“율리아.”

머리 바로 위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무척이나 익숙했다. 오빠였다.

그와 동시에 몸이 굳었다. 분명 반대쪽으로 왔는데, 왜 붙잡힌 거지?

“돌아가자.”

“…….”

다시 황성으로 돌아가자는 의미일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면 다시 눈이 불타는 듯한 감각을 느끼고, 두피가 뜯겨져 나가는 듯한 열감을 느껴야 할 텐데.

그걸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싫어! 돌아가지 않을 거야!”

오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그럴수록 나를 끌어안고 있는 오빠의 팔에 힘이 실릴 뿐이었다.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황성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거 놔! 다시는 황성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

“그냥 죽은 사람으로 치부해! 어차피 지금껏 바깥에 모습을 드러낸 적도 없으니까 그냥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려!”

“율리아.”

“오빠는 나 싫어하잖아!”

“내가…… 미안해, 율리아…….”

그제야 나를 붙잡은 오빠의 몸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때 내가 네 손을 잡아 줬더라면…….”

“날 먼저 외면한 건 오빠잖아.”

“미안해, 율리아……. 네가 아무리 미워도 미워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결국 나를 미워했던 거네.

“미안하면…… 그냥 날 죽은 사람으로 처리해 줘. 돌아가고 싶지 않아.”

“돌아가자, 율리아. 이번에 돌아가면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

“율리아, 황성 밖은 위험해. 네게 가장 안전한 곳은 황성이야. 그러니 돌아가자. 아버지도 많이 뉘우치고 있어.”

“…….”

“다시 예전처럼 지내도 돼. 네가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들어줄 거야, 율리아. 그러니 돌아가자.”

“뭐든?”

“그래. 뭐든지 네가 바라는 게 있다면 들어줄 거야.”

저 말만큼 애매한 말이 있을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나조차 모르는데,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들어주겠다니.

마치 금전적으로 해결을 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금전적으로 얻을 수 있는 걸 원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바라는 건 그저 애정이었다. 따뜻한 눈빛과 애정이 듬뿍 느껴지는 손길.

하지만 황성에서는 둘 중 무엇도 나는 얻을 수가 없었다. 슬픔과 절망, 그리고 무력감만이 내가 느끼고 얻은 감정이었다.

“내가 어떻게 믿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눈. 머리카락의 뿌리가 자라면 다시 독한 염색약을 두피에 도포했다.

타는 듯한 괴로움이 나를 집어삼키는 황성에 어찌 돌아가고 싶을까.

“아빠나! 오빠는! 내가…… 뭘 원했는지나 알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율리아…….”

“이대로 떠날 거야. 제국을 떠나서 영영!”

발이 땅에 닿음과 동시에 뒤에서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율리아……. 오빠가, 오빠가…… 다 잘못했어. 너마저도 없으면…… 어머니를 뵐 낯이 없어…….”

“…….”

“다시는 네가 아파하거나 혼자 있게 두지 않을게, 율리아. 그러니 떠난다는 말은 하지 말아 줘…….”

오빠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내가, 내가…… 전부 잘못했어, 율리아. 그러니…….”

“오빠는 알아?”

오빠는 지저분한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 안약을 넣은 후부터 앞이 제대로 보인 적이 별로 없어.”

“……율리아.”

“오빠만 힘들었어? 나도 힘들었어. 오빠는 엄마와의 추억도, 곁에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나는 아니었어.”

옆에 그 누구도 없었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연민과 동정의 마음을 품고 나를 다독여 주는 유모뿐이었다.

이후로도 시녀들이 들이닥치며,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유모는 필사적으로 말리려고 했지만, 황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유모가 내게 해 줄 수 있는 거라고는 끌어안고 나를 대신해 본인이 엉엉 울어 주는 거 하나였다.

“내 곁에는 누구도 없었어, 오빠. 나한테 남은 사람은 아빠랑 오빠뿐이었는데……. 아빠와 오빠의 행실을 봐.”

“율리아, 잘못했어…….”

“결국 오빠가 지금 내게 이러는 건 전부 엄마의 유언 때문인 거잖아.”

지독한 외로움과 불신이 나를 집어삼킨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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