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84화 (84/141)

#84화

체스터는 계속 진찰을 받을 것과 음식을 먹을 것을 권유했지만, 듣지 않았다.

“우욱!”

토기가 치밀었다. 배가 고플 수가 없었다. 속이 더부룩하면서 알 수 없는 토기가 일렁였으니까.

헛구역질이 나왔다.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아랫배가 욱신거리며 아렸다. 생각보다 사랑에 대한 배신은 몸을 아프게 하는 모양이었다.

모든 게 무의미했다.

“……흑.”

결국 나는 그의 애정이라는 신기루를 좇았던 거였다. 하지만 그의 애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거짓된 애정이라는 황홀한 찰나에 속아 신기루는 내 눈을 가렸다.

나와 그의 결말은 나의 죽음이었다는 걸, 어리석은 가짜에 현혹되어 망각했다.

전부 다 그럴듯한 거짓말이었는데, 전전생부터 갈구했던 그의 애정이라는 달콤한 맹독에 취해 또다시 나를 죽였다.

어리석었다.

“아파…….”

심장 부근을 손으로 꽉 부여잡았다.

나의 운명은 바꿀 수 없던 거였다. 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건 엑스트라 따위가 바꾸지 못하는 운명이었다.

침대에 엎어져 눕자 서서히 졸음이 쏟아졌다.

유독 최근 들어 잠이 늘었다.

* * *

여전히 엄마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날이 생생했다. 내 가족들의 행동이 가장 크게 변했으니까.

장례식조차 제대로 참여할 수 없었다. 아빠와 오빠의 눈만 봐도 나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래서 조용히 숨죽여 구석에서 눈물을 흘렸다.

“황녀님.”

“……유모.”

유모는 사실 엄마보다도 나와 있어 준 시간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엄마는 몸이 약해, 어느 정도 건강해졌을 때만 나와 있어 줄 수 있었으니까.

엄마가 나와 함께 있어 주지 못할 때는 오빠나 아빠가 있어 주는 게 아니라, 유모가 내 곁에 머물러 주었다.

그랬기에 정신적으로 유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질 거예요.”

“유모…….”

“여기서는 크게 울어도 돼요.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

그 말에 더욱 슬픈 감정이 일렁이며 소리로 터져 나왔다.

내 등을 따뜻하게 토닥여 주는 그 손길이 무척이나 상냥하고 의지가 되어 더욱 소리를 내어 울었다.

“슬픔은 여기서 전부 쏟아 내요.”

그 누구도 내게 울어도 된다고 말해 주지 않았다.

마치 내가 엄마를 죽게 만든 죄인인 듯 취급하며 차디찬 눈과 경멸 어린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중 유일하게 울어도 된다고 하고, 괜찮다고 해 주는 사람은 유모뿐이었다.

“…….”

그러나 그리 시간이 많이 흐른 것도 아닌데, 유모마저도 어찌해 줄 수 없는 상황이 내게 몰아쳤다.

황실 소속의 기사들이 갑작스럽게 예고도 없이 내 궁으로 들이닥쳤다.

그들과 함께 처음 보는 시녀들이 내 주변을 둘러쌌다.

“무, 무슨 일이냐!”

“황명입니다, 황녀 전하.”

“황……명?”

“네.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명하셨습니다.”

직감적으로 별로 좋지 못한 황명이라는 걸 깨달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와 안정감을 찾기 위해 바로 옆에 있는 유모의 품에 파고들었다.

“돌아가신 황후 폐하와 동일하게 머리색과 눈 색을 바꾸라는 황명입니다, 황녀 전하.”

“아, 아빠가…… 아빠가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거짓말이어야만 했다. 그래도 아빠였다. 아빠가 내게 그런 명령을 내릴 리가 없었다.

엄마가 죽은 이후로는 날 살갑게 대해 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명령을 내릴 리는 없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 황녀 전하께서 협조를 해 주셔야겠습니다.”

“싫어! 내가 왜 그래야 해?”

그건 내가 아니잖아.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율리아 베아트리스는 엑스트라였기에 유년 시절의 이야기가 전혀 없었다.

단지 흑막에게 비정상적으로 광기 어린 집착을 하는 역할. 딱 그것만이 소설 속에서 드러난 율리아의 행동이었다.

기사들과 시녀들이 격하게 거부하는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아직 나는 황녀 신분이라는 점을 이용해 저항했다.

“어찌 황족의 몸에 감히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이야!”

아무리 황명이더라도, 황족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소리를 지르며 내가 가진 황녀라는 권위를 휘둘렀지만, 몸은 바들바들 떨렸다.

“황녀 전하, 황명인 만큼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빠가 나한테 그런 황명을 내렸을 리가 없어! 내 귀로 직접 듣는 게 아닌 이상, 그 누구도 내 몸에 손을 댈 수 없어!”

무서웠다. 나보다 훨씬 크고 무장을 한 상태의 성인 남자들을 앞에 두고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아빠! 아빠!”

원래 율리아라는 엑스트라는 가족에게 사랑받는 이미지였잖아.

사랑받는 황녀라면서. 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시끄럽게 소리치며 소란을 일으키자, 엄마가 죽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아빠가 이곳에 방문했다.

아빠가 나타나자 기사들은 아빠가 나를 똑바로 볼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켰다.

다급하게 무릎을 꿇고 애원하듯 아빠에게 빌었다.

“아빠! 아니잖아요……. 아빠가 그런 명령을 내렸을 리가 없잖아요! 그쵸?”

아빠의 바지를 꽉 부여잡으며 희망을 품었다.

그래도 나는 아빠의 딸이니까.

하지만 그런 내 기대는 무참히 짓밟혔다. 아빠는 나의 간절한 눈빛을 가볍게 외면했다.

바짓단을 붙잡았던 손에서는 힘이 풀렸다.

“…….”

그대로 시녀들에게 붙잡혀 어디론가 질질 끌려갔다.

끌려간 곳에서 원치 않게 찬란한 은빛 머리카락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알 수 없는 약을 내 눈동자에 떨궜다.

눈이 타는 듯이 아파 괴로웠다. 저절로 두 눈에는 생리적인 눈물이 고여 뺨을 타고 흘렀다.

“살려 줘…….”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누군가 끌어안아 주었다.

“황녀님…….”

“유모? 유모야?”

“네. 황녀님. 저예요.”

“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온통 검은색이야, 유모. 나 무서워.”

암흑뿐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내가 기억하는 소설 속의 사랑받는 황녀인 율리아가 이런 일을 겪었다는 말은 서술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끌어안고 숨죽여 흐느끼는 유모의 옷을 꽉 붙잡을 뿐이었다.

“……유모, 울지 마.”

그래도 나를 위해 울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제가…… 황녀님께 해 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죄송해요…….”

“황명인 걸 어쩌겠어…….”

그래도 서서히 눈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줄어들더니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도 앞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세상의 모든 빛이 나를 거부하는 감각이 거북했다.

“근데 나 앞이 안 보여.”

“우리 황녀님 어떡해…….”

“이제 아프지는 않은데……. 왜 아직도 앞이 안 보이지?”

그저 유모에게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유모의 품에 폭 안겨 그 따뜻함에 그나마 안정감을 찾아 가고 있었다.

그때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어떤 사람들이 내 팔을 붙잡는 감각이 느껴졌다.

“황녀님!”

유모에게서 강제로 떨어진 나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향했다.

따사로운 햇살의 감각이 피부 위로 느껴져 바깥으로 나왔음을 깨달았다.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실내로 들어갔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 건지는 몰랐다.

“율리아.”

끌려가서 사람들의 손에 놓여났을 때 들린 목소리로 깨달았다.

나는 황제에게 와 있었다.

“이제 네 엄마를 닮았구나.”

그 말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 무엇도 볼 수 없는 눈과 동시에 급격히 다정해진 아빠.

그날 이후 아빠는 매일 내 궁에 시녀들을 보내 나를 데리고 집무실에 오게 해 놓고, 소파에 앉혀 놓았다. 내가 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인형처럼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시선은 늘 어디로 향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앞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빠는 가끔 나를 무릎 위에 앉히고 내 머리카락을 빗겨 주기도 했다.

이 모든 게 기괴했다.

“…….”

하지만 안약을 넣는 횟수가 증가할수록 내성이 생긴 건지, 아니면 익숙해진 건지.

차츰 깜깜하던 눈앞에 서서히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차라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가 나았다.

빛과 함께 보인 사람들의 얼굴에는 동정과 연민 어린 시선들과 귀찮다는 의무감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아빠는 애정 어린 딸을 보는 게 아니라 내 얼굴에서 다른 이를 찾고 있었다.

“하아…….”

조용히 정원 흙바닥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볼 때 처음으로 오빠가 정원에 나온 게 보였다.

그래서 용기를 내 오빠한테 다가갔다.

“제발…… 도와줘.”

내 힘으로는 이 기괴함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살고 싶었다. 아니, 살아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사랑은 받았으나 비운의 결말을 맞이하는 엑스트라 황녀의 유년 시절이 참담한 건 소설 그 어디에도 없었던 내용이었다.

“오빠.”

내 부름에 오빠는 내 쪽에 시선을 주었다.

오빠는 예전과 크게 다를 것 없이 나를 여동생으로 여겨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오랜만에 보는 만큼 반갑게 인사해 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에 불과했다.

“오빠……. 오빠는 나 도와줄 수 있잖아…….”

시리도록 매섭고 차가운 보랏빛 눈동자만이 나를 아무 말 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오빠의 눈빛은 여동생이 아닌 남을 대할 때처럼 무척이나 차가웠다.

저절로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파들거리는 팔로 오빠의 바짓단을 붙잡았지만 용기를 내어 요청한 도움은 쉬이 짓밟혔다.

“도와…… 달라고 해서 미안해…….”

결국 오빠의 바짓단을 놓고 애써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울음을 삼켰다.

오빠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겨 내게서 멀어져 갔다. 나도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가 이곳에서 있을 곳이라곤 없었다. 혼자였다. 외로웠다.

그나마 의지가 되는 사람은 유모뿐이었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차라리 죽어 다시 환생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내게 주어진 운명은 암울했다.

“보고…… 싶어요.”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 홀로 쭈그려 앉아, 무릎을 모으고 얼굴을 그 위에 파묻었다.

최근 들어 전생의 그 따뜻함이 그리워졌다.

엄마 아빠가 따뜻한 애정만을 내게 한없이 내어 주던 그 행복하던 순간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 차가움과 외로움, 그리고 고독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아무도 없어……. 혼자는 싫은데…….”

차라리 죽어 버리면 다시 사랑받는 자식으로 환생할 수 있을까.

“나…… 어떻게 해야 해……?”

결국 나는 황성을 탈출했다. 예전에 눈이 돌아오며 봐 뒀던 개구멍을 통해 바깥으로 나갔다.

이대로 영영 떠나, 사라지고 싶었다. 죽는다고 해도 괜찮았다. 살아 있는 것도 지옥이었으니까.

단지 나의 부재가 알려지면 누군가 조금이라도 슬퍼할까 싶어서, 황성에서 벗어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