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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83화 (83/141)

#83화

잠든 율리아의 모습을 한참이나 두 눈에 담았다.

날이 밝으면 그녀가 스스로 문을 열어 주기 전까지는 볼 수 없을 테니까. 씁쓸함이 입 안에 감돌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

차갑게 얼어붙지 않은, 부드럽고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이었다.

“율리아.”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 입을 맞췄다. 입술 위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좋은 꿈 꾸세요.”

악몽 같은 걸 꾸면서 괴로움에 사무치지 말고. 당신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워서.

그녀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침대 바로 옆에 놓인 탁자에 선물과 꽃을 올려 두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등을 굳게 닫힌 문에 기대었다.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이 다시 마음을 열어 줄 때까지.

* * *

초상화를 갈기갈기 찢어 놓고서 내가 뛰어 들어온 곳은 체스터와 함께 쓰는 침실이었다.

그를 사랑한 걸 후회한다면서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곳으로 들어왔다.

“바보 같아.”

그에게 모든 것을 잃었으면서 끝끝내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를 보고 싶어 한 내가 어리석어 보였다.

내 가족을 전부 죽이고, 나를 키워 준 유모마저도 내 앞에서 죽인 사람인데 왜 나는 마지막 순간에도 그를 한 번 더 보고 싶어 했는지.

후회할 거라고 외쳤는데도 불구하고, 왜 후회는 체스터가 아닌 내가 하는 건지.

“……울지 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사실 체스터가 나를 죽게 만든 삶보다 더 아픈 건 이번 생에도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게 더 내 심장을 아프게 만들었다.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나는 변함없이 어리석을 만큼 또다시 그를 온 힘을 다해 사랑했고, 그는 이번에도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전에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차갑고 시린 경멸 어린 눈빛으로 알려 주었다.

하지만 이번 생엔 내게 다정하게 웃어 주며 따뜻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런데 그의 애정 어린 눈빛이 전부 거짓이었다는 걸 알고 나니 괴로웠다.

두 눈에서는 뜨거운 액체가 제멋대로 흘러나와 뺨을 타고 흘렀다.

“울어도 아무 소용없잖아…….”

손등으로 뺨을 적시는 눈물을 닦아 냈다.

눈물이 닿은 손에서 따가움이 느껴져 시선을 내렸다. 그제야 손이 심각할 정도로 다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에 박힌 유리 조각들에 시선이 쏠렸다.

조심스럽게 그 조각들을 뽑아내자 피가 새어 나오며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아파…….”

손에서 느껴지는 고통보다 심장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더 컸다.

피가 울컥거리며 뿜어져 나오는 건 손인데, 왜 마음이 이렇게 아픈 걸까. 심장은 멀쩡하게 뛰는데 왜 뜯기는 고통이 일렁이는지.

생각보다 나는 체스터를 많이 사랑했었나 보다.

서러움에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줄줄이 새어 나왔다.

“다…… 거짓말이었어.”

나를 온전히 사랑해 줄 사람은 세상에 없던 거였다.

내 결말을 알고 있으면서, 어리석게도 부질없는 희망을 바랐다.

그가 내게 주는 애정이 너무 달콤하고 따뜻해서 그 향에 취하고 싶었다.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무지함도 죄였다.

“…….”

그런데 왜 나는 그를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그가 밉고, 나를 속인 게 괘씸하고, 그를 사랑한 것도 후회하는데. 대체 왜 나는 그를 벗어나지 못하는 건지.

지금 당장 공작저를 박차고 나가도 되는데. 그리고 왜 하필 수많은 방 중에서도 나는 본능적으로 이곳으로 온 건지.

왜 나는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방에 들어와 문을 굳게 걸어 잠근 건지.

“당신을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사실 알고 있었으면서. 처음부터 체스터가 얼마나 차갑고 감정이 없는 사람인지 알고 있었으면서.

그렇게 밀어내고 도망쳤으면서. 끝까지 그랬어야 했는데.

그가 하는 모든 말들이 수없이 달콤해서 그의 말과 행동에 현혹되어 또다시 사랑하게 되었다.

“당신을 이젠 사랑하지 않을 거야.”

다짐과는 다르게 심장은 아직도 그를 향해 뛰고 있었다.

쉽게 잊힐 감정이 아니었다. 내가 마음을 먹는다고 바로 변할 감정이었다면 이리 아플 리도 없을 테니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방 밖으로 나가려 움직이는 순간, 바깥에서 잠긴 문을 열려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와 다름없이 내 이름을 부르는 다정한 음성. 왜 알 수 없는 울컥임이 심장에서부터 올라오는 건지.

“……율리아?”

체스터가 돌아왔다.

그는 문까지 두드렸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내 발소리가 멀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멍청이.”

고작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 심장이 팔딱거리며 반응했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제멋대로 반응하는 내 심장이 원망스러웠다.

결국 방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나갔다가 그를 마주치면 모든 게 무너질 것만 같아서.

전전생의 나처럼 비참하기 짝이 없도록 울며 그에게 애정을 구걸할 것 같아서.

나는 나를 이 방 안에 가두는 선택을 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체스터가 어떻게 행동할지 알고 싶었다. 전전생처럼 다시 차갑게 변할지, 아니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행동할지.

“율리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내 이름이 나직하게 들려왔다.

바보 같은 심장이 제멋대로 쿵쿵거리며 체스터의 목소리에 격한 반응을 일으켰다.

“율리아……. 제발 대답이라도 해 주세요…….”

간절하게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에 또다시 홀라당 넘어갈 뻔했다.

진심일 리가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감정이라는 건 참 야속했다.

그를 사랑했던 감정은 쉬이 지워지지 않은 채 지금의 나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율리아…….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상처는 치료하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안에서 울컥이는 감정이 새어 나오며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왜 목소리는 나를 걱정하는 것 같냐고.

전부 다 위선이면서,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내가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알면서 저런 목소리로 말하는 게 괴로웠다.

그래서 새어 나오는 감정을 힘겹게 억누른 채 문밖으로 소리쳤다.

“필요 없어요.”

“율리아…….”

“혼자 있고 싶어요.”

“율리아, 전부 오해입니다…….”

“오해?”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게 무너져 내렸다.

체스터는 내가 봤던 그 모든 편지의 내용을 오해라고 주장했다.

오해할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누가 봐도 명백히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주는데.

그런데도 당장에라도 이 문을 열고 나가서 뻔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그의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럼 또다시 나는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하는 셈이니까.

“무슨 오해? 제가 오해할 만한 게 있어요? 두 눈으로 전부 봤는데?”

“율리아, 일단 얼굴이라도 보면서…….”

“거짓말쟁이!”

감정이 격해지며 무의식적으로 언성이 높아졌다.

생각해 보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그의 진심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처음부터 나를 이용한 게 아닌가. 내게 결혼하자고 강요했던 것도 전부 정치적으로 내가 필요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날 사랑한다고 했으면서……. 전부 거짓말이었던 거잖아요! 난, 나는…… 거짓말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게 좋아서…….”

“율리아…….”

“바보같이……. 당신은 그냥 나를 이용하려고 한 건 줄도 모르고…….”

말을 하면서 감정이 북받쳤다. 그래서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심장이 아팠다.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더는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이젠 그를 믿을 수가 없었다.

또다시 그가 나를 기만할까 봐. 무섭고 두려웠다. 그가 주는 거짓된 애정에 취해 정신 못 차리고 안기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전부 믿을 수 없으니까.”

이보다 못된 말들을 그에게 퍼붓고 싶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그를 사랑하는 중이어서 모진 말들이 쉬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고르고 골라서 뱉어 낸 말이었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체스터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더는 방 앞에 없다는 걸 인식하자 다리에 힘이 풀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흐윽, 끅…….”

참아 왔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손으로 입술을 틀어막고 눈물만을 쏟아 냈다. 괴롭고, 아프고, 서러웠다. 감정의 기복이 예전만큼이나 심해졌다.

애꿎은 이불만을 쥐어뜯었다.

피가 아직도 쏟아지는 손은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전혀 문제가 없는 심장이 아팠다.

심장을 칼로 난도질을 당하면 이런 고통을 느낄까.

“마님.”

저 호칭이 이제는 익숙하게 들리는데, 체스터와의 관계는 훨씬 더 멀어져 있었다.

돌이킬 수도 없고, 돌이키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환생을 거듭했으니 알 수 있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단지 그가 이번 생에 나를 죽이지 않은 것은 그에게 거슬리고 귀찮게 구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전전생도 이번 생도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비참한 사실은 전전생과 마찬가지로 괴로웠으니까.

“마님, 주치의입니다. 공작 각하께서 보냈습니다.”

“…….”

나를 걱정했던 것도,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였던 것도 전부 꾸며진 모습이었다.

그의 다정한 웃음도, 상냥한 행동도, 따뜻한 말도, 달콤한 애정도 전부 가짜였다.

내가 황녀가 아니었더라면 주어지지 않았을 사랑이라 착각한 기쁨이었다.

“공작 각하께서 많이 걱정하십니다. 손을 다치셨다고…….”

“필요 없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주치의에게 차갑게 말했다.

나는 죽어서도 깨닫지 못했다. 그를 사랑한다는 게 내게 얼마나 독을 삼키는 행위와 다름없었는지.

죽는 그 순간에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다짐이 아닌, 다시 만나고 싶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품었는지.

내게 있어 사랑한다는 감정은 달콤한 맹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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