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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82화 (82/141)

#82화

어질러진 집무실을 깨끗하게 치웠다.

차마 찢겨 나간 그녀의 얼굴을 버릴 수는 없었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어 붙였다.

그때 누군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주치의였다. 벌써 치료를 끝내고 온 건 아닐 테고. 정말 율리아는 그 누구도 방 안에 들일 생각이 없는 건가.

“각하, 그것이…….”

“됐다. 그냥 놔둬도 된다. 그만 돌아가도 좋다.”

“네, 각하…….”

주치의는 방 밖으로 나갔다. 의자에 털썩 앉았다. 율리아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바로 율리아가 있는 곳으로 갈 수가 없었다.

두 시간 정도는 이곳에 있다가 찾아가는 게 좋겠지.

“후……. 율리아.”

불안했다. 혹시 율리아도 나처럼 기억을 가진 건지.

아니, 알고 있더라도 괜찮았다. 내가 회귀 전 기억을 가졌다는 사실만 들키지 않는다면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으니까.

아직은 돌이킬 수 있었다. 다시 작고 연약한 그녀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당신을 죽게 두지 않을 테니까. 내게 주어진 이 기회를 나는 놓치지 않을 테니까.

“당신을 지킬 겁니다.”

세상의 모든 위협을 모두 차단한 안전한 새장 속에 당신을 가두고, 나만 바라볼 수 있도록.

다시 햇살처럼 제게 웃어 주는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그 미소가 너무나도 따뜻하고 아름다워서, 새까만 어둠 속 유일한 빛과도 같아서 탐났고 독점하고 싶었다.

“주인님.”

집사의 목소리였다. 율리아에게 줄 선물 준비가 다 끝난 걸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래. 선물 포장이 끝났나?”

“꽃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열쇠입니다.”

열쇠를 건네받았다. 당장 문을 따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율리아가 스스로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니까.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래. 전부 부인이 좋아하겠지?”

“……마님께서 음식을 먹기는커녕 문도 열지 않으셨습니다.”

“안…… 먹었다고?”

“네. 문도 열지 않으셨습니다.”

다급하게 율리아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뗐다.

정말 음식들이 그대로였다. 조금도 줄어 있지 않았다.

“……율리아.”

불안하고 걱정됐다. 그녀가 식사를 거른 적은 없었는데……. 밥까지 거르는 걸 보면 아주 많이 화가 난 게 분명했다.

아직은 돌이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불가능일까.

아니, 돌이킬 수 없다 해도 무조건 돌이켜야만 했다. 이제는 그녀가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가 없으니까.

“율리아, 제발 문을 열어 주세요.”

“꼴도 보기 싫다고 했잖아요.”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율리아, 제발 문 좀 열어 주세요.”

이깟 문 정도야 조금만 힘을 줘도 부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한다면 오히려 그녀의 분노를 살 것이 뻔했다.

그래서 불쌍한 개새끼처럼 빌빌거리며 애원했다.

“율리아, 미안합니다. 제가 전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문 좀 열어 주세요. 얼굴 보고…….”

“당신이 싫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율리아. 제가 전부 잘못했습니다, 제발 문 좀 열어 주세요.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이 보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말이 칼날처럼 변해 심장을 후벼 팠다. 나를 보고 싶지 않다는 그 말이 왜 이렇게 아픈 건지.

괴로웠다.

“제발, 제발…… 문 좀 열어 주세요.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율리아.”

“…….”

“당신 다쳤잖아요. 왜 치료도 거부하는 겁니까.”

“당신을 믿지 못하겠어요.”

심장이 쿵 떨어졌다. 나를 믿지 못한다는 말이 왜 이렇게나 아프게 들리는 건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건지.

“율리아,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만큼은 진심입니다.”

“…….”

“음식은 새로 가져올 테니까…… 그건 꼭 먹어요.”

걱정됐다. 저번에도 한 번 쓰러졌는데, 끼니를 거르다가 몸이 허약해져서 또다시 쓰러지면 어떡하나.

“당신이 쓰러질까 걱정됩니다. 그러니 다시 가져오는 음식은 꼭 먹어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식어 버린 음식을 가지고 내려갔다.

다시 따뜻한 음식으로 바꾸고, 그녀가 있는 방 앞으로 갔다. 마음 같아서는 안에 놓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혹시 내가 막무가내로 거리를 좁히면 그녀가 내게서 등을 돌리며 달아날까 봐.

그게 두려웠다.

“율리아, 방 앞에 놓겠습니다. 밥은 거르지 마세요.”

딱히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으니, 음식을 방문 앞에 내려놓고 집무실로 돌아갔다.

일이나 하려 했지만, 쉽사리 손에 잡히질 않았다.

결국 일은 하지 않고 고민 끝에, 소독약과 집게 그리고 붕대와 거즈를 가지고 그녀가 있는 방 앞으로 왔다.

아마도 이 시간이면 잠들어 있을 테니까.

율리아는 생각보다 잠이 많아서 일찍 잠들었으니, 지금이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게 분명했다.

“…….”

받아 두었던 열쇠로 방문을 따고 들어갔다. 다행히 율리아는 예상대로 잠들어 있었다.

저절로 시선이 향한 그녀의 오른손은 피투성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일단 그녀의 눈 위에 손을 휘저어 깊은 잠에 빠졌는지부터 확인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일단 손에 박힌 유리 파편들부터 제거했다.

전등으로 불빛을 비추어 그녀의 손에 박힌 남은 파편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소독약을 적신 솜으로 상처를 소독했다.

“하아…….”

생각보다 많이 다쳤다. 헛된 기대감이라도 해도 좋으니 많이 다치지 않았으면 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상처가 심각했다.

마음이 쓰렸다. 여린 그녀의 손이 이런 피투성이가 되었다는 게 마음이 아팠다.

깨끗한 거즈로 그녀의 손을 감싼 후, 붕대를 깔끔하게 감아 주었다.

“율리아, 다치지 마세요.”

엎어진 그녀의 몸을 제대로 눕혀 주고,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 올려 덮어 주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건드렸다.

다행히 차갑지도 딱딱하지도 않고 따뜻하고 말랑말랑했다. 죽은 그녀가 아니라 살아 있는 그녀였다.

“울었습니까.”

율리아의 눈 밑은 붉어져 있었고, 뺨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울다 지쳐 잠든 건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 자국을 지워 주었다. 이렇게 여린 사람인데.

“당신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이겠죠.”

제가 당신을 사랑하더라도, 당신의 신분과 제 신분이 이런 이상. 그리고 남들의 눈에는 접점이 없었기에 더더욱 그리 생각했겠죠.

하지만 저는 당신을 단 한 번도…… 정치적으로 이용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도구가 되지 않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안전한 이곳에 가두고, 좋은 것과 깨끗한 것 그리고 아름다운 것들만 볼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는데.

“결국…… 저는 당신을 지키지 못했네요.”

정치적인 이유보다 당신을 사랑하는 감정이 더 앞섰던 건데, 남들의 시선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다분할 뿐이니까.

당신이 황녀가 아니었더라면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았을까.

내게는 독이 통하지 않았으니까. 내 잔에도 독이 있던 걸 보면 나와 당신 모두를 죽일 생각이었는데, 결국 위독해진 건 당신 하나여서.

눈앞에서 피를 토하며 미약하게 내가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시선에 마음이 아팠다.

“사랑합니다, 율리아.”

배후가 누구인지는 알겠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었다.

심증만이 존재할 뿐이어서, 당신을 아프게 만들었던 이를 잡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블레어 공작 가문. 친우의 가문인 동시에, 거대한 반대 세력.

아마도 차에 독을 탄 하녀의 배후는 블레어 공작 부부겠지. 이드리안도 엮여 있을지는 확신이 없었다.

“살려 줘…….”

잠꼬대인지. 아니면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지.

율리아는 가냘픈 목소리로 살려 달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악몽이라도 꾸는 걸까.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은은한 달빛에 그녀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제발…… 도와줘.”

율리아는 지금 울고 있었다. 왜 잠들었으면서 이리 애처롭게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눈물까지 보이는 건지.

심장이 욱신거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괴로웠다.

여기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고는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 주는 것뿐이었다.

“왜 웁니까. 당신이 울면 제 마음이 아픕니다.”

허리를 숙여 그녀의 심장 부근으로 귀를 가까이 기울였다. 안정적으로 뛰는 그녀의 심장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녀의 심장은 멈추지 않고 안정적으로 뛰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았다. 입고 있는 옷 사이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은 차가운 그때의 감촉과는 완전히 달랐다.

율리아는 살아 있었다. 그러니 안심해도 되는데, 왜 이렇게 심장이 진정되질 않는지.

불안했다. 이 따뜻한 온기를 다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를까 봐. 찬란한 그녀가 내 곁을 떠날까 두려운 거였다.

“……이번에도 먼저 다가온 건 당신입니다.”

회귀 전에는 그 기회를 놓쳤지만, 이번에 주어진 기회는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당신을 놓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율리아.

붕대로 감긴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등에 살포시 입술을 파묻었다.

말랑한 감촉과 동시에 코끝에 닿는 비릿한 피 냄새.

“당신이 먼저 다가왔으니, 끝까지 책임져 주세요.”

율리아의 손바닥에도 입을 맞췄다. 간절하게 그녀를 원했다.

당신이 곁에 있는 게 자연스러운 삶을 알려 주었으니, 그 달콤하고 아늑한 감각을 앗아 가려 하지 마세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그만큼…….

“이제는 당신 없이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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