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각하!”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몸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제야 모든 게 떠올랐다. 뜨겁고 울컥이는 감각이 안에서부터 끓어올랐지만, 다행히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단지 손이 눈에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떨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마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 어지러움은 율리아를 봐야 해소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뭔가 집 안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제일 먼저 침실로 향했다. 문을 열려고 했지만, 안에서 잠갔는지 철컥이는 소리만 날 뿐 열리지 않았다.
“……율리아?”
방문을 두드리며 그녀를 불러 봤지만, 안에서는 대답은커녕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이깟 문 정도야 부수고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냥 율리아가 문을 잠그고 잠든 것뿐이라면? 그럼 괜히 그녀의 단잠을 깨우는 거였다.
일단 발걸음을 돌려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을 열어 본 순간 심장이 얼어붙으며 몸이 휘청거렸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
박살이 난 액자. 바닥에 흩어진 갈기갈기 찢긴 종이. 유리 파편. 그리고 파편 근처에 떨어진 혈흔.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인 편지들을 보는 순간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한 건지 알 수 있었으니까.
순간 회귀했을 때 기억을 잃을 수 있단 생각에 적어 두었지만, 회귀했다는 사실을 잊은 동시에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일기장이 떠올랐다.
다급히 서랍을 뒤지자, 다행히 이건 발견하지 못했던 건지 사람의 손길이 닿아 있지 않았다.
이건 꼭 태워야만 하는 물건이 되어 버렸다.
만약 이게 그녀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될 테니까.
“……당신을 놓아줄 생각 따위는 없으니까.”
이제 더는 그녀가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 내게 있어 심장과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일기장은 태우지 못한 채 서랍 속에 넣어 잠갔다.
조심스럽게 바닥에 떨어진 혈흔을 살폈다. 아마도 율리아의 혈흔인 것 같았다.
“하…….”
조심스럽게 혈흔이 묻은 유리 파편을 쥐었다. 얼마나 그녀가 아팠을지.
굳은살 하나 없는 여리고 보드라운 그 손에 생채기가 생기고 유리 파편이 박혀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시선을 초상화로 옮기자 내 얼굴은 멀쩡하게 있었다.
“왜?”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은 건 나였을 텐데. 왜 당신의 얼굴이 없는 겁니까, 율리아.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갈기갈기 찢긴 종잇조각의 모양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 누구보다 눈부시고 환하게 웃고 있는 율리아의 얼굴이 서서히 두 눈에 들어왔다.
햇살이었다. 햇빛 아래에서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활짝 핀 꽃처럼 웃는 그녀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에서 나와 다시 굳게 잠긴 침실로 향했다.
“율리아.”
문을 열심히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불안했다. 그래도 율리아가 이 방 안에 있다는 건 확실했다.
“율리아……. 제발 대답이라도 해 주세요…….”
두 번 다시 당신을 잃는 아픔을 느끼고 싶지 않습니다.
그때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었지만, 이제는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그 고통 위에 사랑하는 당신을 볼 수 없다는 것까지 더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야 살아 있는 당신과 함께할 수 있는데.
“율리아…….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상처는 치료하세요.”
문 쪽으로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미약하게 들렸다.
혹시나 문을 열어 줄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었으나, 이내 희망은 희망일 뿐이라고 상기시켜 주었다.
“필요 없어요.”
“율리아…….”
“혼자 있고 싶어요.”
“율리아, 전부 오해입니다…….”
“오해?”
날카로운 목소리. 그와 동시에 뒤섞여 들리는 건 간신히 눈물을 삼키고 있는 떨림이었다.
당장에라도 이깟 문 따위 부숴 버리고 그녀를 품에 꼭 안아 주고 싶었다.
“무슨 오해? 제가 오해할 만한 게 있어요? 두 눈으로 전부 봤는데?”
“율리아, 일단 얼굴이라도 보면서…….”
“거짓말쟁이!”
그녀의 말에 몸이 저절로 흠칫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녀는 믿지 않을 테니까.
“날 사랑한다고 했으면서……. 전부 거짓말이었던 거잖아요! 난, 나는…… 거짓말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게 좋아서…….”
“율리아…….”
“바보같이……. 당신은 그냥 나를 이용하려고 한 건 줄도 모르고…….”
그녀는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데. 율리아를 향한 이 감정이 거짓이었던 적이 없는데.
불신으로 가득한 그녀가 과연 이 말을 믿어 줄지.
“이제 꼴도 보기 싫어요!”
심장이 멎는 착각이 들었다.
당장에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의 체취를 맡고 안정을 취하고 싶었다.
그녀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고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만약 그리 행동한다면 율리아는 나를 싫어할 테니까.
“제가 잘못했습니다, 율리아…….”
나는 율리아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이게 회귀 전에 율리아가 느꼈을 고통이었을까. 사랑하는 이가 나를 봐 주지 않는 아픔의 크기를 이렇게 깨달았다.
내가 회귀 전에 했던 행동들을 고스란히 돌려받고 나서야.
이렇게 당신이 괴로웠겠구나. 내가 당신에게 아주 많이 잔인하게 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가 전부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을 사랑한 것만큼은…….”
“듣고 싶지 않아요.”
“변명이 아닙니다, 율리아.”
“변명이든, 변명이 아니든, 상관없이 당신의 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전부 믿을 수 없으니까.”
몸이 휘청였다. 고작 이 정도의 말만을 듣는데도 심장이 뜯기는 고통을 느끼는데.
회귀하기 전 내가 차가운 말을 할 때마다 그녀의 고통은 얼마나 참담했을지. 이보다도 더 아팠겠지.
‘너는 반드시 후회할 거야.’
왜 그 말이 여기서 다시 떠오르는 건지. 아니면 그 저주가 회귀한 지금에도 적용이 되는 건가.
문에서 떨어졌다. 아마도 율리아는 내가 여기에 있는 이상 절대로 문을 열지 않을 테니까.
아래로 내려가 주치의에게 율리아의 상태를 확인하고 오라 했다.
아마 율리아는 지금껏 아무것도 안 먹었을 게 분명하니 음식이라도 올려 보내야겠지.
“……하.”
비참했다. 그녀가 내 품속에 안기던 그 따스함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품 안에 쏙 들어오던 그 감촉이 아직도 선명했다. 말랑거리고 따뜻한 체온. 그리고 뜨거운 숨결이 그리웠다.
그녀의 달콤한 체취가 아직도 코끝에서 어른거렸다.
다시는 그 감각을 느낄 수가 없을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주인님?”
“부인이 많이 화났어. 평소 부인이 잘 먹는 음식 위주로 준비하고……. 내가 직접 가지고 갈 테니, 그리 준비해 둬.”
“네.”
집사장에게 말했으니 금방 준비해 두겠지.
“……집사, 어떻게 해야 부인이 화를 풀지?”
“보석상이라도 부를까요?”
“그래. 일단 부르고……. 꽃도 준비하는 게 좋겠군.”
“네, 주인님.”
일단 선물 공세를 하면 화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지 않을까.
그 정도의 오해는 풀어 낼 수 있으니까. 율리아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치적인 도구보다는 내 마음이 더 컸으니까.
남들은 정치적 이유로 그녀에게 구애했다 착각하더라도, 율리아만큼은 내 진심을 알아주길 원했다.
“저…… 각하.”
“아, 부인의 상태는 어떠하지?”
다가온 주치의에게 율리아의 상태를 확인해 보려고 했다.
“그것이…… 부인께서 진찰 자체를 거부하십니다.”
“…….”
“방문 자체를 열어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 되었다.”
생각보다 많이 화가 난 것 같았다. 과연 율리아가 방문이나 열어 주긴 할까 이젠 불안했다.
주치의를 물리고, 집사가 준비한 율리아가 먹을 음식을 가지고 침실 앞으로 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율리아.”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녀가 걱정됐다.
“음식은 두고 가겠습니다. 거르지 마세요.”
“…….”
“그리고 다시 주치의를 보낼 테니, 이번에는 꼭 치료받으세요. 피가 떨어져 있을 정도면 많이 다친 거잖아요.”
“신경 쓰지 마요.”
“어떻게 신경을 안 쓰겠습니까.”
“제가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인데요?”
다시는 그녀의 죽음을 눈에 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죽음은 한 번으로 족했으니까.
두 번 다시는 그녀를 잃을 생각이 없었다.
“상관 있습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
“일단 음식은 두고 갈 테니 먹어요.”
가지고 온 음식을 두고 내려갔다. 마음만 먹으면 문 정도는 가볍게 부술 수 있었지만, 그래서는 안 되니까.
주치의에게 다시 한번 가 보라고 전했다. 계속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면 그녀가 잘 때라도 들어가서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의 살아 있음을 보고 느끼고 싶었다. 숨을 쉬고는 있는지, 심장이 제대로 뛰고 있는지.
그래야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주인님, 보석상이 도착했습니다.”
“그래. 인기가 많은 건 전부 구매해서 예쁘게 포장하라 일러 둬.”
“네.”
“아, 그리고 집사. 침실의 열쇠 가지고 있나.”
“네, 그것도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그래.”
아직도 그때의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선명했다.
원래 죽으면 그리되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녀는 기괴할 정도로 물속에 오래 있었음에도 조금도 부패하지 않았다.
조금만 힘을 주면 그대로 부서지던 연약한 몸. 그리고 그녀의 시신은 물에서 건져 실내로 옮기자마자 부패하기 시작했다.
썩어 문드러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기 전에 그녀의 망령이 내게 속삭였던 말을 들어 주며, 그녀와 함께 불 속에서 재가 되었다.
홀렸거나 미쳤었다. 알고 있었다. 나조차도 내가 제정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살아 있는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지금 후회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