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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80화 (80/141)

#80화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막사 안이었다.

시끄러운 소리. 훨씬 작은 손. 옆에 놓인 검. 주변을 둘러보자 여기가 어디인지는 금방 깨달았다.

전장 안이었다. 바깥으로 나가 물이 있는 곳으로 가 얼굴을 확인했다.

“……과거로 돌아온 건가.”

수면 위에 비친 내 얼굴은 1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그렇다면 머지않아 제국으로 귀환한다.

아직 어리고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에 내 세력은 부족했다. 그러니 좀 더 빠르게 세력을 키워야만 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그녀가 전처럼 활짝 웃으며 내게 온다면 그때는 전과 다르게 안아 줘야지.

품에 안고,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심장이 뛰고 있는지 확인하며 그녀가 살아 있음을 깨닫고 싶었다.

살아 있는 그녀의 소중함을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율리아.”

전쟁이 끝나고 귀환하자마자 가주 자리를 노렸던 이들을 전부 숙청했다.

그리고 동시에 황녀에 대한 정보를 조사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사교계에 나타나기를 즐겼던 그녀는 황성에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어, 정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이런 사소한 것 하나 알 수가 없었다.

이상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보고서가 전부인가?”

“네. 각하.”

아직 세력이 약했기에 다시 한번 더 전쟁에 참전해야 했다.

전쟁이 두렵진 않았다. 단지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것도 그녀와 관련해서.

이렇게 황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리가 없었다. 무언가 바뀌지 않은 이상.

“데뷔당트도…… 없었다라.”

참석한 적은 없었지만, 분명 황녀의 데뷔당트는 무척 성대하고 화려하게 치러졌었다.

하지만 부하가 올린 보고서에 의하면 황녀의 데뷔당트는 열리지 않았다. 황녀에 대해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뭔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데뷔당트는커녕, 건국제나 신년제에도 황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존재하는지 의심될 정도라는 게 기이했다.

황녀는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윽……!”

머리가 지끈거렸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기가 무섭게 두통이 멎으며 중요한 뭔가를 잊은 기분이었다.

황녀에 대한 보고서가 왜 여기 있지? 왜 이걸 조사하라고 명령한 거지?

* * *

다시 금발의 소녀를 찾으려고 했다. 전쟁에서 돌아오고 클로이 후작을 만났다.

여식의 생일 파티가 있다는 핑계로 어느 가문이 이쪽 세력인지 확인하라며 권유했기에 마지못해 남았다.

한편으론 혹시 클로이 후작 영애의 생일 파티에서 내가 찾는 그 금발의 소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또다시 알 수 없는 두통이 찾아왔다.

테라스에서 머리를 식히는 중에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으응…….”

어두운 하늘에도 불구하고 홀로 빛나는 사람이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은빛 머리카락과 풍성한 속눈썹 사이에 있는 자수정을 박아 넣은 듯한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

맑고 투명한 피부와 꼭 천사를 연상시키는 순한 이목구비.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니 그녀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어……?”

그녀의 손에 들린 와인 잔에 담겨 있던 차가운 액체가 가슴팍을 적셨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알 수 없는 두통이 멎었으니까.

금발의 소녀만큼이나 나를 괴롭히던 극심한 원인 모를 두통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 어떡해……. 젖었는데…….”

“괜찮습니다.”

“하, 하지만…….”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그녀에게서는 술 냄새가 났다.

그녀는 놀란 듯 눈은 분명 동그랗게 뜨고 있지만,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는 걸 보니 취한 듯싶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무조건 붙잡아야 한다고 본능이 외쳤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싸더니 꽃처럼 활짝 미소를 지었다.

“와아……. 잘생겼다!”

“……흐응, 제가 잘생겼습니까?”

타인의 손이 맨살에 닿았음에도 딱히 불쾌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왜 이 여자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는 게 기분이 좋은 건지.

입꼬리가 제멋대로 올라갔다. 잘생겼다는 말이 좋은 게 아니라 그 말이 이 여자한테서 나왔다는 게 기분이 좋았다.

아주 찰나였지만 입술에 말랑한 무언가가 닿았다가 떨어졌다.

“…….”

“싫……어요?”

먼저 저지른 사람이, 저지르고 나서 의사를 물으면 어쩌자는 건지.

다른 사람과 닿는 건 극도로 싫었지만, 왜인지 이 여자와 닿는 건 거북함은커녕 조금의 혐오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좀 더 닿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하게 안에서 꿈틀거렸다.

“싫을 리 있겠습니까.”

그녀의 턱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감싸 쥐고 고개를 숙여 입술을 겹쳤다.

닿은 입술에서 와인 맛이 났다. 말랑한 입술을 비집고 뜨거운 숨이 모인 그녀의 안에 혀를 집어넣었다.

좀 더 그녀를 원했다.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내게로 넘어왔다.

그녀는 내 목을 껴안고 있었지만, 숨이 막히는지 귀엽게도 몸을 떨었다.

단단하게 허리를 팔로 감싸고 계속 뒤로 내빼는 그녀의 혀를 붙잡아 휘감았다. 꼼지락대는 그녀의 손가락이 귀여웠다.

더는 숨을 참기가 버거운지 밀어내기 위해 끙끙거리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흐으…….”

“데려다드리겠습니다, 황녀님.”

찬란한 은빛 머리카락과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는 황족의 상징과 다름없으니, 이 여자가 그 두문불출한 황녀겠지.

공식 석상은 고사하고 사교계에는 거의 참석도 하지 않는다는 황녀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일단 이렇게 취한 상태로 있는 그녀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황성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그녀는 내 허리를 와락 껴안으며 웅얼거렸다.

“같이 있고 싶어요.”

“……그게 무슨 의미인 줄 알고 하는 소리이십니까.”

“알아요.”

골치 아파졌다. 전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으니까.

저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데. 이러는 게 이 황녀님의 주사인 건가. 일단 황성으로 돌려보내고, 내일 아침에 찾아가는 게 좋겠지.

“당신은 따뜻해요.”

“…….”

“혼자는 싫어요. 혼자 두지 마요…….”

일단 황성으로 돌려보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럼 우선 내 집으로 데려가 재우든가 해야겠다.

“함께 있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여기서 나가죠.”

“……좋아요!”

무슨 웃는 얼굴이 이렇게 예쁘면서도 애처로워 보이는지.

들끓는 알 수 없는 감정을 속으로 꾹 누른 채, 그녀에게 겉옷을 벗어 주었다.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은 너무나도 눈에 띄니까.

“답답해도 마차까지만 참으세요.”

“네!”

그녀를 데리고 마차에 탔다. 나오는 길에 사람을 마주친 적은 없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하지만 마차에 올라탄 그녀는 내게서 떨어질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하아, 황녀님.”

“당신한테서 그리운 느낌이 들어요.”

황녀님은 갑자기 내 무릎 위로 올라앉았다.

“이유는 몰라요. 그냥 당신한테서 그리운 감정이 느껴져요.”

“읏!”

그녀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나는 지금 고역이었다. 착한 생각을 해야 하는데 계속 불순함이 머릿속을 집어삼키려 했다.

그래서 슬픈 생각을 해 보려 했지만, 전혀 집중되지 않았다. 모든 피가 하반신에 쏠리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황녀님……. 이러시면 많이 곤란합니다.”

“왜 곤란해요?”

황녀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을 한 채 반짝거리는 순수한 눈을 깜빡였다.

저런 눈빛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어떻게 지금 내 시커먼 욕망이 끓어오르고 있다는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내가 지금 참고 있다는 걸 모르는지 이 순진한 황녀님은 내게 또다시 입술을 겹쳐 왔다.

이렇게 먼저 자극하고 유혹하면 못 참는데.

결국 졌다. 무참히 패배했다. 이 순진한 황녀님은 내가 본능에 충실했던 인간이었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그녀의 입술을 벌려 그 안에 혀를 밀어 넣었다. 달콤한 과일을 머금은 듯 달달한 과일 향이 입 안 가득 퍼져 나갔다.

“흐읍!”

유혹은 먼저 해 놓고서 자신이 더 버거워하면 어쩌나.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바들바들 떠는 그녀의 손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마차가 멈추는 게 느껴졌다. 아마 도착한 거겠지. 아주 순진한 얼굴을 한 황녀님을 겉옷으로 감싸고 가볍게 안아 들었다.

무슨 사람이 이렇게 가벼운지.

그녀는 뭐가 좋다고 내 목을 꽉 껴안고 이리도 환하게 웃는 건지. 이제 곧 울릴 생각인데.

“당신은 따뜻해요.”

“…….”

이 순진한 황녀님은 지금 자기가 어떤 말을 한 건지, 어떤 행동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

왜 이 얼굴을 보면 소유욕이 안에서 들끓는 건지.

옷 위로 선명하게 느껴지는 말랑거리는 감촉과 따뜻한 그녀의 체온에 온몸의 피가 아래로 몰렸다.

일단 이 황녀님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침실을 내어 주었다. 함께 밤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그냥 나가려고 했다.

“왜 나가요?”

“…….”

“같이 있어 줘요. 같이 있어 주겠다고 했잖아요.”

“……같이 있으면 못 참을 것 같아서요.”

“혼자는 싫어요…….”

그녀는 지금 내 소매를 아주 약한 힘으로 붙잡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마음만 먹으면 뿌리치고 그냥 방 밖으로 나갈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는 건 빌어먹을 욕정 때문이었다.

“참지 않아도 돼요.”

이 순진한 황녀님은 지금 내가 무엇을 인내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지. 그러니 저리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저런 위험한 말을 하는 거고.

분명 나는 손을 뿌리치려 했는데, 정신을 차리니 숨결이 닿을 정도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그 참지 않아도 된다는 말. 무슨 뜻으로 한 겁니까.”

그녀는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을 말 대신 행동으로 보였다. 나를 잡아당기더니 그대로 내게 입을 맞췄다.

말랑거리는 입술의 감촉이 선명하게 닿았다. 이 감촉은 이성이 흐려지게 만들었다.

“……지금부터는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으응…….”

“그만하라고 애원해도, 멈출 생각 없습니다.”

이건 내가 그녀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하기 전이니 여기서 그녀가 싫다고 한다면 멈출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 순진무구해 보이는 황녀님은 나를 거부하지 않았다.

“하……. 아프면 말해요. 그렇다고 멈추지는 않을 겁니다.”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고 이를 세워 선명한 잇자국을 새겼다.

그러자 그녀의 조그마한 입에서는 뜨거운 숨결과 함께 여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읏!”

“대신 천천히 살살 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 정도는 배려해 줄 수 있으니까.”

애초부터 먼저 유혹하고 날 자극한 건 당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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