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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79화 (79/141)

#79화

그녀는 황궁 호수에서부터 걸어서 여기까지 온 걸까.

“나 너무 추워…….”

등에 닿는 차가움과 떨리는 음성. 그리고 추위로 인해 달달 떨고 있는 창백한 손끝.

조금의 체온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망령이거나 혹은 잘 만들어 낸 허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홀린 듯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진 간절함과 죄책감, 그리고 후회가 뒤섞여 정상적인 사고를 망가뜨렸다.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허리를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떼어 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꺼내 줘.”

“……율리아.”

애처로운 얼굴. 나는 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와서야 깨닫는 건지.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 주던 그 상냥한 얼굴을 더는 볼 수 없는 지금이 되어서야 소중함을 깨달았다.

내게 유일하게 좋아한다는 순수한 마음 하나만으로 진심으로 웃어 주던 존재였는데.

왜 나는 날 사랑한다고 했던 너를 귀찮게 여겼던 걸까. 네 말대로 너보다 나를 더 사랑해 줄 사람은 없었는데.

“나를 꺼내 줘, 체스터.”

살아 있을 때는 몰랐던, 내 이름을 불러 주는 그녀의 목소리가 기꺼웠다.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얼음장 같은 피부가 느껴져 그녀가 얼마나 추운 곳에 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차가운 호수 안에 잠겨 있었다.

물에 빠진 그녀의 시신을 수습하지 않았으니까. 아직도 그녀는 물에 잠겨 있을 게 분명했다.

“물속은 너무 추워.”

그녀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시리도록 차가운,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손을 내 손으로 덮었다.

하지만 그녀의 차가움을 체온으로 녹여 줄 틈도 없이 또다시 눈앞에서 사라졌다.

망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붙잡고 싶었다.

어느 순간 그녀가 잠겨 있을 호수로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걸어갔다.

“하…….”

그녀가 몸을 던졌던 호수는 한겨울인 만큼 표면이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이 안에 그녀가 잠들어 있다. 이 안에서 그녀가 나오지는 못했을 걸 알지만, 그게 내가 만들어 낸 환상이라는 걸 알지만.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검을 뽑아 들고 칼날에 검기를 실어 얼어붙은 호수의 표면을 부쉈다.

그런다 해서 그녀가 수면 위로 뜨지 않았다.

“주군!”

주변이 시끄러웠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내게 중요한 존재는 물속에 잠겨 있으니까.

검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물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모두가 내가 호수 안으로 뛰어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놓아라.”

“제정신이십니까? 이 날씨에 물에 들어가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최소한 몸이 상한단 말입니다!”

“놓으라 했다.”

“안 됩니다! 차라리 봄이 오면 건져 내도록 하겠습니다!”

“안 된다. 그녀가 내게 춥다고 했다. 추우니 꺼내 달라고 했다.”

그렇게 애처롭던 그녀의 말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혹여 그 말을 듣고서도 꺼내 주지 않았다가 영영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게 된다면 그때는 결코 버틸 수 없을 터였다.

나 역시 물속에 빠져 죽는 한이 있어도 들어가야만 했다.

만약 내가 물속에서 죽는다면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니 외롭지는 않을 거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저 차가운 물속 깊은 곳에 홀로 있었다.

“주군! 이제 즉위까지 했는데,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필요 없다. 이깟 권력이 무슨 소용인가.”

“미치셨다는 소문이 잠잠해지기도 전에 이러시면 정말 안 됩니다!”

“……죽은 황녀가 춥다고, 꺼내 달라고, 매일 밤 찾아오는데…… 어찌 내버려 둘 수 있겠나.”

나를 붙잡는 그들을 전부 떼어 내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호수 안으로 뛰어들었다. 살갗이 얼어붙을 추위였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이 시리도록 차가운 물속에 홀로 외롭게 있을 테니까.

계속 밑으로 내려가자 멀리서 새하얀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두 눈이 굳게 닫힌 그녀의 모습이 점점 시야에 선명히 드리워졌다.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부패도 진행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고 수면 위로 올라왔다.

물에서 나오자마자 느껴지는 건 온몸이 얼어붙을 정도의 냉기였다. 물에서 건져 낸 그녀를 안고 안으로 향했다.

“…….”

머리카락은 얼어붙은 듯 딱딱했고, 손끝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쥐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는, 온기는커녕 핏기라고는 남아 있지 않은 창백한 손.

굳게 감겨 있는 두 눈. 피부는 얼어붙은 것처럼 얼음 결정이 곳곳에서 보였다.

그녀를 품 안에 끌어안았다. 내 체온을 그녀에게 나누어 주고 싶었다.

내 온기를 내어 주어 그녀에게서 전처럼 햇살 같은 체온이 느껴지길 원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른 지금에서야, 귀찮고 거슬리게 느꼈던 그녀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왜 나는 당신에게 매몰차게 굴었던 건지. 좀 더 상냥하게 대해 줄 수 있었는데.

당신이 마지막에 남겼던 말대로 후회하고 있습니다.

왜 먼저 다가온 당신에게 그렇게 냉랭하게 굴었던 건지. 당신에게 행했던 모든 제 행동들을 후회합니다.

“율리아, 제가 전부 잘못했습니다.”

두 눈에서 나온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녀를 끌어안은 채, 소리를 삼키며 눈물을 떨궜다.

아무리 품에 안고 있어도, 그녀에게서 온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장이 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 그녀가 살아 있지 않다는 게 피부 위로 선명하게 와닿았다.

* * *

때 하나 묻지 않은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깨끗하게 몸을 닦아 낸 그녀를 특수 제작한 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녀는 연약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본래의 형체를 잃을 정도로 약해서 심혈을 기울여야만 했다.

잘못하다가는 밀랍 인형처럼 쉽게 부서졌으니까.

마지막으로 그녀의 모습을 살핀 뒤 관의 뚜껑을 닫았다.

“미안합니다……. 당신을 알아보지 못해서…….”

장례를 치른 뒤 더는 물에 젖은 그녀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체스터.”

그녀의 시신을 건져 낸 이후부터 그녀는 물에 젖은 형태가 아닌, 보송한 모습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여전히 나를 뒤에서 껴안은 그녀의 피부에서는 조금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망령 혹은 환상이었다.

“후회해?”

“……후회합니다.”

“내가 죽고 나서 후회하면 어떡해.”

“제가 잘못했습니다…….”

“살아 있을 때 잘해야지, 체스터.”

망령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났다. 해가 떠 있는 대낮에도 보였다.

그게 싫은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나를 만나러 와 주는 그녀의 망령이 기꺼웠다.

황족의 저주를 받은 걸까. 황족을 죽였기에 저주를 받아 이토록 괴로운 걸까. 기쁘면서도 고통스러운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감정이 심장을 옥죄었다.

“이제 나는 죽었는데.”

“잘못했습니다.”

망령이라는 걸 알지만, 미쳐 버린 내가 만들어 낸 환상이라는 걸 알지만…… 알면서도 진짜처럼 대했다.

그녀의 허리를 팔로 휘감아 빠져나가지 못하게 가두고, 배에 머리를 기대었다.

조금도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내 행동은 그녀의 죽음을 더욱 상기시켜 줄 뿐이었다.

“체스터, 내가 그랬잖아. 너는 후회하게 될 거라고.”

“후회합니다…….”

“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오지 않아.”

“……옆에 있어 주세요.”

“내 존재를 이미 망령이고, 환상이라고 낙인찍었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뭐야.”

나를 살아 있게 한 게 당신인데. 그런 당신을 나는 죽게 만들었다.

이 자리가 필요했던 건 당신을 찾기 위함이었는데. 이 자리를 갖기 위해 소중한 당신을 죽게 했다.

죄책감인가. 아니면 미련인가. 혹은 집착인가.

“저도…… 모르겠습니다, 율리아.”

“너는 후회해야지. 겨우 이만큼 괴로워하는 걸로는 부족해.”

“옆에 있어 주세요. 떠나지 말아 주세요.”

“너도 알고 있잖아. 나는 네가 만들어 낸 환상이라는 거.”

“제발…….”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불가능이란 걸 알면서도, 다시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내가 당신을 먼저 사랑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먼저 제게 다가와 준 것처럼. 저 역시도 당신에게 먼저 다가가고 싶습니다.

당신이 먼저 제게 다짜고짜 사랑한다고 말했던 때로 돌아간다면 당신을 안아 주고 싶습니다.

살아 있는 당신을 품에 안고, 당신의 뛰는 심장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후회하게 될 거야.”

“이미 후회하고 있습니다.”

“응. 후회하게 될 거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면.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시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때는 눈을 뜬 채로 그 누구보다 환하게 웃어 줄 당신을 품에 안고서, 당신의 살아 있음을 따뜻한 체온과 햇살 같은 미소, 안정적으로 뛰는 심장박동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살아 있는 당신이…… 절실합니다, 율리아.”

“내가 절실해?”

“이제 세상 그 무엇도 당신과 바꿀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늦었어. 있을 때 잘했어야지.”

“당신이 하라는 건 뭐든 하겠습니다.”

그녀가 없었으면 나도 없었다. 나를 살아 있게 한 나의 구원.

그런 나의 구원을 내 손으로 부쉈다.

“내가 하라는 건 뭐든 할 거야?”

“당신이 원한다면 기꺼이.”

차가운 그녀의 손등 위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내 목숨은 당신을 처음 만났던 그 옛날부터 당신의 것이었으니까. 당신이 살게 했던 목숨이니 당신이 거두는 게 맞겠지.

망령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율리아였으니까.

“불을 질러, 체스터.”

“…….”

“전부 태워. 황성의 모든 걸 남김없이.”

그녀의 말에 흠칫했다.

“싫어?”

“……싫을 리 있겠습니까.”

“그럼 불에 태워 줘, 체스터.”

“당신이 원한다면.”

황성을 불태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성냥을 바닥에 떨어뜨리자 카펫에서부터 불길은 번져 갔으니까.

나는 다시 그녀의 관 옆에 자리를 잡았다.

관 안에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그녀를 꺼내 부서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율리아,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제가 먼저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불길이 치솟아 이곳을 서서히 태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망령은 사라졌다.

온몸이 타들어 갔다. 그녀가 없는 세상에 이제 더는 살아 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그녀와 함께하는 것을 택했다.

그녀가 불에 탐으로써 재가 되어 사라지길 바란다면. 나 역시도 그녀와 함께 재가 되는 선택을 할 테니까.

“이번에는 외롭게 혼자 두지 않겠습니다.”

품에 안은 그녀를 좀 더 간절하게 끌어안았다. 후회해 봤자 늦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당신을 다시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불길 속에서 그녀와 마지막을 함께 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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