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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78화 (78/141)

#78화

딴에는 죽기 전에 저주라고 내뱉은 말을 곱씹었다.

“후회하게 될 거라…….”

그저 우스웠다. 딱히 후회할 거란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후회할 거였다면 이런 일 따위도 벌이지 않았겠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진행한 일이었다.

매일 귀찮게 구는 여자가 죽었다. 딱히 아무렇지 않았다. 조금의 감흥도 없는데. 어떻게 내가 후회하게 된다는 건지.

황제도, 황태자도, 황녀도. 전부 죽었다.

남아 있는 허울뿐인 황족을 찾아다가 꼭두각시로 세우든지, 혹은 황족의 씨를 말리고 내가 황제가 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

결국 직접 황위에 오르는 선택을 했다.

막강한 권력이 궁금해서. 이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고 설치던 그 여자의 시선이 궁금해서.

매일 귀찮게 내가 사는 곳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그녀를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을 때 느낀 무력감이 얼마나 큰지 그녀는 알까.

그녀의 가족을 죽임으로써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을 알까.

처음에는 그녀의 유모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유모란 사람을 보는 순간, 살아 있다는 얄팍한 안도감의 표정을 짓는 바로 그 순간. 그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싶단 충동에 휩싸였다.

단칼에 눈앞에서 그녀의 유모를 죽이자 품위도 잊고 토악질을 해 댔다.

깨끗한 곳에서 고상한 것 사이에 둘러싸여 오냐오냐 떠받들어지며 천방지축 황녀로 자란 여자이기에 버티지 못하는 거겠지.

“현 황가의 물건들은 전부 태워 버린다.”

그 여자의 흔적을 지워 내면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히겠지.

세상 더러운 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수한 햇살처럼 웃던 얼굴이 절망으로 무너지는 모습은 희열을 느끼게 했다.

어머니가 아버지께 하던 행동을 똑같이 했기에 더욱 구역질이 났다.

단지 어머니와 그 여자가 다른 점이 있다면 어머니는 악독했고, 그래도 그녀는 때 하나 묻지 않고 순수했다는 것.

그것만이 차이점일 뿐이었다.

“어리석은 여자.”

황제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미끼로 사용했고, 도망칠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가장 높은 층으로 갔다.

황태자는 황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한 몸을 희생했다.

하지만 둘 다 실패했다. 황녀는 할 줄 아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저 하나를 살리기 위해 발악했는데. 결국 붙잡혀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 *

한동안 바빴다. 처리해야 할 것들이 많아 시간이 오래 지나도록 다른 생각은 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유 모를 허전함이 느껴졌다. 매일같이 찾아와 귀찮게 굴던 여자가 사라져서 그런지.

문득, 클로이 후작 영애가 떠올랐다.

본인이 아니라는 말이 있기도 했고, 눈동자 색이 내 기억과 조금 달랐기에 완벽한 확신은 없었다. 그리고 딱히 깊은 감정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나를 절망의 나락 속에서 꺼내 준 그 금발의 소녀.

웃는 얼굴이 어딘가 어둡고 슬펐던, 모친을 잃고 주변의 모든 게 변했다며 시무룩한 모습을 보이던 소녀가 클로이 후작 영애가 맞을까.

가장 근접하긴 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었다는 점, 자신과 같은 금발 머리의 오빠가 있다는 점.

이름조차 물어보지 못했던 건, 그 소녀가 무언가를 보더니 놀라고는 다급히 금발 머리 소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곤 오빠가 와서 가야 할 것 같다며 가 버려서.

아쉬운 대로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후…….”

전쟁터로 나가는 걸 망설이지 않았던 건 그 소녀가 했던 말 때문이고, 전장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그 소녀가 꿈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결국 서서히 그 소녀가 나오는, 나를 살아남게 했던 꿈은 악몽으로 변질된 채로 나를 괴롭혔지만.

그런데 왜 지금 어리석게 죽은 여자가 떠오르는 건지. 자리에서 일어나 클로이 후작저로 향했다.

매번 왔기에 어김없이 응접실에서 기다리자 클로이 후작 영애가 나타났다.

“그…….”

아마 나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는 거겠지. 대관식을 하지 않았으니 내 작위는 아직 공작이었다.

“전처럼 부르면 됩니다.”

“공작님. 그, 많이 늦은 것 같지만…… 이걸 공작님께 보여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무엇을 말입니까?”

클로이 후작 영애는 내게 발에 밟힌 것처럼 보이는 구겨지고 더러워진 편지를 건네주었다.

“본의 아니게…… 내용을 봤어요. 황녀님께서…… 공작님께 썼던 편지인데……. 제가 말하는 것보단, 공작님이 직접 확인하는 게 좋겠죠.”

“…….”

그 여자는 죽어서도 질척거렸다. 입가에서 비소가 새어 나왔다.

무심하게 그리고 투박한 손길로 더러운 편지 봉투 안에 든 내용물을 꺼냈다.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딱히 기대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용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편지지를 쥔 손끝이 덜덜 떨렸다.

{체스터. 네가 날 기억해 줄 때까지 기다려 보려고 했는데, 네가 다른 여자를 눈에 담고 있어서 점점 조급해져.

너는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만나서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어.

나는 널 처음 본 순간 바로 알아봤는데, 너는 아닌가 봐.

내가 금발이 아니어서 그래? 네가 원한다면 널 처음 봤던 그때와 같은 금발로 염색할 수 있어.

내가 먼저 너 사랑했잖아. 내가 먼저 너한테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그 여자 말고 나한테 시선을 향해 주면 안 돼? 나는 너밖에 없단 말이야.}

편지의 내용이 거짓이어야만 했다. 반드시 진실이 아니어야만 했다.

아니면 이 모든 게 꿈이어야만 했다.

차마 편지를 구기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잡은 채 클로이 후작저에서 빠져나왔다.

“……착각이겠지.”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미친 듯이 황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황녀의 초상화를 미친 듯이 뒤졌다.

금발 머리를 가진 초상화 속 인물은 나이가 있는 여자와 어린 소녀가 있었다.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 소녀의 눈동자 색과는 완전히 달랐지만, 이목구비만큼은 완벽히 일치했다.

모든 게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하…….”

왜 황녀가 본래의 색이 아닌 다른 색을 하고 있던 건지.

처음부터 은발이었더라면, 보라색 눈동자였더라면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어리석게도 나는 나를 살게 해 주었던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족을 몰살하고 끝내는 그녀를 죽게 만들었다.

그녀는 매일 내게 찾아오며 차갑게 대했던 나를 보며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매번 밀어내도 매일 웃으며 내게 다가오던 그녀를 왜 나는 끝까지 경멸했던 건지.

“하, 하하…….”

아버지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던 어머니는 끝내 마차에서 아버지와 동반 자살을 택했다.

그런 어머니의 행동들과 그녀의 행동이 겹쳐 보여 본능적으로 거부했는데, 그 본능적인 거부감이 판단을 흐렸다.

내가 그 지옥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썼던 모든 이유는 그녀에게서 비롯된 거였는데.

나를 살게 했던 존재를 내 손으로 죽였다. 죽은 후에야 깨달았다.

단지, 귀찮게 군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가족들을 이 손으로 죽이고, 그녀에게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강요했다.

어리석은 건 나였다.

‘너는 반드시 후회할 거야.’

그 말이 맞았다. 그녀가 했던 그 말은 정말 저주가 되어 내게 돌아왔다.

그녀가 죽기 전에 남긴 그 말처럼 나는 지금 후회하고 있었으니까.

모든 게 무의미했다.

권력도 나를 살게 했던 그 애를 찾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건데. 그 애를 찾기 위해서라며 그 애를 죽게 한 거니까.

* * *

밤마다 죽은 황녀가 찾아왔다.

이건 저주인가, 아니면 내가 만들어 낸 환상인가, 그도 아니라면 망령인 건가.

그녀는 밤마다 침실 앞까지 찾아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모습을 하고서 바닥에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창백한 피부를 한 채, 매일 밤 지치지 않고 찾아왔다.

“…….”

그리고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침실 문 바로 앞에 멈춰서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실체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갔고, 해가 뜨면 바닥을 적신 물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내가 만든 허상인지, 아니면 그녀의 저주가 남긴 망령인지.

반복되는 행동에 결국 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그녀의 앞에 다가갔다.

“왜 자꾸 나타납니까.”

“…….”

“이미 후회하고 있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했던 그 모든 행동들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예상과 다를 바 없이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 나를 찾아올 때마다 지었던 미소를 피워 내며 웃었다.

그러나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고작 질리도록 봤었던 그 웃음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율리아.”

손을 뻗어 시리도록 창백한 그녀의 뺨을 건드리려던 그 순간 그녀는 사라졌다.

손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뜨거운 액체가 눈에서 새어 나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 *

또다시 밤이 찾아왔다. 그녀가 나를 찾아오기 전에 복도에서 기다렸다.

그녀가 어디에서 나타나 이곳까지 걸어오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이 방향에서 걸어오리라는 것만큼은 알았다.

더는 잡을 수 없게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모두가 나를 미쳤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나도 내가 미쳤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어둠이 찾아왔는데도 그녀는 옆에 없었다. 내가 여기 있기 때문일까. 다시 침실로 돌아가 기다리려 하는 순간 누군가, 나를 뒤에서 껴안았다.

시선을 내리자 물기 어린, 창백한 여자의 손이 보였다.

“……율리아.”

살아 있을 때 그토록 불러 달라고 했던 이름을 죽고 나서야 나타난 망령에게 속삭였다.

조심스럽게 내 허리를 붙잡은 그녀의 손을 덮었다.

감촉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거나 어제처럼 사라질 줄 알았는데, 피부가 만져졌다.

다만, 그 손은 얼음을 만지는 것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여기는 너무 추워, 체스터.”

처음으로 그녀는 말을 했다. 그와 동시에 깨달았다.

그녀의 시신은 아직도 그 차가운 황궁 호수 안에 잠겨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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