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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76화 (76/141)

#76화

바깥 공기를 쐬고 돌아온 뒤 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참아야 할 때 치명적인 유혹을 해 댔지만 그래도 잘 참아 냈다.

그저 눈웃음 하나만으로도 매혹적인 사람이 대놓고 유혹해서 넘어갈 뻔했지만 잘 버텨 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서져 버릴 사람이라 불안했으니까.

“율리아.”

딱히 내 인내심이 긴 편은 아닌데. 특히 그녀와 관련되면 참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보다도 그녀가 아파하는 모습은 차마 보기 힘들었다.

내 눈앞에서 쓰러지는 모습을 본 순간 심장이 뜯겨 나가는 통증이 느껴졌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날 괴롭게 했다.

일주일 동안 의식이 없는 채로 서서히 죽어 가는 그녀의 모습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지켜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당신이 아프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이것만큼은 진심이었다.

두 번 다시는 그녀가 아파하는 모습을 볼 수 없으니까.

“죽으면 안 됩니다.”

절대로 남의 손에 죽게 놔두지 않을 테니까. 타인의 손에 죽게 놔둘 바에는 차라리 내 손으로 숨을 거둘 거니까.

“또다시 당신을 잃는 두려움을 느끼고 싶지 않습니다, 율리아.”

지금 그녀가 듣지 못할 테니 내뱉는 말이었다. 이런 약해진 모습을 당신한텐 들키고 싶지 않으니까.

이불을 그녀의 턱 밑까지 덮어 주었다.

잠이 오질 않았다. 그녀가 아픈 이후부터는 불면증이 도져 더욱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율리아.”

아침 일찍 황성에 다녀오는 게 좋겠지. 그래야 점심 전에는 돌아올 테니까.

“좋은 꿈 꾸세요.”

이왕이면 제가 나오는 꿈으로.

* * *

황성에는 아침 일찍 다녀올 생각이었다.

딱히 그녀가 일찍 일어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막상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하……. 아픈 사람을 상대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세상모르고 잠든 얼굴을 보면 천사가 따로 없었다.

아팠던 사람이니 손가락 하나 건드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무척 연약한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엄살은 또 심하고.

잠든 그녀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어서 나아요, 율리아.”

그래야 제가 참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제 인내심은 얄팍한 편이니 빨리 나아요.

어서 그녀의 얼굴에 혈색이 돌기를 바랐다.

“저는 당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습니다.”

눈앞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걸 보는 건 한 번이면 족하니까. 두 번씩이나 보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아파하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앞으로는 아프면 안 됩니다.”

이불을 다시 제대로 덮어 주고서야 방을 나올 수 있었다.

황성에 도착하자 황실 시종장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장인어른을 만나러 가는 와중에 벽에 걸린 초상화들이 눈길을 끌었다.

아마 오늘 중으로 율리아의 초상화가 도착하겠지. 그걸 생각하면 기분이 좋았다.

벽에 걸린 초상화를 보며 가는 도중, 유난히 시선이 가는 그림이 하나 있었다.

“이 초상화는 누구의 초상화입니까?”

황금빛 머리카락에 선명한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어린 소녀의 초상화.

다른 것들과는 달리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무심코 지나칠 구석에 있는 초상화였다.

그런데도 시선이 간 이유는 율리아의 어린 시절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이목구비가 똑 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게 율리아는 은발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돌아가신 장모님의 어린 시절 초상화일까.

“아……. 저건 율리아 황녀 전하이십니다.”

“……원래 금발이었습니까?”

“처음부터 은발이셨습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내가 모르는 율리아의 비밀이 있는 걸까.

19년 동안 존재하는 게 맞는지 의심되던 황녀인 만큼 알아낼 수 있는 정보 역시 매우 한정적이었다.

무얼 즐겨 먹는지, 싫어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아주 사소한 것조차도 알아내기 어려웠던 사람이었으니까.

정확히는 내가 모르는 그녀의 비밀이라기보다는 내가 알아서는 안 될 황실의 비밀에 가까울 수 있었다.

“더 궁금하신 게 있다면 그건 폐하께 직접 물어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당사자와 폐하만이 알고 있어 그럽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저, 겨우 시종에 불과한 제가 발설할 수 없는 가족사라 그럽니다.”

“…….”

“여기입니다.”

열린 문안으로 들어가자 율리아와 똑같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가진 장인어른이 계셨다.

율리아, 나는 당신이 무척 궁금합니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때 제게 보였던 약한 모습이 어디서 비롯된 건지.

당신은 마냥 행복하게 살아왔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는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제국의…….”

“됐네. 거추장스러운 인사는 생략하고 앞에 앉게나.”

“……예.”

장인어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율리아는 표정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숨김없이 전부 드러난다면 장인어른은 속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황제라는 자리를 공고히 했겠지.

“이건 황제로서 자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하는 말이네.”

“예.”

“내 딸이 자네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네.”

“그렇……습니까?”

그건 좀 기뻤다.

“그래. 다만 이건 알고 있게. 내 딸이 자네와 이혼을 원한다면 나는 적극적으로 내 딸을 도와줄 생각이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장인어른.”

죽어도 그녀와 이혼할 생각은 없었다. 혹여나 그녀가 이혼을 원한다 하더라도 동의해 줄 마음도 없다.

내 손에 들어온 것을 놓을 생각이 없으니까.

“그래서 내 딸의 건강은 어떠한가?”

“많이 나아졌습니다. 당분간 더 안정을 취하면 건강을 되찾을 겁니다.”

“그래. 혹시 오면서 초상화를 봤나?”

“예.”

“그럼, 거기서 율리아의 어린 시절 초상화를 봤나.”

“……예.”

장인어른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다 태우고 유일하게 남은 율리아의 어린 시절 초상화라네.”

저절로 주먹을 쥔 손에 힘이 실렸다.

율리아, 제가 모르는 당신의 과거는 대체 무엇입니까. 당신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 겁니까.

제가 찾는 그 금발에 벽안을 가진 어린 소녀가 혹시 당신이 맞습니까?

하지만 초상화 속에서의 당신은 선명한 주황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가 어렸을 때 만났을지……. 당신의 과거가 궁금합니다.

“모든 건 내 잘못이네.”

“…….”

“늦게 깨달았지. 자식을 잃을 뻔해서야 깨달았으니까.”

율리아, 당신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평탄하지 않았다는 것 하나만큼은 충분히 알 수 있네요.

당신이 평범하게 사랑받고 자랐다면 장인께서 당신에 대해 떠올릴 때 저런 죄책감 가득한 눈빛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19년이라는 시간을 당신이 어떻게 보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에 대해 모르는 게 없기를 원합니다, 율리아.

“차라도 마시면서 대화하는 게 좋겠지. 얘기가 길어질 테니.”

* * *

율리아가 태어나고 원래부터 몸이 약했던 황후는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아이가 자랄수록 황후의 몸이 약해져 가는 걸 볼 때마다 저절로 모든 원망의 화살은 아이에게로 돌아갔다.

네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황후는 아프지 않았을 텐데.

-라는 아빠의 자격을 박탈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아……빠.”

원망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그걸 행동으로 내비치지 못했던 이유는 황후를 쏙 빼닮은 얼굴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닮은 아이는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

최대한 아이를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황후는 천천히 죽어 갔다.

“엄마!”

“율리아, 엄마한테 가까이 가지 마라.”

“……네.”

몸이 약해서 조금만 무리해도 쓰러지는 황후의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아팠다.

황후가 이렇게 된 원인은 전부 저 아이 때문이었다.

만약 이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황후가 이렇게 병들어 갈 일이 없었을 텐데.

“폐하……. 제게 남은 시간이 더는 없어요.”

“레아,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제발…….”

“제 몫까지 폐하께서 저희 아이들을 사랑해 주세요.”

“제발…… 죽는다는 소리는 하지 말아 줘요, 레아.”

이때 직감했다. 황후는 이미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부정하고 싶었다.

“폐하. 폐하께서는 무척 다정하신 분이니, 꼭 저희 아이들을 잘 지켜 주실 거라 믿어요.”

“레……아.”

“사랑했어요, 그러니 남은 시간만큼은 저희 아이들을 사랑해 줘요.”

그게 황후의 유언이 되었다. 그 말을 끝으로 황후의 숨이 멎었으니까.

그녀는 혼자서만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내 곁에서 떠났다.

평생을 곁에 있어 주겠다고 한 사람이 나만 혼자 남겨 두고 떠났다.

권력으로도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내게서 영영 떠나 버렸다. 붙잡을 수도 없게.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황후는 죽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장례를 치를 수 있었으니까.

“아버지.”

아들이 서글픈 표정으로 불렀지만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황후가 없으니 숨을 쉬기 어려웠다.

내게는 황후가 남겨 준 아이들이 있었지만, 황후의 존재만큼 사랑하지는 않았다. 매일 황후의 초상화를 들여다봤다.

찬란한 황금빛 머리카락에 선명한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사랑스럽고 소중한, 찬란한 존재였다.

“아버지. 저도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슬픕니다, 하지만…….”

아들에게서는 황후의 얼굴을 조금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딸에게는 황후의 얼굴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야 바꾸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황명이다.”

“예?”

“율리아의 머리카락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눈동자는 약을 써서 주황색으로 바꾸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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