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침대에 누워서 체스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내일이 체스터의 생일인데 겨우 초상화로 생일 선물을 퉁치기에는 조금 미안한 감이 있었다.
“체스터!”
뭘 더 해 줘야 하는지 고민하다, 활짝 웃으면서 방 안으로 들어온 체스터를 반겼는데 그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걸까?
“율리아…….”
약간의 망설임이 있긴 했지만 닿는 것조차 민감하게 반응한 이전과는 다르게 체스터는 나를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좀 더 와락 껴안아도 좋은데.
“장인어른께서 저만 호출했습니다.”
“아…….”
대충 왜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그날의 일을 말해 주려는 거겠지.
어느 정도는 언질을 줘야 하는 게 맞을까. 아니면 그냥 아빠에게 다 맡기는 게 좋을까.
“언제 갔다 올 건데요?”
“내일 오전 중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체스터는 내 품을 파고들었다. 이런 그의 행동은 무척이나 귀여웠다.
“체스터.”
“네.”
“내일이 체스터 생일이잖아요.”
“네.”
그의 목을 끌어당겨 몸 가까이 밀착시켰다. 이어서 그의 위에 올라탄 채 허리를 숙여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었다.
맞닿은 입술을 매개체로 뜨거운 숨결이 오고 갔다. 좀 더 원했다. 그의 호흡을 만끽하고 싶었다.
나를 원하는 그의 숨을 느끼고 싶었다.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말캉한 살덩이는 익숙하게 내 혀를 휘감았다. 호흡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중 입술이 떨어졌다.
“……율리아, 이러면 곤란합니다.”
“왜요?”
“…….”
“참지 않아도 돼요. 참을 필요 없어서 이렇게 구는 건데.”
참을 필요 없는데. 그리고 이거 지금 내가 유혹하고 있는 건데.
“당신이 이렇게 굴면 제가 참기 힘들어집니다.”
“왜요? 제가 참지 말라고 하는데 왜 참으려고 해요?”
“당신은 좀 더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그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다. 나 이제 진짜 멀쩡한데 체스터는 여전히 나를 환자 취급했다.
아픈 사람을 건드는 취미는 없다고 했지만, 지금의 나는 아픈 사람이 아닌데.
“안 참으면 안 돼요?”
“네, 안 됩니다. 당신의 의지가 어떠하든 지금은 제가 인내해야 합니다.”
“……체스터.”
“율리아, 당신은 아직 다 낫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뒷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냥 뭐라고 하든 변명으로만 들릴 것 같으니까.
그래서 체스터의 입술에 내 입술을 짧게 포개었다 떨어뜨렸다.
“진짜? 제가 이렇게 먼저 하자고 하는 경우 거의 없는 거 알잖아요.”
“하아……. 율리아.”
“응?”
체스터는 금방 몸을 뒤집었다. 이제는 내가 그의 밑에 깔려 있었다.
혹시나 했던 내 기대가 무색하게도 체스터는 나를 똑바로 눕혀 주고는 굳이 내 턱 아래까지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주었다.
나가려는 듯해 다급하게 체스터의 소매를 붙잡았다.
“체스터?”
“자요. 내일 일어났을 때 제가 없을 수도 있지만…… 서운해하지 말아요.”
“지금 서운해하려고 하는데.”
“당신이 정말 괜찮아졌을 때 해도 늦지 않습니다.”
체스터의 손을 붙잡고 그가 내게 했던 행동과 똑같이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눈매를 곱게 휘어 웃었다.
효과가 있는지 그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율리아?”
“이거 체스터가 말한 대로 유혹하는 건데.”
체스터는 옅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지금은 저도 이 정도로 만족하겠습니다.”
저렇게 잘생긴 얼굴로 본인이 더 아쉽다는 눈빛을 하면 어떡해. 넘어갈 수밖에 없잖아.
“근데 체스터,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다시 와야 해요.”
“네. 다시 올 테니 먼저 자고 있어요, 율리아.”
“…….”
“봄이 오면 함께 영지로 내려갈래요?”
고개를 끄덕였다. 체스터는 옅게 미소 짓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먼저 자요, 율리아.”
내 머리에서 손을 떼어 낸 체스터는 방의 불을 꺼 주고 밖으로 나갔다.
체스터가 이렇게 다정한데, 왜 내 마음은 불안한 걸까. 이 행복이 영원하길 바라지만 이게 혹여 꿈은 아닐지 걱정이 됐다.
이게 만약 꿈이라면 영영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체스터, 나 사랑하는 거 맞지?”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요즘 들어서 급격히 불안해. 그래서 그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내가 닿지 못해서 안달이었던 그가 지금은 나와 닿는 걸 최소화하는 행동을 보면…… 충분히 의심해도 되는 상황 아니야?
“……나는 널 사랑하는데.”
그의 진심은 무엇인지. 그저 이건 내 쓸데없는 불안감에 불과하길 바랐다.
* * *
아침에 일어나자 옆에는 체스터가 없었다.
아마도 오늘 오전 중에 아빠를 만나러 간다고 했으니 없는 게 당연하겠지만, 뭔가 아쉬웠다.
일단 옷을 안주인에 걸맞게 갈아입었다. 오늘 초상화가 체스터보다 먼저 공작저에 도착할 게 분명했다.
체스터가 집무실에 놓고 싶다고 했었지?
하긴, 침실에 둘 필요는 없을 테니까. 침실에는 진짜인 내가 있는데 굳이 초상화를 둘 필요가 있을까.
그래. 체스터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괜한 의심이야.
“마님?”
아래로 내려가자 초상화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사용인들이 액자에 든 초상화를 옮기고 있었다.
초상화를 살짝 보자 세상 환하게 웃고 있는 예쁜 내 얼굴 옆으로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체스터가 나른하게 웃고 있었다.
역시 잘생긴 내 남편다웠다.
나를 보며 살짝 미소 짓고 있는 체스터를 보자 괜히 그의 애정을 의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치는 내가 정하죠.”
체스터의 집무실을 쭉 돌아봤다. 그래도 역시 이 초상화는 책상 바로 옆의 벽이 낫겠지?
일을 하다가 내 생각이 날 때면 옆을 돌아보라는 의미로.
“저기에 걸어요.”
액자를 건 사용인들이 전부 나가고 체스터가 업무를 보는 의자에 앉아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정말 예쁘게 잘 그려졌다는 느낌이 가득했다. 환하게 웃는 표정을 보니 체스터의 옆에 있는 게 내 행복이라는 걸 느꼈다.
그 순간이었다. 그냥 문득 그의 집무실에는 무엇이 있을지 호기심이 든 것은.
그리고 그 타이밍에 책상 위에 놓인 편지가 시야에 들어온 것도.
“……뭐지?”
감히 내 남편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는 아니겠지? 하는 마음에 편지를 펼쳐 보는 순간 차라리 러브레터가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지를 쥐고 있는 손이 바들거리며 떨림을 멈추지 못했다.
{공작 각하, 황녀 전하께서는 무사하십니까?
걱정 많이 했습니다. 아직 물증을 찾지 못했으나, 아마도 블레어 공작가 혹은 그쪽과 관련된 이들이 저지른 일 같습니다.
황녀 전하를 저희가 확보한 지금은 결코 잃으시면 안 됩니다.}
충격적인 말이 적혀 있었던 만큼 믿기가 힘들었다. 머리를 망치로 세게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내 유혹에도 꿋꿋이 나의 안정을 고수한 그의 태도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편지였다.
“하……!”
미친 사람처럼 그의 서랍을 더 뒤졌다. 다른 편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열쇠 하나가 발견되었다.
맨 아래에 잠긴 서랍이 보여, 열쇠로 열어 보았다. 열린 서랍 속에는 다량의 편지들과 서류들이 들어 있었다.
‘내가 사랑이라는 걸 할 사람으로 보이나?’
왜 갑자기 그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거지? 사실 그게 진심이고 나를 사랑한다는 건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었던 걸까.
나는 그를 믿었는데.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라 사랑인 걸 몰랐다고 한 말을 믿었는데. 그는 내 믿음을 배신했다.
나는 그에게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었는데.
“……체스터.”
당신을…… 어쩌면 좋을까.
{황녀 전하께서 깨어나셨다니 다행입니다. 일단 저희가 열심히 저쪽의 동태를 살피고 있지만 아직 아무런 낌새는 없습니다.
아마 황녀 전하의 안위를 살피는 듯합니다.}
{독살에 실패했으니 아마도 자객을 보낼 확률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너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니었어? 그 모든 게 거짓이었던 거야? 내가 이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나는 그가 진심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는 날 기만했구나.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게 맞았구나.
그때 그가 블레어 소공작에게 했던 말이 진심이고, 내게 한 말은 잘 짜인 각본이었구나.
{각하, 황녀 전하께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황녀 전하께서 죽으면 곤란합니다. 그러니 저희 역시도 최대한 빠르게 해독제를 구해 보겠습니다.}
{이번 소동은 아마도 저희가 정치적 위치를 공고히 다지면서 저쪽에서 위협을 느껴 저지른 일로 사료됩니다.}
나는 체스터에게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었는데. 그러나 그는 나를 기만했다.
그가 하는 말들이 진심이라고 믿었던 나는 너무나도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첫 번째 삶이 지금과 다른 점은 오로지 그가 나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지금껏 바랐던 그의 애정은 내게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던 거였다. 단 한 번도 내 손에 들어온 적이 없던 거였다.
어리석었던 내가 역겨웠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내 목을 조르고 싶었다.
{황녀 전하와 결혼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제 정말 정치적 기반이 확실해졌습니다.}
{각하께서 전장에 계셨을 때의 공백이 완전히 메꿔졌습니다. 정계로 돌아오시면서 바로 황녀 전하께 구애하신 보람이 있으십니다.}
그는 진심으로 나를 사랑했던 게 아니다. 그저 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결혼했다.
나를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말들은 전부 나를 구속하기 위한 용도일 뿐이었다.
모든 게 허탈했다.
이번 생에서는 처음으로 그의 사랑을 얻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모든 건 착각이었다.
모든 생을 통틀어 나는 단 한 번도 그의 사랑을 받은 적이 없던 거였다. 끔찍하게도 신은 내게 잔인했다.
“하, 하하…….”
편지들을 든 손이 부들거리며 떨렸다. 바로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초상화 속 내 얼굴에 토기가 몰려왔다.
“욱, 우웩!”
뭐가 그리 행복해? 지금 그렇게 웃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마냥 행복한 듯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멍청하게 웃고 있는 내 표정이 가증스러웠다.
헛구역질의 반복 끝에 손등으로 입가를 닦고 액자에 다가가 미친 듯이 유리를 주먹으로 강하게 두들기며 깨부쉈다.
손에 유리 조각이 박혀 피가 흘렀지만, 아픔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배신감으로 물든 내 심장보다 아픈 곳은 없을 테니까. 깨진 유리들은 바닥으로 떨어져 와장창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이제는 초상화의 종이만이 남았다.
“……왜 웃고 있는 거야.”
차마 체스터의 얼굴을 찢을 수가 없었다. 그런 내가 미련하기 짝이 없었지만, 본능이었다.
나는 이 초상화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수가 없었다. 역겹게도 내 마음에는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어서.
울고 싶었다. 모든 걸 알아 버린 이 와중에도 그를 사랑하고 있는 내가 너무 불쌍해서.
결국 웃고 있는 내 모습만을 찢어 내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갈기갈기 찢어서 바닥에 흩뿌렸다.
“……기만자.”
너를 사랑한 모든 순간이 후회스러웠다.
체스터가 나를 사랑한다고 착각했을 때, 그는 속으로 나의 어리석음과 멍청함에 얼마나 비웃었을까.
개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