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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73화 (73/141)

#73화

첫 번째 삶과 지금은 온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막무가내로 굴며, 자기밖에 모르는 천방지축처럼 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었고, 버텨 내기가 어려웠기에 삶에 큰 미련이 없었다.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조차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나를 죽이려 들었지만. 사랑하는 남자가 나의 죽음을 원했기에 기꺼이 죽어 주었다.

그때 미련이 남는 게 하나 있다면 체스터의 애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가족을 눈앞에서 죽인 전전생의 체스터와 지금의 체스터는 온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야만 했다.

“율리아!”

어제 체스터에게 세실을 보고 싶다고 말했더니 정말 오늘 점심을 먹은 후인 지금 그녀가 내 병문안을 왔다.

“세실!”

마음 같아서는 한걸음에 달려가 환영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라 아쉬웠다.

나는 체스터의 유난과 과보호로 인해 약간 아쉬운 마음을 가진 채로 침대에서 세실을 맞이했다.

“율리아. 지금도 많이 아파?”

“아니. 어제까지는 아팠는데 지금은 거의 안 아파.”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얼굴이 완전 반쪽이야!”

역시 세실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마음이 편했다. 마치 안정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안색도 아직 안 좋고.”

“……많이 안 좋아?”

“조금 안 좋아. 어, 그리고…… 율리아.”

“응?”

세실은 내 옆에 와서 앉았다. 얼굴이 상했다고 하니 조금 멋쩍었지만, 모처럼 친구의 얼굴을 보니 반갑고 좋았다.

아무리 체스터가 내게 잘해 준다 한들, 남편과 친구는 온전히 다른 존재니까.

“네가 쓰러졌다고 했을 때도 왔는데…… 이제야 눈을 뜨고 있는 걸 보네.”

“와 줘서 기뻐!”

“그래도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야. 그때 네 남편이 얼마나 살벌했는지 알아?”

“……어땠는데?”

세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내게 얼굴을 가까이하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빛만으로 사람 한 명 죽는 줄 알았어. 엄청 심각했어!”

“……많이 심각했어?”

“당연하지! 아주 살벌했다고! 진짜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황족이었으니까 망정이지. 일반인이었으면 죽었을걸?”

“…….”

“너 깨어나지 못했으면……. 으! 생각만 해도 무섭다.”

세실이 약간 과장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세실이 해 준 말만 듣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체스터가 깨어나지 못하는 나를 아주 많이 걱정했던 게 분명했다는 것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실.”

“응?”

“나 진짜 사랑에 빠졌나 봐.”

“이제 알았어?”

“어……?”

“네가 결혼까지 할 정도면 무의식적으로 사랑하니까 했던 거지. 솔직히 진짜 마음이 없었으면 그깟 약혼 파투 낼 수 있잖아.”

“파……투?”

“제국의 유일한 황녀가 결혼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파혼 정도는 할 수 있지. 그게 흠이 되는 것도 아니고.”

“파혼…….”

세실은 살짝 웃음을 지었다. 마치 나를 안심시켜 주려는 사람처럼 상냥했다.

“세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왜? 이제는 남편도 있잖아.”

“그래도…… 내 친구는 너잖아. 나한테 친구는 너뿐인 걸!”

“다행이네. 내가 네 유일한 친구라서.”

“세실.”

“응?”

“독은 진짜 조심해야 해! 진짜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고통이었어.”

세실은 나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그게 좋았다.

온기가 선명하게 느껴지고 안정된 심장 소리가 들리자 심란했던 마음이 차츰 진정되어 갔다.

독 이야기를 꺼내니 자연히 꿈이 생각났다.

“있지……. 이건 세실,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뭔데?”

“나 진짜로 죽는 줄 알았는데, 잠들어 있는 동안 꿈속에서 체스터랑 똑같이 생긴 어린애가 나를 살려 줬다?”

“그래? 혹시 네 무의식이 만들어 낸 네 남편 아니야?”

“처음엔 그런가 했는데…… 머리색이 너무 달랐어.”

“무슨 색이었는데?”

“은색.”

“그럼 그거 아니야?”

“뭐?”

“태몽.”

하지만 태몽이라는 생각은 한 적도, 할 수도 없었다.

체스터는 정말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매일같이 피임을 철저히 했으니까.

그렇기에 내가 아이를 가졌을 거란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태몽은 아니야.”

“왜? 남편이 못해? 네 남편을 그렇게 보진 않았는데, 생각보다…….”

“아니야! 못하지 않아!”

오히려 너무 잘해서 문제인데!

순간 내가 내뱉은 말에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흠흠. 율리아, 그럼 왜 아니라고 단정 짓는데?”

“……체스터는 아이를 싫어해. 그래서 아이는 갖지 말쟀어.”

“어? 그럼 후계는?”

“방계에서 입양하면 된다고…… 그랬어.”

나도 모르게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율리아. 이유는 물어봤어?”

“자기는 아이가 싫대! 나는…… 아이 가지고 싶은데…….”

“공작님이 나빴네. 네 의견은 물어보지 않고.”

“진짜, 진짜 미워. 매번 피임하고……. 세실, 너는…… 너는 내 편이지?”

“당연하지. 내가 네 편을 들어 줘야지 누구 편을 들겠어.”

역시 절대적인 내 편은 세실이었다. 세실이 이렇게 말해 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울면 안 되는데, 딱히 울 일도 아닌데.

“율리아, 아프지 마.”

“안 아파…….”

“응. 안 아플 거야.”

“네가 이럴 때 보면 어린애 같아.”

“……이젠 어린애 아니야.”

“응. 가끔은 어린애 같은데 이제는 어린애 아니지.”

정말 나는 세실을 제외하면 친구가 없었다.

첫 번째 삶에서는 친구조차 없었다. 사교계 활동을 활발하게 했지만, 그건 그저 혼자가 싫어서 그랬을 뿐이었다.

어울렸던 귀족들이 몇 있었지만 친구라고 볼 순 없었다. 그들은 그저 내가 가진 신분 때문에 다가왔을 뿐.

그걸 알면서도 그 무리에 속했다. 의도가 불순할지라도 그 관심을 받고 싶어서.

나 한 사람을 오롯이 봐 주기를 바라면서도, 사람들이 황녀라는 신분을 가진 내게 관심을 보이는 것에 만족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부질없는 삶이었다.

“……내가 인생 3회 차라면 어떨 것 같아?”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설 같은 소리야. 소설은 그만 보고, 이제는 좀 쉬는 게 좋겠다.”

“역시 허무맹랑한 얘기 같지?”

그 누구에게 말해도 믿지 않겠지. 충분히 이해했다.

아마 내가 직접 겪은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이 나처럼 말했다면 나라도 믿지 않고 그저 웃어넘겼을 테니까.

“율리아, 다 나으면 보자.”

“돌아가게?”

“이제 가야지. 너 아직 아프잖아. 이럴 때는 더 쉬어야 해.”

“……그렇게 아픈 건 아닌데.”

“율리아, 네 남편이 너 많이 걱정하더라. 잘 얘기해. 혼자 속 썩지 말고.”

“……응.”

“그럼 이제 돌아갈게. 다 나으면 꼭 연락하고. 그리고 살 좀 찌우고.”

“응! 잘 가! 그리고…… 또 와야 해.”

“당연하지, 율리아.”

“배웅…….”

“배웅은 안 해 줘도 돼. 편히 쉬어, 너는 환자잖아.”

세실은 그렇게 돌아갔다. 반가움은 찰나였고 아쉬움이 남았다.

조금 더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세실 딴에는 나를 배려하는 의미로 일찍 가는 거겠지.

세실이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체스터가 들어왔다.

“율리아, 몸은 괜찮습니까?”

“진짜 괜찮은데……. 다들 되게 심각한 병에 걸린 환자 취급…….”

설마 나 진짜 불치병에라도 걸린 걸까?

“혹시 저 불치병이라도 생겼어요?”

그런 거라면 세실의 과도한 배려도 그렇고, 체스터의 행동도 그렇고 충분히 이해됐다.

하지만 내 추측은 완전히 빗나갔는지 체스터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율리아,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세요.”

“아, 그러면 불치병에 걸린 거는 아니란 거죠?”

“……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체스터는 또 내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데 왜 저를 불치병 환자 취급해요?”

“그게 아닙니다.”

“그러면 저한테 가까이 와요.”

“율리아.”

“대체 왜 저를 피해요? 범인을 잡지 못해서 제게 미안해서 그런 거면 상관없어요.”

“…….”

진심을 담아 말했지만, 정말 체스터는 내게 한 발자국도 더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윽!”

“율리아?”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지는 척을 하자 체스터는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가까이 다가왔다.

다행히 체스터를 속여 넘길 정도는 된 모양이었다.

내게 가까이 온 체스터를 꽉 잡아서 내가 앉은 침대로 잡아당겼다.

“……율리아?”

“이렇게 해야 오잖아요. 제가 아프다고 하면 이렇게 올 거면서, 왜 제가 오라고 말로 하면 안 와요?”

“……율리아, 그건.”

“또 제가 아프니까, 조심해야 하니까. 이런 말을 할 거면…… 말하지 마요.”

“…….”

체스터가 다시 내게서 멀어질 수 없도록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이러면 내게서 멀어지기 위해서는 나를 밀치는 수밖에 없으니까. 이 정도면 체스터를 붙잡아 둘 수 있겠지.

“체스터.”

네게 말을 해도 괜찮을까? 내가 인생 3회 차라는 걸.

아니, 그보다는 내가 그의 손에 한 번 죽었던 사람이라는 걸 말해도 될까.

그러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체스터도 믿지 않는 반응을 보일 게 분명하지만, 궁금했다.

내 첫 번째 삶의 그와 지금의 그는 가지고 있는 생각이 전혀 다른지 알고 싶었다. 내가 사랑하는 그에 대해 자세히 알기를 바랐다.

“체스터, 저 꿈을 꿨어요.”

거짓말이었다. 내가 진짜로 겪었던 전전생을 꿈이라고 포장했다.

그는 내 말에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무슨…… 꿈을 꾸셨습니까.”

“제가 죽는 꿈이요.”

“…….”

“제가 죽는 악몽을 꿨어요. 사경을 헤맬 때도…… 그 이전부터 계속해서 꿨어요.”

체스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담담히 내 말을 들어 주었다. 물론 완벽한 진실은 아니고, 약간의 거짓말을 섞어 말했다.

그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어떻게 죽는 꿈이었습니까.”

“당신이 저를 죽이는 꿈이었어요.”

“제가…… 당신을 죽였다고요?”

“네. 분명 꿈이지만 너무 생생했어요.”

아니, 내가 직접 겪었던 일이었다. 꿈도, 책 속의 내용도 아니라, 진짜 내가 경험했던 일.

내가 사랑했던 체스터에 의해 죽었던 생.

“지금의 당신은 저를 죽일 리가 없는데, 괜한 꿈이겠죠?”

체스터는 내 허리에 팔을 휘감아 품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이 닿았다. 그가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꼭 위로하는 사람처럼.

“율리아, 제가 당신을 죽일 리가 없잖아요. 어떻게 제가 당신을 죽이겠습니까.”

“…….”

“괜한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꿈은 기억도 하지 말아요. 제가 당신을 죽일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그의 말에 안심하고 싶었다. 이 달콤함에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체스터의 진심을 알고 싶었다.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지.

“체스터, 저 사랑해요?”

“당연히 사랑하죠.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체스터는 손으로 내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여 주었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은 바람에 표정을 볼 수 없지만, 진심으로 나를 사랑한다는 눈빛을 하고 있겠지?

“거짓말이면 안 돼요.”

“네.”

“그리고 절대로 저 죽이면 안 돼요.”

“안 죽입니다, 율리아. 저는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미친놈은 아닙니다.”

“……그렇죠?”

“네. 그러니 안심해요.”

체스터는 상냥하게 율리아를 토닥이며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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