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다행히 문이 열리기 전에 몸을 문 쪽 방향으로 뒤집었다.
간발의 차이였다. 분명 들키지 않았고, 내가 잘못한 건 없는데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율리아?”
“그, 그…… 다리 힘이 풀려서요.”
“……조심하세요.”
체스터는 바닥에 꼴사납게 누워 있는 나를 가볍게 안아서 다시 침대에 올려 주었다.
하지만 아직도 마음이 심란했다. 무엇보다 검의 위치가 이상했다. 대체 왜 이 침대 아래 그의 검이 놓여 있던 건지.
차라리 체스터가 차고 있었거나, 침대 옆에 놓여 있었다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왜 침대 밑인지. 물어봐도 괜찮을까?
“체스터.”
“네.”
설마 체스터가 날 죽일 생각은 아니겠지. 이미 과거에서 아주 많이 벗어났잖아.
그러니 괜한 걱정일 텐데. 왜 이렇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걸까. 괜히 초조했다.
아니, 죽일 생각이었다면 왜 나랑 결혼하려고 했겠어? 그치?
그냥 내가 오랫동안 누워 있었고 총 몇 번의 삶을 살았는지 새롭게 알게 되어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겠지?
“……왜 안아 주지 않아요?”
결국 검이 왜 내 침대 밑에 있는 거냐는 물음은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했다.
아니,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걸 물어보고 그의 대답을 듣는 순간 그때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으니까.
“율리아.”
“안아 달라고 했는데, 왜 안아 주지를 않아요!”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다. 내가 어리광을 피워도, 체스터라면 받아 줄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어린애처럼 굴게 됐다.
하지만 이런 내 투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내 근처에 다가오려고도 하지 않았다.
“체스터, 왜 저한테 안 와요?”
“……두렵습니다.”
“뭐가요?”
“제가 당신을 건들면 당신이 부서지기라도 할까…… 무섭습니다.”
“저 그렇게 약하지 않거든요? 그리고…….”
말이 끝나기 전에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하녀가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체스터가 두고 나가라 말하자, 하녀는 바로 방 밖으로 나갔다.
“체스터.”
그래. 그냥 침대 밑에 있던 검의 존재는 잊을게. 그가 나를 죽이려고 할 리는 없잖아? 그렇지?
너는 나를 사랑한다고 속삭이잖아.
내 첫 번째 삶의 너처럼 나를 경멸과 증오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만으로 나는 기꺼우니까.
나는 체스터가 나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 내가 그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고 있는데, 체스터도 나를 사랑하는 게 맞잖아.
나를 사랑하고 있을 체스터가, 나를 죽일 생각을 하진 않았겠지.
그러니까. 제발 내가 안심할 수 있도록 해 줘.
내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바라 왔던 건,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니까. 그저 네 애정 하나와 나의 행복만을 원했는데, 그게 많이 바란 거야?
너도 나 사랑하잖아. 이제는 날 사랑하잖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잖아, 체스터.
“먹여 주면 안 돼요?”
수프 그릇을 바라보며 물었다.
수많은 말들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입 밖으로 쉬이 터져 나오지를 않았다.
물어보는 순간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느낌이 조금이라도 든다면 나는 무너질 테니까.
이제야 그의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나는…….
“체스터, 그것도 안 돼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기에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이 손을 놓으면 영원히 다시 잡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일렁였다.
그의 손을 잡아당겨 그 위에 내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체스터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는 약간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아……. 율리아.”
“싫어요?”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저…….”
체스터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싫은 게 아니면 왜 안아 주지도 않고, 먹여 주지도 않아요? 아니면 저에 대한 사랑이 식었어요?”
“그런 게 아닙니다! 율리아…….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사랑해요, 체스터.”
진심이었다. 전생에서부터 사랑해 왔다.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도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눈앞에서 그가 내 가족을 죽였지만, 나는 그를 사랑했다.
차가운 황궁 호수의 밑바닥에 가라앉으며 얼어 가는 그 순간까지도 가족이 아닌 그를 떠올렸다.
그동안 체스터를 밀어내고 극도로 싫어했던 이유는 그가 나와 내 가족들을 죽게 만든 원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내 무의식이 만들어 낸 거부감이었단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아. 과거의 체스터와 지금의 체스터는 다른 사람이라고 믿으니까.
이제는 체스터가 내 가족들을 죽이고,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드니까.
온전히 과거처럼 그를 다시 사랑해도 될 것 같으니까. 내 판단이 잘못된 게 아니길 간절히 바라.
“저는 사랑하는데, 체스터는 저를 사랑하는 마음이 변했나요?”
“……변하지 않았습니다.”
“정말요?”
“변하는 게 이상한 겁니다. 이제야 당신이 눈을 떴는데.”
체스터는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다. 그리고 수프를 떠서 내 입 안에 넣어 주었다.
“체스터.”
“네.”
“저 바깥에 나가고 싶어요.”
“…….”
“너무 답답해서 그래요. 네? 안 돼요?”
“하아……. 이것만 다 먹으면 그리하세요.”
수프 한 접시를 다 비워 내고 나서야 체스터는 휘청거리는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부드러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는 감각이 좋았다.
“율리아, 걷는 게 힘들면 말하세요.”
“업어 주게요?”
“안아드리겠습니다. 아직…… 당신은 환자니까요.”
불어오는 바람에 나부끼는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체스터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나 잘생길 수 있는 건지. 두 팔을 뻗어, 체스터의 목을 끌어안았다.
“안아 줘요.”
그는 안아 달라는 내 말에 가볍게 공주님 안기로 나를 안아 주었다.
그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웠다. 이렇게 안아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매번 안길 때마다 새로웠다.
“율리아.”
“네, 네?”
“아프지 마세요.”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체스터가 걱정하지 않게요.”
“…….”
“그런데 체스터, 범인은 찾았어요?”
궁금했다. 과연 누가 나를 죽이려고 한 건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알 수가 없었다.
책 속에서도, 내 첫 번째 삶의 기억을 통해서도 짐작이 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체스터 외에는 그 누구도 나를 죽일 거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겪어야 할 운명을 바꿨기 때문일까? 아니면 원작 스토리의 흐름을 바꿨기 때문일까?
“……율리아, 미안합니다.”
“왜요?”
“심증밖에 없어서, 물증을 확보 못해 추궁할 수가 없습니다.”
“…….”
“당신이 그렇게나 아파했는데, 범인을 잡아 찢어 죽여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왜요.”
“당신의 차에 독을 탄 하녀는 자살한 채 발견됐습니다.”
그에게서는 죄책감이 묻어났다. 진범을 찾지 못했다는 게 아쉽긴 했지만, 이렇게 자책하라고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율리아, 아프면 꼭 말해요.”
“알겠어요. 지금은 전혀 안 아파요.”
“……당신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체스터의 눈빛에는 나를 무척 걱정하고 있다는 감정이 가득했다.
“체스터, 저 세실이 보고 싶어요.”
“……율리아.”
“네?”
“아직 몸을 제대로 회복하지도 못했는데,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자제하는 게 좋겠습니다.”
“체스터, 어떻게 저한테 세실이 남이에요? 세실은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오빠의 처인데…….”
요즘 못 본 지 꽤 됐다. 원래는 조만간 볼 생각이었지만, 일주일간 쓰러져 있느라 세실을 볼 수가 없었다.
내가 쓰러지기 전에 황성에 갔을 때, 세실은 막 입궁했던 차라 쌓인 일이 많아 얼굴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체스터, 저 세실이 보고 싶단 말이에요!”
“……율리아.”
“네.”
“그렇게 보고 싶습니까?”
“네!”
“근데 오늘은 안 됩니다.”
안 된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였다.
역시 안 되는 걸까. 물론 체스터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세실이 보고 싶었다.
내 유일한 친구인데.
“율리아.”
내가 너무 시무룩해 보였던 걸까? 체스터는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내 이름을 불렀다.
“당신이 그렇게 원한다면, 내일 오라고 연락해 두겠습니다.”
“진짜요?”
“네. 당신이 그걸 바란다면 그리해야죠.”
체스터의 뺨에 입을 맞췄다. 고마워서라기보다는 그냥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깨어나서 물을 입으로 먹여 준 이후부터 체스터는 키스는커녕 나를 만지는 것조차 꺼렸으니까.
다행히 그는 내 행동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랑해요, 체스터!”
“율리아, 그렇게 웃지 마세요.”
“……제가 웃는 게 싫어요?”
“싫은 게 아닙니다. 그저, 지금은 그리 웃지 마세요.”
역시 내가 웃는 게 싫은 걸까? 아니면 세실을 보고 싶다고 해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그의 의중을 모르겠다.
“안 힘들어요?”
“무엇이 말입니까?”
“이렇게 안고 있으면 안 무거워요?”
분명히 무거울 텐데.
하지만 체스터에게서는 전혀 힘들어하는 기색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신기했다.
“율리아, 전보다 더 가벼워졌습니다.”
“그야…… 지금은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까요!”
“그러니 오늘부터 식사량을 늘리는 게 좋겠습니다.”
체스터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나른하게 웃었다.
“잘 먹으면 내일 세실 만날 수 있게 해 줄 거예요?”
“……연락은 해 두겠습니다.”
그는 내가 조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승낙했다.
“율리아.”
“네?”
“죽지도, 아프지도 마세요.”
“안 죽어요. 그리고 이제 안 아플 거예요.”
지금처럼 살아 있는 순간이 내가 원하던 삶이었는데 뭐가 부족하고 아쉬워서 죽을까.
몸을 스치는 바람이 부드러웠다. 정말 나는 살아 있는 게 맞다. 신께서는 내가 죽는 순간에 바랐던 그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었던 걸까.
“걱정 안 해도 돼요.”
내 말에 체스터는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전생에도 본 적 없는 따스한 웃음이었다.
분명 바람을 만끽하고, 두 눈에 풍경을 담기 위해 산책을 나온 건데 다른 건 전혀 눈에 보이지 않고 오로지 체스터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