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71화 (71/141)

#71화

주변 환경이 변하며 어렸던 내 몸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익숙하기 짝이 없는 길게 늘어진 은빛 머리카락이 눈에 보였다.

자그마했던 손이 다시 원래의 크기로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서야 본래의 몸으로 되돌아왔단 것을 자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책 속으로 환생한 것도 맞지만, 환생이 처음은 아니라는 것을.

체스터에 대해 과한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 이유는 책의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그 책 속에서 비참한 엔딩을 맞는 율리아가 내 첫 번째 삶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소설의 엔딩을 왜곡된 상태로 기억하고 있었다.

“윽!”

깨달음과 동시에 심장이 욱신거리며 식도와 위장이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괴로웠다. 마치 용암을 삼킨 것처럼 몸의 내부가 뜨겁게 타들어 가는 통증이었다.

너무 아팠다. 차라리 심장이 뜯겨 나가서 고통을 모르게 해 주면 좋겠단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몸이 저절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칠흑 같은 암흑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단지 이 끔찍한 통증이 멎어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멈춘 건 통증이 아닌 내 몸이었다.

“으…….”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마치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손가락 까딱하는 것조차 괴로웠다.

안간힘을 써서 몸을 버둥거리며 노력하자 전혀 움직일 것 같지 않던 손가락이 미약하게나마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죽었다면 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겠지?

이미 두 번의 죽음을 겪었기에 알 수 있었다. 죽으면 고통이 멎는다는 것을. 아직 살아 있기에 고통을 느끼는 거였다.

그러니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아직 죽은 게 아니었다.

죽은 게 아니라면 살고 싶었다. 죽음을 처음 경험한 게 아니어도 세 번을 이런 식으로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두 번이나 죽어 봤지만, 죽음은 익숙해지는 게 아니었으니까.

‘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사랑했던 사람에게 가장 바라 왔던 사랑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체……스터.”

분명 내가 말하고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내 목소리가 아닌, 메말라서 갈라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목에서는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마치 오랜 시간 자면 목이 메마를 때처럼 말라 버린 목구멍에서 오는 고통이었다.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바깥 소리가 들렸다.

챙강-.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제일 먼저 들렸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무척이나 익숙하지만, 많이 떨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지는 걱정이 가득한 음성.

“……율리아?”

체스터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몸이 조금씩 움직여지는 게 느껴졌다.

어두컴컴했던 시야가 밝아졌다. 분명 빛이 들어오면 체스터의 얼굴이 먼저 보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당황스러웠다.

분명 체스터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는데 그건 그냥 내 착각에 불과한 걸까? 아니면 내가 만들어 낸 환청에 불과한 걸까?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시선을 내리니 어떤 어린아이가 내 손을 붙잡고 있었다.

아까와 달리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아이는 내 손을 잡고는 어디론가 걸어갔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밝았던 주변은 서서히 암흑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점차 멀리서 희미한 빛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빛의 크기는 점점 커졌다.

빛이 온전히 보일 때, 내 손을 잡은 아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황족의 상징인 찬란한 은빛 머리카락.

하지만 선명한 적안을 포함해 분위기로나 이목구비로나 저절로 체스터의 어린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아이였다.

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지만, 무의식적으로 나는 아이의 손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환한 빛에 몸이 휩쓸리면서 아이의 모습은 사라졌다.

“율리아! 정신이 듭니까?”

내 이름을 부르며 덜덜 떨고 있는 목소리를 시작으로, 다양한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뿌옇던 시야가 천천히 선명해지며 서서히 앞이 보였다.

아직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충 내 곁에 체스터가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파.”

소리를 내자, 아까와 같은 목구멍이 갈라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움직여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몸이 이제는 잘 움직여졌다.

체스터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의 체온이 느껴지자 비로소 여기가 현실이라는 걸 깨닫고 안심할 수 있었다.

이제야 본 체스터의 얼굴은 아주 엉망이었다.

꼭 며칠 동안 잠도 못 잔 사람처럼 눈 밑이 퀭하다 못해 아주 새까맸다.

목이 바싹 말라 있어서, 말을 하고 싶어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물…….”

체스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 허리를 세워 등 뒤에 베개를 놓아 편하게 앉을 수 있게 해 줬다.

그러고는 탁자에 놓인 컵에 물을 따라서 내게 주었다.

컵이 차갑지 않고 미지근했다. 부담 없이 마시기에 딱 좋은 온도.

입 안에 물을 머금는 것까지는 했지만 삼키는 게 어려웠다.

한 번만 삼키면 두 번째는 쉬울 텐데. 그 한 번이 어려웠다.

“콜록콜록!”

결국 한 모금도 삼키지 못하고 기침과 함께 모조리 뱉어 냈다. 물 한 모금 삼키지 못하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체스터는 컵을 앗아 가더니 그 안에 있는 물 한 모금 정도를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내 뺨을 붙잡더니 입을 겹쳐 왔다. 연결된 틈 사이로 그는 물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내 몸이 거부하는 바람에 물은 입술을 타고 턱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체스터는 개의치 않고 내 입 안에 혀를 밀어 강제로 물을 삼키게 하려 했다.

그렇게 간신히 목구멍 너머로 물이 조금 넘어갔다. 그걸 확인하고서야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체스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봤지만, 체스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은커녕 입 한 번 뻥끗하지 않았다.

단지 나를 바라보며 내 손에 컵을 쥐여 줄 뿐이었다.

일단 물을 삼켜 목을 축였다.

“체스터?”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내가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걱정했어요?”

“…….”

평소 같았으면 나를 끌어안거나 했을 사람이,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손가락 하나 대지도 않았다.

“체스터, 제 걱정했어요?”

“율리아.”

“근데 왜 평소답지 않게 제게서 떨어져 있어요? 보통은 제 옆에 있잖아요.”

“…….”

“가까이 와요.”

이렇게까지 말을 해서야, 체스터는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내 옆에 걸터앉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고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율리아.”

“네.”

“정말…… 정말 많이 걱정했습니다.”

체스터는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붙잡은 채로 고개를 떨궜다.

많이 걱정한 사람처럼 보이긴 했다. 하긴, 눈앞에서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는 걸 봤으니까.

체스터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 해도 걱정했겠지.

“당신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안 죽었잖아요.”

“다시는 당신이 눈을 뜨지 못하는 줄 알고…….”

“멀쩡하게 살아 있잖아요.”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당신이 쓰러지고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얼마나 지옥 같았는지.”

체스터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뚝뚝 묻어났다.

“제가 너무 부주의했습니다.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체스터.”

“많이 아팠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체스터!”

나는 그에게 이런 자책의 말이 듣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얼굴을 보고 싶어요.”

“…….”

“안 보여 줄 거예요?”

이제야 체스터는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의 모습과 비교하면 살이 빠져 보였다.

눈 밑의 다크서클이 진해져 있었고, 피부도 거칠어져 있었다.

“체스터, 잠 못 잤어요?”

“…….”

“네? 어디 말 좀 해 봐요.”

독을 먹고 쓰러진 사람은 나인데, 왜 체스터가 아픈 것처럼 보이는지.

그만큼 나를 많이 걱정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이 와중에 체스터가 나를 걱정했다는 점에서 기쁨을 느꼈다는 게 참 바보 같았다.

“체스터.”

“걱정했습니다. 당신이 영영 눈을 뜨지 못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이제 눈을 떴잖아요.”

“아파서, 괴로워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괜찮아요, 체스터.”

정말로 체스터가 나를 걱정했다는 게 느껴졌다.

“아, 제가 깨어나지 못하는 동안 아빠랑 오빠는 안 왔어요?”

“……왔었습니다. 그리고 황궁 의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요?”

“네. 확실히 황궁 의가 실력이 좋더군요. 수도에 있는 의원들을 전부 끌어모았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

그, 그렇게나 스케일을 크게 벌였어? 그건 좀 과한 감이 있는데.

“그래도 지금이라도 깨어나서 다행입니다, 율리아.”

체스터가 나를 걱정했다는 건 충분히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고작 손만 붙들고 있는 건지.

진한 포옹이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껏 사경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현실로 돌아왔는데.

“저 안아 줘요.”

“율리아, 당신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아니! 제가 다른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안아 달라는데 그것도 안 돼요?”

“수프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체스터는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갔다. 안아만 달라는데, 사람 한번 안아 주는 게 뭐가 어렵다고 그냥 저렇게 나가는 건지.

정말 너무하다. 내가 많은 걸 바란 것도 아니고, 그냥 한 번만 안아 달라는데!

일주일 동안 누워 있어서 그런지 몸이 찌뿌둥했다. 침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대로 넘어졌다.

우당탕탕-.

주위에 아무도 없어 다행이었다. 큰 소리를 내면서 넘어지는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는 좀 그러니까.

물론, 이건 이거고 아픈 건 아픈 거였다!

“아그그…….”

내 꼬리뼈! 깨어나기 전까지는 목만 아프고 다른 곳은 안 아팠는데, 지금은 몸이 아팠다.

일어나려고 하는 그 순간, 침대 밑에 무언가가 있는 게 보였다.

내 눈이 이상한 게 아니라면 저건 분명 검이었다. 대체 왜 검이 침대 밑에 있는 거지?

“이건…….”

의아함에 검을 잘 살펴보았다. 착각도, 내 기억이 틀린 것도 아니라면 저 검은 체스터가 늘 차고 다닌 검과 흡사했다.

아니, 똑같은 검이라 해도 무방했다. 그렇다면 저 검의 주인은…….

‘체스터?’

그 순간 방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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