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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70화 (70/141)

#70화

승전 기념 파티에서 그를 만난 건 가히 운명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그를 마주친 순간 몰라볼 수 없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그것을 증명했으니까.

어렸을 때 만났던 그 애가 분명했으니까.

“아빠, 저 사람 누구야?”

“아, 가장 많은 공을 세우고 귀환한 체스터 지크베르트 공작이구나.”

“……체스터였구나.”

잘 어울리네. 잘난 얼굴에 저런 이름이라.

사람이 어쩜 저렇게 잘생길 수가 있는 거지? 잘생긴 흑표범? 아니, 나른한 늑대였다.

“율리아?”

“아빠, 난 신경 쓰지 마!”

아까 체스터가 향했던 곳으로 다급히 움직였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지만 그를 따라잡기 위해 계단을 올라갔다.

“체스터!”

이쪽저쪽을 돌아다니며 문을 열었다. 많은 곳을 뒤져 봤지만, 체스터가 보이질 않았다.

분명 이쪽으로 왔던 걸 봤는데,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다른 곳으로 이동이라도 한 걸까.

아쉬움에 마지막 문을 연 순간,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이 두 눈에 들어왔다.

“체스터!”

“……황녀 전하?”

달빛이 비치는 창가에서 밤하늘을 등진 그의 모습은 가히 고혹적인 악마를 연상시킬 정도로 수려했다.

검은 머리카락은 밤하늘에 녹아들어 있었고, 핏빛 눈동자만이 어두운 배경 아래 번뜩이는 게 꼭 포식자를 눈앞에 둔 기분이었다.

“율리아라고 불러!”

“제가 어찌 황녀 전하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겠습니까.”

“괜찮아! 황녀인 내가 허락하는 거니까!”

“……황녀 전하께서는 제게 무슨 용무가 있으십니까?”

“사랑해!”

아, 너무 갑작스러운 고백일까? 하지만 진심인걸.

내가 몇 년씩이나 찾았던 사람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는데. 오늘에 와서야 깨달았다.

내 운명이 내 앞에 나타났다는 것을.

“황녀 전하, 사람을 착각하신…….”

“아냐! 내 운명은 너인걸! 다시 본 순간 깨달았어. 네가 내 운명이라는 걸!”

체스터는 황당해하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게 대수인가.

무려 황녀인 내가 사랑한다는데. 그걸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제국에 없으니까.

“우리 결혼할래?”

“…….”

“응? 대답!”

“……황녀 전하, 보통은 이런 식으로 결혼하지 않습니다.”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 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황족인걸.”

“제 말의 뜻은…….”

체스터와의 재회였다. 어렸을 때와는 다르게 귀엽다기보다는 잘생겼다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그때보다는 지금이 나아 보여서 다행이었다.

눈 밑이 검은 걸 보니 잠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바쁜 모양이지만, 그래도 초췌한 정도는 아니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게. 다음에 또 만나!”

“…….”

“내가 먼저 보고 싶으면 황성으로 와! 네게는 내 성에 사전 연락 없이 방문하는 걸 허락할 테니까.”

체스터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괜찮았다. 내가 체스터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내가 더 많이 그를 사랑한다는 걸 표현하면 된다. 그러면 언젠가 체스터는 내 진심을 알아주고 나를 기억해 줄 테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늘 체스터를 찾아다녔고,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과 행동으로 표현했다.

“체스터!”

매일 내가 찾아가면 그는 귀찮아했지만 그래도 나는 좋았다. 체스터의 얼굴을 매일같이 볼 수 있었으니까.

내가 그동안 그 애를 찾지 못한 이유는 그가 전쟁터에 있었기 때문이었단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보지 못했던 만큼 더 보고 싶은 마음에 하루도 빠짐없이 지크베르트 공작저를 집처럼 드나들었다.

내가 찾아가지 않으면 체스터는 절대로 나를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그런 내가 싫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기다리고 기다렸던 체스터의 시선을 다른 여자에게 빼앗긴 것으로도 모자라서, 내가 사랑하는 그가 내 죽음을 바라는 지경에 이르렀다.

“……넌 반드시 후회할 거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고 기다려 왔는데,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를 미워하고 원망하지만, 동시에 너를 너무 사랑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진즉 너를 만난 그날 죽어 버렸을 테니까.

내가 살아 있는 이유가 너를 만나기 위함이었으니, 삶의 이유인 네가 내 죽음을 바란다면 기꺼이 죽어야겠지.

네가 날 살게 했으니, 내 목숨을 거두는 것도 너라는 건 당연한 순리인데.

왜 이렇게 슬프다 못해 괴로운지.

나는 겁쟁이라, 차마 네가 준 칼로 나를 찌를 수 없어서, 황성의 연못으로 몸을 던졌다.

물이 아닌 땅에 떨어지면, 팔이나 다리가 부러지기만 하고 네가 바라는 나의 죽음은 없을 테니까.

물에 빠진 채로 숨이 멎어 죽어 가는 것이 나아서. 괴롭고 고통스럽더라도 지금보다는 덜 아프지 않을까.

네게 저주의 말을 퍼부었는데, 왜 조금의 후련함도 내게는 느껴지지 않는 건지.

몸에서 힘을 풀었다. 추락하면서도 그가 있을 곳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풍덩-.

차가운 냉기가 온몸을 휩쓸었다. 아프고 괴로운 만큼 살고 싶어 발버둥을 치게 됐다. 막상 이렇게 되니까 이대로 죽기는 억울했다.

숨이 온전히 꺼지기 전, 신께 기도했다.

‘가능하면 다시 한번 더 체스터를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보다 더 간절했던 건, 다음 생이 존재한다면 이 모든 괴로움을 잊고 감정도 잊은 채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그 상태로 시야가 암전되었다.

* * *

어둠 속에서 헤매고 헤매다 다시 눈을 뜬 곳은 처음 보는 환경이었다.

“어머, 사라야! 정신이 드니? 어서 의사 선생님을!”

“엄마랑 아빠야. 엄마, 아빠 알아보겠어?”

정신이 멍했다. 아무런 기억도 없었다. 머릿속이 그저 백지였다.

“아, 아……!”

입술을 달싹였지만 단지 아픔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목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갈라질 듯한 건조함에 소리를 삼키며 고통을 뱉어 냈다.

내가 누군지,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이 사람들은 누군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들이 내게 물을 건네주었다. 건조한 목을 축이기 위해 물을 머금었지만 이내 삼키지 못하고 토해 냈다.

“컥, 케헥!”

“사라야!”

고통을 간신히 삼키고서 다시 조심스럽게 천천히 물을 목구멍 너머로 넘겼다.

물을 삼키자 건조했던 목이 조금씩 나아졌다.

“……그, 저…… 저는 누구예요?”

내 이름은 아마도 ‘사라’인 것 같았다. 손에 쥔 물컵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며 초조함을 숨겼다.

내가 누구인지도, 나이가 몇 살인지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이 상황이 너무 낯설었다.

눈앞의 두 사람은 주삿바늘이 꽂혀 있지 않은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네 이름은 홍사라고, 우리의 딸이란다. 교통사고 이후…….”

“……근 일 년 만에 깨어났단다. 우리는 너의 엄마랑 아빠야.”

나를 붙잡고 슬피 우는 두 사람을 보다가 울컥하는 감정이 일렁여서, 옆을 돌아보자 낯선 풍경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왠지 깊은 꿈을 꾸고 깨어난 기분이었다.

“엄마…… 아빠……?”

단지 네 글자를 입 밖으로 내뱉었을 뿐인데, 두 사람은 아까보다 더 슬프게 울었다.

“네가…… 네가 깨어나서 다행이야.”

나는 사고를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기억 상실증에 걸렸지만, 일상생활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을 거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할 수 있었다.

양손에 엄마와 아빠의 손을 잡고 병원에서 나와 차를 타고 편안히 집으로 향했다.

그 이후로는 평범했다. 엄마와 아빠의 넘치는 애정과 과보호 속에서 자라며 대학에 합격하고 입학할 날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무언가 잊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발걸음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왠지 도서관에 가면 이 의문을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도서관에서 제목도 저자도 적혀 있지 않은 이상한 책을 발견하고 펼쳐 보았다. 로맨스 소설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읽었지만, 야한 내용은 하나도 없어서 결국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결말이 궁금해서 계속 읽어 나갔다.

최종 흑막이 된 섭남은 저주를 받아 미쳐 버려, 황성을 불태우고 자살한다는 어이없는 결말에 웃음만이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뭐, 여주와 남주는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적혀 있었다.

“…….”

그저 책 속에서 죽은 황녀만 불쌍하단 느낌이 들 뿐. 그러나 묘하게 이후의 이야기가 나름 궁금해서 외전도 있나 도서관 전체를 둘러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책이라도 빌려 가려는데, 원래 자리로 다시 돌아가자 책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누군가 가져간 건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나는 곧 그 책에 대해서는 잊었다.

얼마 후 대학에 가기 전, 고등학교 친구들과 술을 진탕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앞으로 자주 볼 수 없을 친구들과 광란의 파티를 열며 과음을 했더니 어질어질했다.

택시를 타고 가도 됐지만,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고 다리만 건너면 큰길이라 사람도 꽤 있었기에 휘청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그때, 발목이 꺾이는 고통이 느껴지며 그대로 다리 밑에 있는 강물 속으로 빠졌다.

“사, 살려……!”

몸을 움직여도 봤지만, 옷이 물에 젖어 무거워진 탓에 서서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입고 있는 두꺼운 패딩 때문인지. 물속이 그리 춥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이런 무력감과 물이 온몸에 차오르는 감각을 언젠가 경험해 봤던 것 같았다.

언제였는지 기억나진 않았지만, 물에 빠져 죽는 게 처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고 괴로웠지만, 취기에 의해 무뎌졌다.

서서히 짙은 어둠만이 나를 잠식할 뿐이었다.

* * *

다시 깨어났을 때는 유럽풍의 천장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나를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구불거리는 찬란한 백금빛 머리카락에 선명한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굉장한 미인과 눈이 마주쳤다.

“율리아.”

저건 새로운 내 이름일까. 팔을 뻗자 오동통하고 현저히 작은 손이 나를 반겼다.

낯설기 짝이 없는 아기처럼 작은 손에 당황한 것도 잠시, 이내 내가 죽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는 선택을 했다. 단지, 엄마와 아빠한테 작별 인사도 못 했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황녀라는 사실은 전생과 비교도 안 되는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내 풀 네임이 율리아 베아트리스라는 것을 인식한 이후부터 나는 절망과 두려움을 맛봐야만 했다.

율리아 베아트리스라는 풀 네임은 내가 어느 소설에서 읽었던, 짝사랑하던 남자에게 죽는 비운의 엑스트라였으니까.

그래도 황후인 엄마의 애정을 받는 건 행복했다. 나를 안아 주는 엄마에게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이 안정감을 주었으니까.

엄마는 몸이 약해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자연히 유모와 함께하는 시간이 더 많았지만, 나는 찰나라도 엄마와 함께하는 순간이 기쁘고 좋았다.

내게 책을 읽어 주는 것도, 말없이 나를 안아 주는 것도 전부 기뻤으니까.

소설 속이어도 괜찮았다. 서서히 적응해 가고 있었으니까. 기쁘니까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엄……마.”

하지만 그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다. 엄마가 죽은 이후부터는 내 삶의 모든 게 일그러졌으니까.

마치 나는 행복할 수 없다며 누군가 속삭이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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