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화가는 체스터의 생일에 맞춰 맞춤 제작한 액자에 넣은 완성된 초상화를 공작저로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체스터는 화가에게 따로 무슨 말을 한 것처럼 보였다.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궁금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렇게 화가는 돌아갔다.
“체스터.”
“네.”
“피곤해요.”
일어나 있던 그에게 쪼르르 다가가 얼굴을 그의 가슴팍에 파묻었다.
그대로 체스터의 품으로 파고들자, 그는 나를 마주 안아 주었다.
따뜻한 체온과 규칙적인 그의 심장 소리는 안정감을 들게 했다.
“피곤합니까?”
“조금…… 피곤해요.”
“저녁만 먹고 자요.”
체스터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좋았다. 꼭 사랑받는 느낌이 들어서.
“율리아, 피곤하면 제가 씻겨 줄까요?”
“…….”
“제가 율리아를 한두 번 씻겨 본 것도 아닌…….”
“언제요?”
아니, 물론 씻지 않고 잠들었어도 찝찝함이 없었긴 했지만,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유가 곯아떨어진 나를 체스터가 씻겨 준 거라면?
“체스터? 왜 저는 기억이 없죠?”
“……그냥 잠들면 일어났을 때 찝찝할 것 같아 제가 씻겼는데, 싫으십니까?”
아니, 싫다기보다는 좀 수치스러웠다.
물론, 우리가 볼 꼴 못 볼 꼴을 다 본 사이라지만 그래도 부끄러웠다.
“충분히 제가 씻을 수 있어요!”
“네, 율리아.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
“씻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이며,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는 그의 손은 무척 장난스러웠다.
체스터의 가슴팍에 닿아 있던 얼굴을 확 떼어 냈다.
“율리아, 얼굴이 되게 붉습니다.”
“…….”
“지금 율리아, 당신 표정이 얼마나 자극적인지 압니까?”
“……전혀 모르겠는데요.”
“되게 잡아먹고 싶게 생겼어요.”
다급하게 뒷걸음질 쳤다. 달콤함에 취해 잠시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내 허리가 왜 아픈 거고, 그 원흉이 누구였는지 찰나 잊어 버렸다.
“율리아, 왜 도망칩니까? 누가 보면 제가 당신을 괴롭히는 줄 알겠습니다.”
“……괴롭히는 건 맞잖아요.”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괴롭히는 게 아니라.”
체스터는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더니 멀었던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그의 손이 내 뺨을 상냥하게 쓰다듬으며, 짙은 웃음을 피운 채 나직한 음성으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 주는 거라고.”
“그게 무슨 사랑해 주는 거예요? 괴롭히는 거지!”
“흐응? 율리아, 지금까지 제가 괴롭히는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까?”
“……그렇게만 생각한 건 아닌데!”
근데 괴롭힌 건 맞지 않나? 나도 되게 헷갈려지네.
“전 되게 율리아를 사랑해 준 건데.”
“…….”
“괴롭히는 걸로 느꼈다니 아쉽습니다. 아니면 제 애정 표현이 부족했던 겁니까?”
체스터의 입술을 손으로 덮었다.
“전혀 안 부족하고, 수작도 부리지 마요.”
“흐음…….”
체스터의 눈이 아주 악랄해 보이게 접혔다. 되게 꿍꿍이가 가득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이내 말캉하고 축축한 무언가가 내 손바닥을 핥는 감촉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다급히 그의 입술을 덮고 있는 손을 떼어 내려 했다.
그러나 체스터의 손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어……?”
“율리아.”
체스터는 짙은 욕망이 번뜩이는 눈빛으로 내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그의 시선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존재했던 감정 때문인지 내 심장이 큰 소리로 두근거렸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마 새빨간 색으로 얼굴이 물들지 않았을까 걱정됐다.
“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이건 수작 부리는 게 아닙니다. 애초에 수작일 수가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
“우리는 부부니, 이건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체스터는 나른한 웃음을 피워 냈다. 붙잡고 있던 내 손목을 놓은 그의 손은 이내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유혹하는 거라고 말했을 텐데.”
그 말을 끝으로, 내 입술은 그의 입술에 의해 집어삼켜졌다.
다른 그의 손은 내 허리를 휘감으며 휘청이는 내 몸을 단단히 붙잡았다.
“읏, 체스터!”
옷 안을 파고드는 차가운 손에 몸이 흠칫거리며 떨렸다.
아찔하고 아득한 감각이 몸과 머릿속을 잠식해 갔다.
* * *
어제 피곤해서 일찍 자려고 했는데 일찍 못 잤다.
아마 지금 거울을 보면 눈 밑이 검게 변해 있을 게 분명했다. 어젯밤 내내 괴롭힘……이 아니라 너무 사랑받아서 잠들 수가 없었다.
“윽……!”
정말 하루라도 허리가 성한 날이 없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 건지. 허리에 찜질팩은 올려 주고 갔다. 그냥 마저 잠이나 더 자야겠다.
“끄응!”
다시 푹 자고 일어나니 그나마 몸은 움직일 수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체스터가 있을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여는 순간 일을 하는 체스터가 두 눈에 들어왔다. 역시 일하는 모습이 잘 어울리는 내 남편이었다.
“율리아?”
“바빠요?”
솔직히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바쁘다는 것을. 오죽하면 일어나자마자 집무실에 와서 일만 했을까.
혹시 내가 지금 체스터가 일하는 걸 방해하고 있는 걸까?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건지 체스터는 바로 대답하며 나를 불러세웠다.
“안 바쁩니다.”
“……진짜요?”
“이제는 안 바쁩니다, 율리아.”
체스터는 자신 쪽으로 가까이 오라는 것처럼 손짓했다.
“이리 와요, 율리아.”
“…….”
내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강아지인 줄 아나. 그래도 체스터가 오라고 하니까 가야지.
재빠르게 체스터에게 가까이 가자 그가 내 허리를 끌어당기더니 무릎 위에 앉혔다.
“율리아, 괜찮습니까?”
“…….”
“어제는 되게 자제했는데…… 그래도 아침에 많이 아파하는 것 같아서 찜질팩을 올려 뒀습니다.”
“체스터, 진짜 안 바빠요?”
“정말 안 바쁩니다, 하고 싶은 거 있지 않습니까? 어서 말하세요.”
되게 사소한 거라서 하찮게 느껴질 수 있고, 내가 바쁜 체스터의 시간을 빼앗는 걸 수도 있는데.
일하는 걸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율리아, 어서 말하세요. 부담 갖지 말고.”
“……점심 먹고, 정원에서 차 마실래요?”
“네. 좋습니다.”
이렇게 간단히? 이렇게 쉽게?
“진짜요?”
“네. 그러면 제가 거짓말을 하는 걸로 보입니까?”
“……바빠 보이는데 이런 의미 없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게 할 수는 없잖아요.”
“율리아,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을 낭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체스터가 말로는 바쁘지 않다고 해도 펜을 놓지 못하는 손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직도 책상 위에는 서류가 가득했다.
“거짓말쟁이.”
체스터의 무릎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이내 허리가 붙잡혀 도로 그의 무릎 위에 착석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뒷덜미에 닿았다.
“체스터?”
“어디 가렵니까? 앉을 때는 마음대로여도, 일어날 때는 마음대로가 아닙니다.”
“……제가 지금 일하는 거 방해하잖아요.”
“전혀 방해되지 않습니다. 이러고 있으면 일의 능률이 올라갑니다.”
“……거짓말.”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닌 이상 체스터는 전혀 일하고 있는 손이 아니었다.
그는 전혀 집중을 못 하고 있었다.
“역시 제가 방해하는 게 맞죠?”
“율리아.”
“왜요?”
“고개 돌려 보세요.”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내 허리를 휘감고 있던 체스터의 손이 내 뒷덜미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대로 그의 입술과 내 입술이 맞물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서야 맞물렸던 입술이 떨어지며 차가운 공기가 폐로 공급되었다.
불규칙적으로 변한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를 쏘아보았다.
“하아, 하…….”
“예쁩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말 틈만 나면 이렇게 훅 치고 들어왔다.
잘생긴 얼굴로 이렇게 예고도 없이 들어오면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운데.
“할 일 얼마 안 남았으니, 이것만 끝내고 점심 먹으러 가죠.”
“……얼마나 더 걸리는데요?”
“금방 끝납니다.”
“금방 끝나니까 일어날래요.”
“다시 생각해 보니 좀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그냥 앉아 있어요, 율리아.”
말을 바꾸는 게 수상했지만 그냥 넘어갔다. 이런 행동은 귀여웠으니까.
* * *
점심 식사 후, 정원 한가운데 있는 테이블에 내가 먼저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다양한 종류의 디저트들이 가득했다. 의자에 앉자 하녀는 기다렸다는 듯 차를 가지고 왔다.
향긋한 차향을 맡으며 한 모금 삼켰다.
“……맛이.”
조금 이상했다. 기묘하게 달랐다. 황성에서 마시던 것과 다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찻잎이 상하기라도 한 걸까?
에이 기분 탓이겠지. 차 종류가 다른 걸 수도 있으니까.
체스터는 할 일이 끝났는지 내게 돌아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사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체스터, 있잖아요…… 저 아이 갖고 싶어요.”
“……왜 갑자기 아이가 가지고 싶습니까.”
“체스터는…… 아이가 싫어요?”
“……네. 싫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심장이 철렁였다.
매번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피임했다. 그리고 전에도 내게 아이는 입양을 하면 된다고 했고.
정말 그는 아이를 싫어하기에 그러는 걸까.
터질 듯이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차를 삼켰다.
체스터 역시 내 반응이 신경 쓰이는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율리아!”
체스터는 내게 손을 뻗어 내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쳐냈다.
챙그랑-
맑은 소리를 내며 홍차와 함께 찻잔은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해서 그를 바라본 순간이었다. 이상하게 목구멍에서 뜨거운 액체가 올라오는 느낌이 드는 게.
분명히 나는 차를 삼켰는데, 왜 차가 역류하는 기분이 드는 건지.
“쿨럭!”
기침이 나옴과 동시에 입을 덮었던 손에는 검붉은 피가 묻어나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다시 시선을 움직여 체스터를 봤지만 적어도 그가 한 짓은 아닌 것 같았다.
그가 꾸민 일이었다면 저렇게 당황으로 물든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을 테고 무엇보다 내 찻잔을 쳐내지 않았겠지.
“……체스터.”
그럼 누구지? 나를 죽일 사람은 체스터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목구멍이 뜨거웠다. 아니, 마치 불을 삼킨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몸에는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 몸이었지만 내 몸 같게 느껴지지 않았다.
기분 탓이 아니라면 체스터가 기우는 것 같았다. 아닌가? 내가 기우는 건가? 그리고 시야가 어지럽게 일렁였다.
“율리아!”
체스터가 이 정도로 당황하고 놀란 표정은 처음이었다.
그는 쓰러진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더 이상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와서 나를 끌어안았다는 감촉은 느껴지는데 얼굴은 왜 제대로 보이지 않는지.
이내 눈이 감기면서 고통스러운 어둠이 내게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