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누군가 내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눈을 깜빡거리며 뜨자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붉은 눈동자가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손의 주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체스터, 뭐 해요.”
“당신이 깰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마에 그의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율리아, 허리 상태는 어떻습니까?”
“……누구 때문인데요.”
“많이 아픕니까? 당신이 너무 예뻐서 그럽니다. 유독 당신 앞에서는 자제력을 잃습니다.”
“아니…… 뭐, 죽을 만큼 아픈 건 아니고…….”
아차! 말을 내뱉고 난 후에 깨달았다.
지금 체스터는 이미 내 위에 올라타 있었다. 나를 담아낸 그의 눈동자에는 뜨거운 욕망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체, 체스터…… 오늘 황성 가기로 했잖아요!”
“네. 오늘 가기로 했던 거지, 아침부터 간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 어…… 그, 그렇긴 한데……!”
당황한 탓도 있고, 당장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버버 댔다. 결국에는 체스터의 입술이 내 입술을 가볍게 삼켰다.
뜨거운 살덩이가 건조한 입술을 적시며 촉촉한 안으로 파고들었다. 안에서 뒤섞이는 부드러움에 결국 그를 말리는 걸 포기했다.
아침부터 체력소모가 심할 게 분명했다.
오늘 황성에 가야 하는데, 이래서야 갈 수 있을지. 체스터는 아침부터 체력이 너무 넘쳐서 문제였다.
서서히 침대에서는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 *
“아그그…….”
“율리아.”
“……손대지 마요.”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허리가 이렇게 욱신거리는 건데! 분명 조금만 한다며 나를 다독였던 남자가 끝까지 몰아붙였다.
오늘 아빠랑 오빠한테 가기로 했는데.
체스터는 뭘 잘했다고 저렇게 처연한 표정을 짓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율리아…… 많이 아픕니까?”
“……누구 때문인데요!”
“미안합니다. 분명 자제하려고 했는데…… 율리아가 너무 예쁜 바람에…….”
체스터는 선량한 대형견의 탈을 쓴 늑대였다. 비에 젖은 강아지마냥 처량해 보이는 얼굴에 넘어가서는 안 됐다. 절대로!
절대 넘어가면 안 되는데. 진짜…… 안 되는데.
체스터는 자연스럽게 내 손목에 입을 맞췄다. 그 모습이 색정적으로 비춰졌다. 정말 얼굴이 반칙이었다. 저 얼굴로, 이렇게 굴면 어떻게 밀어낼 수 있을까.
이러면 화도 낼 수가 없잖아!
“……황성에 가야 하니까. 특별히 이번만은 뭐라고 하지 않을게요.”
“네, 사랑합니다.”
나른한 웃음을 짓는 체스터의 얼굴에 심장이 간지럽다 못해 녹아버릴 것 같았다. 황급히 그에게 잡혀 있던 손을 뺐다.
“체스터, 이제 가요.”
“네, 율리아.”
그래도 오후에는 출발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기서 황성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원래는 어제 도착해서 방문했어야 했는데.
체스터 때문에 전부 틀어졌다. 이건 전부 체스터 탓이야!
약간 원망이 담긴 눈빛으로 체스터를 봤지만, 그는 뭐가 좋은 건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나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왜요.”
“귀여워서요.”
“…….”
“예쁘고, 귀엽고. 그리고 제 눈에만 예쁘면 좋겠는데, 다른 날파리 같은 것들에게도 예쁘게 보일 걸 생각하니…….”
체스터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좀 기분이 더럽습니다.”
나는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이전만 해도 충분히 불안해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
“체스터, 제가 남들 눈에 예뻐도 이미 저는 체스터 건데요!”
“……당신이 제 것입니까?”
“이제 제 이름은 율리아 베아트리스가 아니라, 율리아 지크베르트인 걸요.”
“……그렇습니까.”
“네. 이제 저는 제국의 유일한 황녀가 아니라 지크베르트 공작 부인인 걸요.”
“제가 당신을…… 온전히 소유해도 되겠습니까.”
“네. 저도 체스터를 사랑하니까요.”
체스터는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척 불안해하는 표정이었기에 바로 사랑한다고 그에게 속삭였다.
그러자 체스터의 얼굴이 가까워지더니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에 닿았다. 놀라는 것도 잠시였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자연스럽게 두 눈이 감겼다. 그러자 그의 손이 내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사랑받는다는 게 이런 걸까.
그래도 어느 정도 자제할 필요는 있었다. 내게 달라붙는 체스터의 어깨를 밀어 거리를 두었다.
“곧 도착하잖아요.”
“……아쉽습니다. 황성이 조금 더 멀었다면 좋았을 텐데.”
도착했는지 다행히 타이밍 좋게 마차가 멈췄다. 근 일주일 만에 보는 소중한 가족이었다.
“율리아.”
“……오빠? 왜 오빠가 굳이 여기에 나와 있어?”
“아버지가 너만 오래.”
“체스터는?”
“걱정 마. 네 남편이랑은 내가 할 말이 있으니까.”
“……알았어. 체스터 절대로 괴롭히지 마!”
“그래. 알겠으니까 어서 아버지한테 가봐. 너 많이 기다렸어.”
“……알겠어!”
체스터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오빠를 걱정하는 거였다.
아무리 그가 내게 다정하고 푹 빠져 있어도, 그건 나한테만 해당하는 거지 오빠한테 해당하는 게 아니니까.
체스터가 지금 나를 죽일 것 같지는 않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충분히 죽이고도 남을 것 같아서.
오빠의 목숨까지 생각해 주는 이런 착한 동생이 어디에 있을까.
그런 이유도 있고, 오빠가 내 남편한테 뭐라고 하는 것도 싫었다.
“체스터, 만약 오빠가 괴롭히면 말해요.”
“네, 그러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빠는 진짜 체스터 괴롭히지 마.”
오빠는 마지막에 다시 물었을 때는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그저 웃기만 할 뿐.
체스터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원작 흑막인데 어련히 잘하려고.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조금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아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빠!”
집무실이 아닌 온실로 안내받았기에 의문이 들었지만, 온실에서 티타임을 가지려 한 것 같았다.
어찌 본다면 세심한 배려였다.
“일단 앉거라.”
아빠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율리아, 어떠니.”
“네? 뭐가?”
“결혼이…… 만족스러운지 묻는 거란다.”
과분할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매일 체스터의 넘치는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내느라 몸이 성한 날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건 꽤 달콤한 삶이었으니까.
“불만족스러울 게 뭐가 있겠어.”
“그래. 네가 원한다면 이 아빠는 언제든 널 황성으로 데려올 수 있단다.”
“그럴 일이 없어야지! 나는…….”
체스터가 좋은걸. 당연한 대답이었지만 쉽게 입술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체스터처럼 잘생기고, 신분도 부족함 없고, 명성도 준수하고, 신랑감으로서도 연인으로도 부족함 하나 없는 남자가 어디 있을까.
“아빠, 내가 체스터랑 이혼할 리가 없잖아.”
“그저 네가 알고 있기를 바랄 뿐이란다. 네가 힘들거나 도망치고 싶다면 황성은 언제나 네게 열려 있을 테니, 돌아오거라.”
“아빠는 걱정이 너무 많아. 나는 이미 충분한데!”
“그래. 네가 행복해 보여 다행이구나. 걱정 많이 했단다.”
“체스터가 잘해 줘.”
“네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황성으로 오거라. 네가 바라는 건 전부 들어줄 테니.”
이제 아빠는 내게서 죄책감을 걷어낸 거야? 아니면 아직도 내게 미안해서 그렇게 말하는 거야.
아빠가 잘못한 건 맞지만, 이제 난 그 과거를 잊고 싶었다.
계속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아빠를 보면 괜히 그때가 떠올라서, 괴로웠다. 나도 아픔만이 있는 기억이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려 했을 때, 삶을 포기한 순간 만났던 체스터 덕분에 나는 지금껏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런데 아빠는 계속 과거의 상념에 잠겨 있었다. 내가 용서한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빠, 전에도 말했지만 난 아빠 용서해. 그러니 과거에 얽매이지 마.”
“…….”
“지금은 괜찮아. 아빠도, 오빠도…… 나를 사랑하잖아. 그리고 체스터도 나를 사랑하고. 그래서 나는 이 결혼이 만족스러워.”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니까 황성에도 자주 올게.”
아빠는 힘겹게 웃었다. 나는 아빠의 아픔이자 괴로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죄책감의 산물이었다.
그래도 아빠의 걱정을 받는 게 싫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빠. 전에도 말했지만…… 그날의 진실…… 체스터한테도 말해 줘야 해.”
“그래.”
“아빠가 말해 줘도 되겠다고 판단하면 그때 체스터만 불러서 진실을 알려 줘.”
찻잔을 전부 비우고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이만 나는 가 볼게.”
“그래. 언제든 이 아빠의 도움이 필요하거든 찾아오거나 편지를 하렴.”
“응! 아빠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
온실에서 나와 오빠와 체스터가 있다는 곳으로 안내받았다.
혹시라도 오빠가 체스터를 괴롭히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됐으니까. 물론 체스터가 가만히 있을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서 체스터를 걱정한다기보다는 오빠를 걱정하는 거였다.
원작에서도, 불길한 꿈에서도 이미 체스터는 오빠를 한 번 죽인 전적이 있는 사람이니까.
“오빠!”
“아, 율리아. 생각보다 일찍 왔네.”
윽, 무슨 술 냄새가……!
오빠가 애주가인 건 알고 있었지만, 발을 들이는 순간 짙은 알코올 향이 코를 찔렀다.
오빠의 주량이 남다른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체스터는 원작 흑막이니 술고래인 오빠를 버틸 수 있…….
“……오빠, 체스터한테 술을 얼마나 먹인 거야?”
“황태자이기 전에, 형님이 주는 술을 거부할 수 있는 매제가 어디 있겠니. 율리아.”
“그렇다고……!”
오빠한테 화를 내려고 했지만 일단 체스터의 상태를 좀 봐야 할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붉은색으로 물들어져 있었다.
“율리아…….”
체스터를 보니 눈이 반쯤 풀려 있었다. 무슨 흐트러진 모습이 이렇게 섹시하게 잘생긴 거야!
역시 내 남편인가. 오빠, 고마워. 오빠 덕에 체스터의 새로운 모습을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