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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66화 (66/141)

#66화

의도를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타인에게서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가녀린 여자.

그에게 있어서는 오직 그녀이기에 드는 생각이었다.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율리아.”

체스터는 덮어 준 겉옷을 그녀의 어깨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그의 옷에는 아까의 전투로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마차가 덜컹거려서 깰지 모르는 율리아의 머리를 자신의 다리 위에 눕혔다.

“왜 요즘 당신이 눈앞에서 죽는 꿈을 꾸는 건지.”

불안했다. 그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허덕이고 있었다.

겨우 작고 여린 생명체 하나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한낱 꿈일 뿐이었지만, 소중한 누군가를 잃을 수 있다는 그 생각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단 것을 알게 됐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모습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 무력감도 낯설었다.

“당신을 보면 안고 싶고, 만지고 싶고, 가두고 싶습니다. 당신을…… 독점하고 싶습니다, 율리아.”

체스터는 마치 애완동물을 쓰다듬듯 율리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 * *

피부에 닿는 감촉이 무척 부드러웠다.

차츰 정신이 들어 눈꺼풀이 힘겹게 떠지며 낯설면서도 꽤 익숙하게 느껴지는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침대에 찰싹 달라붙은 몸을 힘겹게 일으키며 뻣뻣한 몸을 좀 풀고자 기지개를 펴는 순간, 온몸의 근육들은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고통을 호소했다.

“윽!”

저절로 곡소리가 새어 나왔다. 고통에 익숙해져서 그런 건지 이제는 참을 만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방 안에 없는 체스터를 찾기 위해 문밖으로 나선 순간 집사가 이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마님, 깨어나셨습니까.”

“네. 체스터는 어디에 있나요?”

“주인님께서는 잠시 외출하셨습니다.”

“아…….”

“저녁 식사를 먼저 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체스터가 오면 같이 먹을게요.”

“그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주인님 대신 제가 저택을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체스터가 없는 건 조금 아쉬웠지만, 저택은 내가 앞으로 살아갈 곳이니 조금이라도 빠르게 보고 싶었다.

집사의 안내를 받아 천천히 저택을 돌아다녔다.

“이곳은 지크베르트 공작 가문을 이끄셨던 전대 공작 부부의 초상화들이 안치된 곳입니다.”

순간 선대 공작 부부의 초상화에 눈길이 갔다. 이렇게 보니 체스터는 부친을 많이 닮았다.

“선대 공작 부부는 사이가 어땠나요?”

“……객관적으로 그리 좋지는 못하셨습니다.”

“왜요?”

“주인님과도 깊게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알면 안 되는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얘기가 길어질 것 같습니다. 차라도 내어 오겠습니다.”

테라스에 놓인 티테이블로 안내받아 의자에 앉았다.

집사는 금방 차와 다과를 내왔다. 차를 조심스레 한 모금 마시고서야 집사는 입을 뗐다.

“선대 공작 부부께서는…… 지금은 돌아가신 마님께서 일방적으로 추진한 결혼입니다. 전 주인님께서는 원치 않는 결혼이셨습니다.”

“…….”

“전 마님께서는 주인님을 매일같이 찾아왔고, 금전적인 압박도 가했습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한 결혼이었지만, 그래도 이후에는 원만하게 잘 지내셨습니다.”

이거 어디서 들어 본 스토리인데.

분명 처음이었지만, 기분 탓이 아니라면 선대 공작 부인의 행동은 원작 속 율리아의 행동과 흡사했다.

“주인님이 태어난 이후부터는 소원해지기 시작하더니, 전 마님께서 전 주인님을 향한 집착이 심해졌습니다.”

“…….”

“무엇보다도…… 지금의 주인님께서는 그런 전 마님을 무척 싫어하셨습니다.”

그랬기에 원작 속 체스터는 그렇게나 율리아를 싫어하고 밀어내고 거부했던 걸까.

“그리고 선대 공작 부부의 죽음에 대한 진상은 외부에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마님이시니 진실을 알려 드려야겠죠.”

“……사고로 죽은 게 아니었나요?”

“사고사로 처리된…… 전 마님의 동반 자살이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찻잔 속에 든 물에 파동이 일렁였다.

정신을 차리자 찻물 스스로 파동을 일으킨 게 아닌, 내 몸의 떨림이 파동을 일으킨 거였다.

왜 원작 속에서 그가 율리아를 그토록 싫어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아니, 싫어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였다.

자신이 싫어한 모친의 행동이 원작 속 율리아의 행동과 거의 똑같다고 봐야 했으니까.

매일 저택에 찾아오며, 황실의 힘을 이용해 결혼하자 압박하는 율리아의 모습은 체스터에게 있어서 죽은 부모를 떠올리게 만드는 행동이었으니까.

“……제가 마님께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했나 봅니다.”

“체스터는…… 그런 일을 겪었는데, 괜찮았나요?”

당연히 괜찮지 않았겠지. 아무리 모친을 싫어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가족이니까.

꼭 그게 아니더라도 부친을 죽인 게 모친이니까 어렸을 그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겠지.

체스터가 옆에 있었다면 안아 주고 싶었다.

“슬퍼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지금의 주인님이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

“장례식을 치른 후 많은 방계 혈족들이 지크베르트 가주가 된 주인님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렸지만, 주인님은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켜냈습니다.”

“전쟁에…… 참전하는 방식으로요?”

“네. 처음에는 모두가 죽을 거라고 단정 지어, 주인님의 부재를 틈타 재정을 빼돌렸습니다.”

“…….”

“계속해서 승전보를 울리며 돌아오신 후에 입지가 굳혀지면서 가문의 재산에 손을 댔던 방계 혈족들을 전부 숙청하셨죠.”

힘들게 지켜냈구나. 참전하지 않으면 두 눈을 뜨고 모든 걸 빼앗길 테니까.

그런데 나는? 나는 그를 또다시 전쟁터로 내몰았다. 그것도 모자라 거기서 죽어 버리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원작과는 전혀 달랐는데. 원작을 맹신한 탓에 그를 사지로 몰아넣어, 그를 다치게 했다.

나쁜 건 나였다. 체스터가 살기 위해 나갔던 전쟁터를 나는 죽으라고 떠밀었으니까.

“그 이후로는 살얼음판이 되었지만…… 주인님께서 마님을 만난 이후부터는 나아지셨습니다.”

“……진짜요?”

“네. 마님을 만난 이후부터는 많이 누그러지셨습니다.”

집사의 온화한 표정을 보니 거짓은 없어 보였다. 해가 저물며 울긋불긋한 노을이 찻잔에 담겼다.

그는 잠시 시간을 확인하더니 정 많은 할아버지처럼 웃었다.

“곧 주인님께서 도착할 겁니다, 마님.”

체스터가 곧 도착한다는 말에 벌떡 일어났다.

돌아온 그를 내가 제일 먼저 보고, 꼭 안아 주고 싶었으니까.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자 이미 현관에 있는 체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체통도 잊은 채, 단숨에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율리아?”

“안아 주고 싶어서요.”

분명 땅에 닿아 있던 발이 공중으로 붕 떴다.

정말 아주 가볍게 몸이 들렸다. 그리고 체스터는 나를 단단히 품에 안고는 주변 사용인들의 눈은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지 나를 안은 채로 계단을 올라갔다.

“체스터?”

“저도 안아 주고 싶어서요.”

체스터는 짙은 웃음을 얼굴에 피워 냈다.

“그리고 저는 다른 방식으로 율리아가 안아 주면 좋겠습니다. 물론, 아까처럼 그렇게 행동하는 게 싫다는 건 아닙니다.”

“어떤 방식을 원하는데요?”

“곧 알게 될 겁니다, 율리아.”

그는 말해 주지 않고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아, 맞다! 황성 가야 하는데!”

“내일 가죠.”

“그냥 오늘 다녀…….”

체스터는 말하고 있는 내 입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체스터! 오늘…….”

쪽.

“체스터! 오…….”

쪽.

“체!”

쪽.

이제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입을 맞췄다. 체스터는 그냥 오늘 말고 내일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 뭐 그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들어줄 수 있지.

“그럼 내일 가요.”

“네, 율리아.”

“근데 밥 안 먹어요?”

“밥 말고 율리아를 먹으면 안 됩니까?”

“사람을…… 먹어요?”

“……아닙니다. 식사는 방에서 하죠.”

사실 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들었다. 알았기에 모른 척했다. 지금 내 몸으로는 그를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체스터의 품에 안긴 채 편안하게 침실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 저녁을 먹기로 한 거니까. 금방 음식이 여기로 오겠…….

“……체스터?”

체스터는 나를 침대에 눕히고는 내 위에 올라탔다.

“안아 줘요, 율리아.”

“네?”

체스터는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툭 하고 부딪히더니, 아까만 해도 다정했던 핏빛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눈빛으로 돌변했다.

“안아 주고 싶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체스터가 유혹하기 시작했다.

“그건! 집사가…… 체스터가 어렸을 때 어떻게 자랐었는지 알려 줘서……!”

“……제게 연민을 느끼십니까?”

“아뇨. 미안해서요.”

“무엇이 미안합니까.”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당신을 강제로 전쟁터에 밀어 넣은 거요.”

“고작 그런 걸로는 미안할 필요 없습니다.”

“……고작이요?”

“네. 고작입니다, 율리아.”

전쟁터가 고작이라고?

“딱히 전쟁터는 두렵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

“전쟁터가 두려운 게 아니라, 당신을 볼 수 없는 시간이 두렵다고.”

진짜 이렇게 말하면 해 주고 싶잖아.

내 몸이 조금 힘들긴 하지만 말을 이렇게 예쁘게 하는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잘생긴 얼굴로 예쁜 말만 내뱉는데. 그리고 무엇보다도 애정이 가득하다 못해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고.

“그러니 그런 걸로는 미안할 필요 없습니다, 율리아.”

“…….”

“뭐, 고작 전쟁에 나가 이기고 돌아오는 걸로 당신을 얻었으니 제게는 이득이었죠.”

“사랑해요. 그때는…… 아니었지만! 이제는 체스터를 사랑해요.”

“저도 사랑합니다, 율리아.”

그 말을 끝으로 입술이 겹쳐졌다. 자연스럽게 뜨고 있던 눈을 감고 그를 받아들였다.

뜨거운 숨결이 안에서 뒤섞였다.

엉켜 드는 살덩이가 무척이나 부드럽고 달콤했다.

좀 더 파도처럼 안으로 밀려드는 이 뜨거움에 취하고 싶었다.

떨어진 입술을 잇는 투명한 은실이 길게 늘어졌다 툭 끊어졌다.

“하아…….”

달뜬 숨이 잇새 사이로 터져 나왔다.

호흡이 불규칙해진 탓에 가슴이 오르락내리락거리며 원래의 호흡을 되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목덜미를 꽉 깨물며 흔적을 새긴 그의 입술은 천천히 밑으로 내려왔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쩌릿한 쾌감이 몸을 조금씩 잠식해 갔다.

저절로 그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당신의 목소리가 듣고 싶습니다, 율리아.”

귓가에 퍼지는 달콤한 목소리에 잠시 나른해지는 듯했지만, 이내 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존재감에 저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아득한 감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흐읏!”

창밖은 어둠이 져 달빛이 은은하게 드리워지는 게 아닌, 노을이 사라지기도 전인데 벌써 노을보다도 빨갛게 불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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