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율리아, 곧 도착할 텐데 계속 누워 있을 겁니까?”
다정한 음성이 정말 가증스러웠다. 아니,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내 착각이 아니라면 체스터는 평소보다 더 무식하게 굴었다. 물론 며칠 못 했으니 쌓여 있긴 했겠지만!
“괴물.”
몸을 움직이려 힘을 조금만 줘도 여기저기의 근육들이 아우성을 쳐대며 난리였다. 움직이고 싶어도 꼼짝없이 가만히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내 몸이 이렇게 된 원흉은 지금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채 다정한 음성으로 속삭이는 체스터였다.
“나빠요.”
“제가 나쁩니까?”
“완전 나빠요. 진짜…… 나쁜 거 알아요?”
“글쎄요? 저는 제가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서. 그리고 제게 나쁘다고 하는 사람도 율리아가 처음이라서.”
체스터는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손길이 좋았지만,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 있는지 생각하자 화가 났다.
“율리아, 걸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제가 걸을 수 있는 것처럼 보여요?”
“혹시나 해서 물어봤습니다.”
체스터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 웃음이 잘생겨 보임과 동시에 왜 불길함을 불러일으키는 건지.
순간 몸이 공중으로 가볍게 들렸다.
“체스터?”
“가만히 있어요. 움직이기 힘들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맞지만.”
물론 전라의 상태는 아니라지만 실내용 드레스도 아닌 완전 잠옷 차림이었다.
달랑 슈미즈만 입은 상태로 그의 품에 안긴 채 실외로 나갔다.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불어오는 바람에 어지럽게 흐트러지며 휘날리는 내 머리카락은 체스터를 감쌌다.
진짜 얼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생겼다.
이런 얼굴로 원작에서는 흑막으로 나왔다 이거지. 이 얼굴로 원작의 율리아를 상처입히고 소중한 모든 걸 앗아갔다고 봐야겠지.
정말 원작 속에서의 체스터는 냉혈한이었는데.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차가움보다는 뜨거움에 가까운 남자였다. 그러니 원작과는 다를 거야.
불안한 꿈처럼 흘러가지 않을 거야.
“율리아, 무슨 생각을 그리합니까?”
“체스터 생각.”
이렇게 내게 집착하고, 다정하고, 나를 사랑하는 남자가 어떻게 내 소중한 이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겠어.
나를 향해 햇살처럼 웃어 주는 남자인데.
“제 생각을 하셨습니까?”
“네. 당신 생각했어요.”
“그건 좋네요. 당신이 제 생각을 하는 거.”
체스터의 눈이 초승달처럼 곱게 휘었다. 배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도착했나 봅니다.”
“아…… 체스터, 저 옷! 잠옷 차림으로 나갈 수는 없잖아요!”
체스터는 옅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다시 실내로 들어갔다. 열기가 진득하게 남아 있는 방 안까지 와서야 안고 있던 나를 내려 주었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드레스를 주우려는데 체스터가 먼저 줍더니 꿍꿍이가 가득한 표정으로 웃었다.
“입혀 줄게요.”
“……그래요.”
어차피 혼자 입기에는 손이 많이 갔기에 그의 호의를 거부하진 않았다. 그리고 이제 내외할 필요도 없는 법적으로도 인정된 부부였으니까.
뒷덜미에서 말캉한 감촉과 함께 그의 숨결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체스터!”
“다 끝났습니다. 단지…… 당신의 새하얀 목이 유혹해서 저도 모르게…….”
“…….”
“당신이 너무 예뻐서 그랬습니다.”
체스터는 내 허리를 껴안으며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유독 당신 앞에서는…… 자제력을 잃습니다.”
“하아…… 체스터, 수도로 돌아가면 황성에 먼저 들를 생각이었단 말이에요.”
“아무한테도 당신을 보여 주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당신은 온전히 제 것인데.”
“사랑해요, 체스터. 당신은 이성으로 사랑하는 거고, 가족은 소중한 거니까…….”
“저는 당신만 있으면 됩니다. 당신만 있다면…… 나머지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괜한 걱정이었다. 체스터가 나를 죽이거나 내 소중한 사람을 해할 거라는 생각은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그를 믿으니 원작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불필요한 생각과 의심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지만 불안한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다.
“이제 내려가는 게 좋겠습니다.”
“네!”
체스터의 에스코트를 받아 움직이려 하자 몸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윽!”
“율리아?”
“……부축만 해 줘요.”
차마 사람들 앞에서 안아서 옮겨지는 건 부끄러워서 피하고 싶었다.
그는 한 손으로는 내 손을 다정하게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내 허리를 단단하게 휘감았다.
체스터에게 부축을 받아 배에서 내리자 바로 앞에 지크베르트 문양이 새겨진 마차와 호위들이 있었다. 바로 마차에 옮겨 탔다.
의자에 앉자 저절로 몸이 늘어졌다.
“율리아, 힘들면 이쪽으로 와 제게 기대세요.”
체스터의 말에 그의 옆으로 옮겼다. 그리고 눈을 감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허리에 그의 팔이 휘감기더니 그대로 나를 들어 그의 무릎 위에 앉혔다.
“체스터?”
“여기는 방음이 그리 잘 되는 편은 아닙니다.”
“네?”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드레스 자락 안을 파고드는 그의 손이 아주 잘 알려 주었다.
뒷덜미에 닿는 그의 더운 숨결과 아래에서는 내 허벅지를 압박하는 그의 존재감이 적나라했다.
아까 안에서 그렇게 해 놓고도 더 할 수 있다는 게 섬뜩하게 와닿았다.
“체스터…… 저 힘든데요.”
“부족합니다.”
애써 그가 입혀 놓은 드레스가 벗겨지는 게 느껴졌다.
농밀한 그의 숨결이 뒷덜미에서 천천히 척추를 타고 내려가 말캉한 입술의 감촉이 등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오싹한 전율이 등에서부터 발끝까지 퍼져나갔다.
“아……!”
옅은 탄성이 여린 입술 사이로 터져 나왔다.
깨끗했던 피부에 흔적을 남기는 체스터의 행위는 무척 집요했다. 그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몸이 흠칫하며 떨렸다.
맨살에 닿는 그의 손은 차가웠기에 더욱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읏! 체스터, 여기서는…….”
“율리아, 다시 말하지만 여기는 방음이 안 됩니다.”
“그럼!”
하지를 말아야지! 그러나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체스터가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으니까.
“읍! 으븝, 흡!”
“저야 당신이 소리 내는 게 더 좋지만, 당신이 그걸 싫어할 것 같아서요.”
나직한 그의 음성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온몸으로 그의 호흡과 잇자국이 퍼져 나갔다. 체스터는 내가 직접 볼 수 없는 부분에 자국을 내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꽃이 깨끗한 피부 위의 이곳저곳에서 피어나 서서히 번져 나가며 영역을 키워 나갔다.
“흐읍!”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그의 커다란 존재감이 버겁게 다가왔다.
정신을 어지럽게 잠식해 가는 감각에 본능적으로 입을 덮고 있는 체스터의 손을 깨물었다.
“율리아.”
불규칙해진 호흡으로 내 이름을 나직하게 부르는 그의 달콤함은 머릿속을 말갛게 물들였다.
어질어질했다.
그대로 몸을 체스터의 품에 기대며 온몸을 태울 듯한 그가 주는 달콤함에 취해 눈을 감았다.
우리 둘이 타고 있는 마차는 유난히 덜컹거렸다.
* * *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나 율리아는 살짝 땀에 젖은 채 체스터의 다리 위에 머리를 대고 편히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안정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겉옷을 덮은 몸과 색색대는 숨소리는 그녀가 잠들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체스터는 잔뜩 흐트러진 율리아의 은빛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율리아, 당신을 손에 넣는 건 성공했는데…….”
그는 옅게 상기된 그녀의 뺨을 손등으로 조심스럽게 쓸었다.
그때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며 마차가 멈췄다. 체스터는 조금의 당황한 모습도 없이 자연스럽게 장갑을 낀 채 검을 들고 마차 밖으로 나갔다.
“……엉망이군.”
검은 옷을 입은 자객들과 마차를 호위하던 지크베르트 공작가 소속의 기사들이 싸우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져 죽어 가는 건 자객들이었으나, 기사들의 피해가 없지는 않았다.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정예기사들임에도 불구하고 부상자가 있다는 건 저쪽 자객은 평범한 자객이 아닌, 따로 훈련받은 자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체스터는 무감정했다. 그는 뽑아 든 검으로 쉽게 그들을 죽였다.
사람을 베는 그의 모습은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종이를 베듯 조금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죽음에 무뎌진 사람처럼.
“쯧, 저택의 경비는 더 늘리는 게 좋겠군.”
상황을 손쉽게 정리한 체스터는 짜증이 뒤섞인 음성으로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묻어난 피를 닦아 내고, 검을 집어넣은 후 마차로 다시 들어갔다.
다시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체스터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곤히 잠든 율리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적이 많습니다.”
그는 손을 뻗어 땀에 젖어 얼굴에 붙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옆으로 넘겨주었다.
“그렇다 해도 저는 당신을 빼앗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어떻게 얻어낸 당신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