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분명 장난은 그만 쳐야 하는데 조금 더 짓궂게 굴고 싶었다.
고기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으며 당황으로 가득 물들어 있는 체스터의 얼굴을 감상했다.
“율리아, 제가 당신이…… 죽길 바랄 리가 없잖습니까.”
“저 사랑해요?”
“당연히 사랑합니다.”
“그거면 됐어요.”
이제 더는 꿈에 연연하지 않을 테니까.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일 테니까.
꿈속 또는 내가 전생에 읽은 소설의 체스터는 율리아를 사랑하지 않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소설 속에서는 율리아가 죽어 가는 그 순간까지도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은 적이 없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니까.
“체스터가 저를 사랑하는 거 하나면 돼요.”
“…….”
“장난친 거예요. 꿈은 꿈일 뿐이잖아요. 그러니 다시 웃어 줘요, 체스터.”
웃어 달라는 말에 체스터는 다시 평소의 다정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체스터는 내게 손을 뻗더니 내 입술 근처를 손가락으로 닦아 냈다. 떨어진 그의 손끝에는 소스가 묻어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내 입가에 묻어 있던 소스를 핥아서 먹었다.
“그, 그걸…… 왜 먹어요?”
“흐응? 율리아, 어서 먹어요.”
“왜 굳이 제 입가에 묻은 걸……!”
“그게 제일 맛있어 보였습니다. 실제로 먹어 보니 제일 맛있는 게 맞았습니다.”
지금 복수하는 건가. 내가 장난을 쳤다고 본인이 더 짓궂게 행동하는 건가.
“어서 먹어요. 당신은 너무 연약합니다, 율리아.”
“제가 보통인 거거든요?”
“매번 먼저 쓰러지고, 그러면 곤란합니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힘들다며 먼저 잠들고.”
“그건……!”
내가 약한 게 아니라 당신이 괴물 같은 거라고!
차마 입 밖으로 내뱉기엔 낯 뜨거웠다. 그래서 소리가 나오지 않고 입술만 뻐끔뻐끔거릴 뿐이었다.
체스터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장난기가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짓궂게 말했다.
“그러니 율리아 잘 먹어야죠. 그래야 오늘 밤에는 더 오래 깨어 있죠.”
“진짜! 장난치지 마요!”
“흐응……? 장난으로 느껴지십니까? 저는 진심이었는데.”
진짜 체스터는 뻔뻔했다. 무, 물론…… 이제 진짜 결혼도 한 법적인 부부지만 나는 아직 부끄러운데!
그의 말에 얼굴이 뜨거워지는 건 나였다.
체스터를 향했던 시선을 음식으로 옮겼다. 정말 그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다간 내 얼굴이 펑 터질 것만 같아서.
음식을 씹어 삼키며 애써 체스터의 노골적이다 못해 뜨거운 눈빛을 무시했다.
접시를 비우자 체스터는 내게 다가와 내 뺨을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더니 입술을 포개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랐지만 콩닥대는 심장과는 별개로 몸은 능숙하게 그를 받아들였다.
내 허리를 팔로 감싸더니 다른 팔은 내 무릎 밑에 넣어 그대로 나를 품에 안았다.
“체, 체스터?”
몸이 공중으로 들리자 본능적으로 놀라 맞물려 있던 입술을 떨어뜨렸다.
이대로 밥을 먹자마자 침대로 향하는 건가, 정신이 어질어질해질 때 체스터는 내 뺨에 입을 맞추고는 장난기 넘치게 웃으며 말했다.
“다 먹었으니 산책합시다.”
“네?”
“조금씩 활동량을 늘려야 체력도 늘지 않겠습니까?”
“…….”
“그리고 침대에만 있는 것보다는 바깥 구경도 하고 싶다 했잖아요.”
체스터는 그대로 나를 품에 안고 방 밖으로 나갔다.
“제가 걸을 수 있는데!”
“흐응?”
“활동량을 늘려야 한다면서요! 스스로 걸을 수 있어요! 그리고 무거우니까 내려 줘요!”
“내려 주고 싶지 않은데…… 오히려 너무 가벼워서 걱정입니다.”
“그, 그리고 지금 슈미즈 차림이거든요! 잠옷 차림인데……!”
“괜찮습니다.”
“제가 전혀 안 괜찮거든요!”
체스터는 내게 안심하라는 듯 다정하게 웃었지만, 전혀 안심되지 않았다.
쨍한 햇빛에 저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어? 햇빛이라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밖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깥에는 저와 율리아 외에는 없을 테니까요.”
뭐, 우리 둘밖에 없다면야…… 아니, 이게 아니잖아!
“다른 사람들은요? 서, 설마…… 우리 섬에 고립됐어요?”
“흐음…… 글쎄요?”
“진짜 우리 섬에서 못 나가요?”
“흠,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체스터! 진짜 이런 걸로 장난치지 마요!”
생각해 보니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섬에서 나갈 수 있는 요트가 있었다.
하지만 정말 이 섬에는 나와 체스터 단둘뿐인 건가? 정말 생활하면서 체스터 외의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물론, 여행객들은 당연히 없는 거겠지만 그렇다고 사용인들도 없다는 게 의아했다.
“율리아, 사랑스럽게 굴면 어떡합니까.”
“네?”
“잡아먹고 싶게.”
“대, 대낮부터 그러지 마요! 진짜!”
“그럼 대낮만 아니면 다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됩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울 뿐이지 싫은 건 아니었으니까.
체스터는 숲으로 들어오더니 커다란 바위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바위 위에 입고 있던 겉옷을 깔고 나를 그 위에 앉혔다.
“율리아.”
체스터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상자 안에는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 영롱한 빛을 내뿜는 투명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정교하게 세공된 반지 한 쌍이 담겨 있었다.
“저와 결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체스터……?”
“사랑합니다.”
체스터는 달콤한 말을 내뱉으면서 눈매를 곱게 휘며 내 손을 가져갔다.
약지에 끼고 있는 루비가 박혀 있는 반지를 빼고 그 위치에 다이아몬드로 세공된 반지를 끼워 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만큼 할 말을 잃었다.
“아…….”
“당신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습니다.”
“…….”
“율리아,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저와 함께해 주실 수 있습니까?”
심장이 쿵쿵 떨리며 반응했다. 체스터가 새로 끼워 준 새로운 반지에서 시선을 떼어 낼 수가 없었다.
다이아몬드는 불멸을 의미한다. 아니, 사실은 반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이게 내 착각이 아니라면 마치 내가 공작저에서 읽었던 책 속의 한 장면을 연출한 느낌이 다분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햇살이 드리우는 낮에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수풀의 소리가 가득한 숲에 새하얀 잠옷을 입은 여주인공은 바위 위에 앉아 있었고, 남주인공은 그녀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영원을 뜻하는 다이아몬드로 된 반지를 손수 끼워 주며 영원한 사랑을 속삭이며 고백했다.
지금 이 고요한 숲속에는 사람이라고는 나와 체스터 단둘뿐.
무엇보다 체스터가 내뱉은 말들은 여주인공 이름 대신 내 이름으로 넣었을 뿐 남주인공의 대사와 똑같았다.
착각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착각일 수밖에 없는 건 나는 단 한 번도 이와 관련해서 체스터에게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체스터가 그런 로맨스 소설을 읽을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고.
“체스터, 이거…….”
“대답.”
거기서 여주인공은 뭐라고 대답했었지? 기억이 희미했다.
“……영원토록 사랑할게요.”
아마도 여주인공은 이런 말을 했었다. 확신은 없었지만 이와 비슷했다.
체스터는 내 손가락 끝에 천천히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손끝에 닿는 말캉한 감촉이 심장을 간지럽혔다.
내게 고정된 핏빛 눈동자에는 달콤한 애정이 뚝뚝 묻어나 있었다.
그의 입술은 손끝에서 손바닥, 손목으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발끝으로 내려와 입을 맞추고 깨끗한 발등으로 옮겨와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정강이를 지나 허벅지까지 닿는 말캉한 감촉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읏……!”
체스터는 내 허벅지 안쪽에 입을 맞추더니 여린 살을 깨물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에 몸을 떨었다.
그는 손을 뻗더니 상냥하게 내 뺨을 감쌌다. 그리고 내게 입을 맞춰 왔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부드럽게 밀려 들어오는 그의 혀가 입 안을 어지럽게 헤집자, 머릿속은 녹진해졌다.
아득해지는 정신에 그의 어깨를 손으로 붙잡아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것만 같은 몸을 지탱했다.
말캉한 혀는 뜨거운 숨결을 타액과 함께 밀어 넣으며 엉망으로 얽혀들었다.
한껏 달아오른 호흡이 입술 사이로 오가며 안정적인 호흡을 흐트러뜨리더니 불규칙적으로 만들고서야 그는 입술을 떨어뜨렸다.
“하아…….”
떨어진 입술 사이로 달뜬 숨이 터져 나왔다.
뺨에 닿아 있었던 그의 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 허리를 옭아맸다. 다른 손으로는 내 다리 한쪽을 붙잡았다.
엉겨 붙은 시선에서는 노골적으로 드러난 원초적인 욕망이 담겨 있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체스터의 목에 팔을 두르고 내 몸을 온전히 그에게 맡겼다.
“조심해 줘요.”
체스터의 몸과 내 몸이 밀착되면서 그는 내 목과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옅은 쾌감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나를 원한다는 체스터의 열망이 기꺼웠다.
체스터가 나를 독점하고 싶은 갈망이 짙게 느껴졌다.
그의 몸이 내 몸을 그대로 짓눌렀다.
뜨겁게 안으로 파고드는 그의 몸에 내 몸은 저절로 잘게 떨렸다.
내 허리를 휘감은 그의 팔에는 아까보다 힘이 더 실렸다.
그의 입술이 닿은 깨끗한 피부는 울긋불긋한 열꽃을 피워냈다.
“최대한 자제해 보겠습니다, 율리아.”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의 허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동공이 확장되며 허리가 유려한 곡선을 그려냈다.
“하윽……!”
계속되는 자극에 입술 사이로 여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목을 휘감은 팔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힘이 빠졌다.
머릿속을 희뿌옇게 만드는 농밀한 전율에 취하며 서로의 몸이 얽혀들었다.
참고로 내가 읽은 그 소설은 포장지만 평범한 빨간 책이었다.
* * *
올 때는 로맨틱했다면 갈 때는 전혀 로맨틱하지 않았다.
체스터는 혼자만 혈색 넘치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녹초가 되어 축 늘어진 나를 겉옷으로 돌돌 말아 품에 안은 채 돌아가는 중이었다.
분명 올 때는 장난을 치긴 해도 연인의 품에 안겼다는 느낌이 다분했는데, 지금은 그냥 애벌레가 된 기분이었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기분 좋아 보이는 체스터에게 약간의 투정을 부리는 것 정도.
“체스터, 저 힘들어요…… 조심해 달라고 했는데!”
“조심해 달라고 했지, 사랑하지 말아 달라고는 안 했잖아요.”
“이대로 체스터의 사랑을 감당하면 제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체스터는 내 말에 대답 대신 짙은 웃음을 지었다. 딱히 나를 안심시키려는 의도도 없어 보였고, 내 말을 부정하는 의미로도 보이지 않았다.
왠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