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무거웠다. 몸이 무겁다기보다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내 몸을 짓누르고 있다는 감각이 정확했다.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뒤척이자 허리에서 강력한 통증이 느껴지며 잠이 후다닥 날아갔다.
바로 떠진 눈에 보이는 건 흐트러진 체스터의 얼굴이었다.
내 몸을 짓누르고 있는 건 그의 팔이었다. 체스터의 사랑을 받는 건 좋았지만 그만큼 몸이 힘들어했다.
“흐응…….”
매번 눈을 뜨면 보이는 체스터는 금욕적으로 보인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단정하게 입었다.
물론, 실상은 전혀 금욕적이지 않지만.
평소처럼 한쪽을 넘기지 않아 풀어지다 못해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을 손을 뻗어 정리했다.
“잘생겼다.”
역시 내 남편. 너무 잘생겼어. 역시 잘생긴 게 최고야. 앞으로도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이렇게 잘생긴 얼굴이 반겨 준다는 거잖아.
꽤 얄밉기도 했지만 잘생긴 얼굴이 모든 걸 압살했다.
체스터가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맨날 내가 먼저 자고 일어나는 것도 늦었으니까.
내가 눈을 뜨면 그는 자고 일어난 사람이 아니라 잠에서 깨어난 지 오래된 사람으로 보였다.
길게 뻗은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예쁜 피죤스 블러드 루비를 떠올리게 만드는 눈동자가 보였다.
보였다고? 지, 지금?
“율리아, 깼습니까?”
“어…… 음, 그렇죠? 잘 잤어요?”
“흐응…… 당신은 잘 잤나 봅니다. 저는 한숨도 못 잤는데.”
체스터는 짙은 웃음을 지었다. 몹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그런 사악한 느낌이 다분한 웃음.
그의 손이 내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어…… 어,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요?”
“율리아가 뒤척일 때부터?”
체스터는 짓궂게 웃었다. 그 말은 즉, 처음부터 깨어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냥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던 거고!
“처음부터 깨어 있었잖아요!”
“잠든 적이 없었는데…….”
“……왜 잠든 적이 없어요?”
“어제 유혹은 유혹대로 해 놓고 먼저 뻗은 부인 덕분에 한숨도 못 잤습니다.”
“어…….”
처음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딱 3초가 지나가 체스터가 내뱉은 말이 어떤 뜻인지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얼굴에 피가 쏠리며 뜨거운 열이 얼굴로 밀집됐다.
진짜 잘생긴 얼굴로 못 하는 말이 없었다. 말을 내뱉고는 싶은데 소리가 나오질 않아 입술을 몇 번 달싹이고서야 입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게 왜……!”
“다행히 아침은 힘이 넘치네요.”
체스터는 그 말과 동시에 내 위로 올라탔다.
불안함으로 가득 찬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한 순간 깨달았다.
나 진짜 아침부터 잡아먹히겠구나. 이 나른하고 여유로운 늑대한테 한입에 꿀꺽 잡아먹히겠구나.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지만, 그건 호랑이지 늑대가 아니잖아!
최대한 애처로운 눈빛으로 체스터를 바라보았다.
“체스터, 저 허리도 아프고…….”
“아프고?”
“어제도 많이 했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
“어제 또 먼저 잠들었잖아요.”
그냥 입을 다물자. 입을 열면 열수록 나한테 왠지 불리한 기분이었다.
체스터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었다. 피부 위로 말캉한 감촉이 고스란히 닿았다.
“율리아, 이러다 없던 불면증도 생기겠습니다.”
“읏, 하지만 여행 와서…… 침대에만 있고 싶지는 않은데…….”
“오후에는 바다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죠. 당신이 원한다면 바다에 또 나가도 됩니다.”
햇살이 드리우는 아침부터 체온이 뜨겁게 얽혀들었다.
* * *
괴로웠다. 숨을 쉬고 싶어도 사방은 온통 물이었기에 공기 대신 물이 입과 코로 들어왔다.
죽기 위해 뛰어들었기에 처음에는 가라앉는 몸을 내버려 두었다.
죽음이 빨리 오길 원하게 된 만큼 고통스러웠다. 차가운 물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게 끔찍했다.
처음에는 손끝부터 얼어 간다는 느낌이었지만 몸 안에 물이 차오를수록 얼어 가는 건 피부가 아니라 내 장기들이었다.
살고 싶다는 의지가 간절해지면서 팔과 다리를 휘저으려 해 봤지만 이미 얼어붙었는지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커헉……!”
정신이 점점 아득해져 갔다. 온몸이 얼음처럼 차가운 물로 가득 차는 감각은 체스터를 떠올리게 했다.
숨이 꺼져 가는 그 순간까지도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 * *
“허억……!”
폐가 물로 가득한 감각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착각이 들었다.
손가락은 멀쩡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냥 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마치 경험을 한 것처럼 생생한 고통. 내가 전생에 죽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차가운 수온.
팔딱대며 뛰는 심장 부근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심장이 잡힐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 떨림을 진정시키기 위해.
“율리아!”
바로 옆에서 놀란 듯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황녀 전하께는 자비를 베풀어 자결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죠.’
그런데 왜 지금의 체스터에게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이 머리에서 울리는 걸까.
체스터는 떨고 있는 나를 진정시키려는 건지 나를 품에 안았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꿈속의 차가운 얼굴을 한 그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를 밀쳐냈다.
“아…….”
체스터는 내 행동에 놀란 것처럼 두 눈이 커져 있었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내가 읽은 책 내용에는 이런 건 없었다. 율리아가 죽었다고만 했지, 이렇게 구체적인 이야기는 없었잖아!
왜 내가 행복해지는 걸 방해하는 거야!
내가 소설 속 율리아의 결말대로 비참하게 죽었어야 한다는 걸 내게 이런 식으로 강요하는 거야?
나는 살고 싶고, 나는 단지 행복하길 원하고, 가족들이 죽지 않길 바랄 뿐인데.
엑스트라로 죽어야만 하는 내게는 그런 바람 따위는 사치라는 거야?
“오지 마…….”
“율리아.”
“아니야, 아니야…….”
왜 나한테 이런 걸 느끼게 해 주는 거야? 내가 소설과 다르게 행동해서 그런 거야?
나는 체스터에게 집착하다가 그에게 소중한 모든 것들을 빼앗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하는 결말을 맞이해야 한다는 거야?
누가 남주를 갖고 싶대? 누가 흑막을 갖고 싶대?
단지, 나는 내가 오래오래 살면서 행복한 거 하나만을 바랐을 뿐이라고.
“윽!”
두통과 함께 심장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내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내게 당장 죽어 버리라고 외치는 것처럼.
나는 행복해질 자격이 없다고 나는 그저 흑막에게 더한 권력을 안겨 줄 엑스트라라고 경고하는 걸로 느껴졌다.
“율리아, 진정하세요.”
체스터는 나를 껴안고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불규칙적이던 호흡은 이내 안정을 찾아갔다. 발작을 일으키듯 뛰던 심장도 진정되며 규칙적으로 뛰었다.
아직도 떨림이 멈추지 않는 손으로 그의 목을 꽉 껴안았다.
“어떤 꿈을 꾸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는 안전합니다. 진정해요.”
“체스터…….”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다릴 수 있습니다.”
“…….”
“당신이 먼저 편하게 얘기해 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온몸에 들어갔던 힘이 빠져나갔다.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내게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나를 죽일 리가 없으니 안심해도 되는데. 왜 불안한 걸까.
차라리 털어놓을까? 당신이 나를 죽일까 봐 무섭다고.
“꿈을 꿔요.”
“무슨 꿈입니까.”
“제가 죽는 꿈. 물에 빠져서 온몸이 얼어 가고 폐에는 물이 가득해지면서 숨을 쉬지 못해 죽어 가는 꿈.”
“…….”
“살고 싶었지만 이미 몸이 얼어 굳어가서 그대로 죽어야만 했던…… 꿈을 꿔요.”
“많이…… 고통스러웠습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이 제발 빨리 오길 바랄 만큼 아팠던 기억이 생생했으니까.
“그건 그저 꿈입니다, 율리아. 신경 쓸 거 없습니다.”
“체스터…….”
“네.”
“나 안 죽일 거죠?”
“네?”
“나 안 죽이고, 지금처럼 변함없이 앞으로도 나 사랑해 줄 거예요?”
체스터는 숨을 내뱉더니 등을 토닥여 주던 그 손을 내 머리에 놓았다. 그리고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제가 왜 당신을 죽이겠습니까. 그럴 일은 전혀 없으니 불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
“율리아, 저는 당신을 안전하게 보호할 겁니다. 이제 당신은 지크베르트 공작 부인이니까요.”
왜 이렇게 눈이 뜨겁지?
그의 품에 파묻은 얼굴을 들어 체스터의 얼굴을 두 눈에 담은 그 순간 뜨거운 액체가 뺨을 타고 흐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체스터는 엄지손가락으로 내 뺨에 흐르는 무언가를 닦아 주었다.
“울지 마세요.”
울고 있었다. 체스터가 말해 줘서야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눈물을 멈추려고 해 봤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그의 말에 안심해서 새어 나오는 건지.
체스터의 다정한 얼굴을 보자 왈칵하며 아까보다 더 많은 양의 눈물이 눈 밖으로 새어 나와 흐르기 시작했다.
“율리아?”
“끅, 끄윽…….”
“당신이 울면 제 마음이 아픕니다.”
“……체스터.”
“네.”
“나 사랑해요?”
“네. 당연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율리아.”
체스터가 나를 사랑한다고 다정하게 속삭여 주는 게 무의식적으로 안심됐는지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눈물이 그치기 시작했다.
이제는 눈물로 얼룩진 내 얼굴의 상태가 걱정됐다.
“……나 지금 울어서 안 예뻐요?”
“울어도 변함없이 예쁩니다.”
체스터는 손으로 내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이 무척 다정했다.
나를 담고 있는 체스터의 눈동자에는 걱정이 뚝뚝 묻어나 있었다. 그의 상냥함이 좋았다.
“진짜 괜찮아요? 막 눈 팅팅 부어 있는 거 아니에요?”
“부었다면 어떻습니까. 그조차도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정말요?”
“당신이 예쁘지 않은 적도, 사랑스럽지 않았던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불안해하지 마세요, 율리아.”
입술이 닿았다. 벌어진 틈으로 파고드는 살덩이는 무척 상냥하고 부드러웠지만 내 눈물 때문인지 짠맛이 났다.
체스터의 목에 팔을 휘감자 그는 내 허리를 팔로 단단히 옭아맸다.
숨결이 뜨겁게 얽혀들었다. 체스터가 나를 원하는 그 감정이 선명하게 내게로 전달되었다.
그의 혀는 타액을 밀어 넣으며 짠맛을 중화시켰다.
입술이 떨어지고 체스터는 내게 이마를 툭 하며 맞대었다.
“체스터?”
“울지 마세요. 당신이 울면 제 심장이 아픕니다.”
“……안 울게요.”
“당신은 웃기만 하세요. 저는 절대로 당신을 슬프게 하지 않겠습니다.”
체스터는 다정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무척이나 따뜻해서 나도 마주 웃었다.
나는 이 행복을 누려도 되는 걸까? 내가 아는 결말대로 향하지 않고 그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해도 될까?
그깟 악몽이야 평생 시달린다 해도 감내할 수 있었다. 체스터가 나를 사랑하기만 한다면.
“율리아, 이제 괜찮아졌으면 밥 먹어야죠.”
“먹어야……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체스터는 그대로 나를 들어서는 의자에 앉혀 주었다. 그는 내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떨어졌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여기로 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네!”
체스터는 내 대답을 듣고는 옅게 눈웃음을 짓더니 방 밖으로 나갔다.
의자에서 일어나 햇빛이 찬란하게 들어오는 창틀로 다가가 창문을 벌컥 열었다.
따사로운 햇살과 다르게 불어오는 바람은 바닷물의 온도를 전해 주는 듯 무척이나 시원했다.
머리카락을 파고드는 시원함이 기분을 좋게 했다.
두 눈을 감고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했다. 코끝을 스치는 차가운 바다 냄새가 부드럽게 폐로 스며들었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체스터가 들어온 거겠지.
“율리아.”
“불렀어요?”
“바깥 구경도 좋지만 일단 밥부터…….”
몸을 돌려 체스터가 있는 쪽으로 향했지만 바람 때문인지 머리카락이 얼굴 쪽으로 쏟아져 흐트러지면서 시야를 가렸다.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체스터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하던 말을 멈추고 놀란 듯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체스터?”
“아…….”
“괜찮아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율리아. 배고플 텐데 식사부터 하죠.”
잠시 흔들렸던 체스터에게 의아함이 들었지만 이내 다시 다정하게 웃으며 식사부터 하자며 나를 의자에 앉혔다.
음식은 정말 한입에 먹기 좋게 썰려 있었다.
“체스터.”
“네, 율리아.”
또다시 죽는 꿈을 꾸었더니 어제 체스터가 내게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의 꿈속에서 내가 죽는다고 했다. 내 꿈에서의 율리아는 체스터의 손에 직접 죽은 게 아니었다.
체스터가 원인을 만든 건 맞지만 목숨은 스스로 끊은 거였으니까.
“어제 체스터가 꿈에서 제가 죽는다고 했잖아요.”
“…….”
“어떻게 죽었어요?”
체스터는 내 질문에 멈칫했다.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제가 어떻게 죽었어요?”
“당신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말하는 겁니까?”
“네. 체스터의 꿈속에서.”
궁금했다. 체스터의 꿈속에서 죽는 나는 내가 꾸는 꿈과 똑같이 죽는 건지. 똑같이 물에 빠져 죽는 건지.
“……물에 빠졌습니다.”
“흐응…… 그랬구나.”
똑같은 꿈일까? 내가 호수에 몸을 던졌던 그 꿈과 동일할까?
잘게 썰린 고기를 한입에 쏙 넣어 씹어 삼켰다. 슬쩍 체스터를 보자 그는 약간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약간의 장난기가 내 안에서 발동했다.
“그럼, 체스터는 제가 죽는 거 그냥 구경만 한 거예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는 분명 당신을 살리려고 했는데…….”
“했는데?”
“……그대로 꿈에서 깼습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크게 흔들리는 체스터의 동공에 장난은 이 정도만 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