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체스터.”
“네.”
“제 눈에 오로지 당신만이 담기길 바라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왜요?”
“당신이 제가 아닌 다른 사람한테 시선을 두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너무 가까워서 체스터를 슬쩍 밀어내려고 했지만, 오히려 손목을 붙잡혔다.
그는 내 손바닥에 입을 맞춘 채로 떨어뜨리지 않고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모르게 내 입가에 웃음이 서렸다.
“체스터, 이미 저는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는걸요.”
“……영원히 당신이 저만을 바라봐 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상, 제 눈에는 체스터만 담길 거예요.”
그러니 어서 내 손바닥 내놔.
“그리고 체스터가 먼저 배신하는 게 아니면 저는 체스터를 사랑할 거예요.”
“제가 당신을 배신할 리가 있겠습니다. 이렇게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당신을 두고, 배신이라니요.”
체스터가 주는 애정이 좋았다.
그에게 천천히 스며들고 정신을 차리니 느끼는 감정이라기보다는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느낌이 다분했다.
왜 나는 체스터의 애정을 독점하는 이 순간이 기쁜 건지. 마치 오래전부터 바라 왔던 걸 성취한 것처럼.
“제가 예쁘고 사랑스러워요?”
“그럼 당신이 아니면 그 누가 예쁘고 사랑스럽습니까.”
“……진짜요?”
체스터는 내 물음에 피식 웃었다.
“제가 당신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앞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율리아.”
“……체스터?”
갑자기 체스터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허리를 숙이고는 내 발목을 가볍게 한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는 그대로 내 발등 위에 입을 맞췄다.
“체스터!”
쪽-
처음에는 발등이었다. 다음으로는 정강이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이 이상은 위험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급하게 손으로 그의 입술을 가로막아 진로를 방해했다.
“……율리아?”
“안 돼요.”
“흐응…… 정말 안 돼요?”
체스터의 입술을 덮고 있었던 내 손 위로 그의 손이 덮이더니 내 손가락 사이사이에 그의 손가락이 끼워졌다.
“……진짜 안 돼요.”
진짜 안 되는데…… 대낮부터 허락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데…….
체스터는 내가 흔들리며 고민하는 와중에 능숙하게 내 몸을 침대로 넘어뜨렸다.
“으음…… 체스터, 있잖아요!”
그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입술 위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이렇게 왔는데 구경도 하고 싶고 체스터랑 같이 산책도 하고 싶은데…….”
말끝을 흐렸지만, 체스터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내 입술 위에 입을 맞췄다.
“그럼 하면 되죠, 율리아.”
“……지금 제 착각이 아니라면 체스터의 눈빛을 보면 그러지 못할 것 같아서요.”
“흐응, 그러면 한 번만 할게요.”
“거짓말!”
“정말입니다, 율리아.”
체스터는 내 손목을 아프지 않게 감싸 쥐었고 내가 두 눈을 깜빡이는 사이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쳤다.
그래. 키스 정도는 충분히 허락해 줄 수 있으니까.
뜨고 있던 두 눈을 감았다. 벌린 입술 틈 사이로 파고들어 온 말캉한 그의 혀는 무척 달콤했다.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자 시원한 공기가 폐로 들어왔다.
감았던 눈을 슬쩍 뜨자 대낮이라 그런지 체스터가 나른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체스터는 고개를 숙여 내 뺨 바로 옆으로 입술을 가까이 가져오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율리아,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저는 훨씬 더 많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수작 부리지 마요.”
체스터의 가슴팍을 손으로 슬쩍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조금도 꿈쩍하지 않았다.
미동조차 없는 그의 몸에 내 눈동자는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어 갔다.
“율리아.”
체스터는 내 귓가에 내 이름을 속삭이더니 그대로 내 뺨에 쪽 소리가 날 정도로 입을 맞췄다.
그는 만족했는지 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나른한 늑대마냥 웃었다.
“수작 부리는 거 아닙니다. 그리고 애초에 수작일 수가 없지 않습니까.”
“…….”
“우리는 부부니, 이건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체스터는 나른한 웃음을 유지하며 내 뺨을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손길로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꼭 포식자 앞에 놓인 초식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물론 체스터가 나를 다루는 손길은 툭 치면 깨질 유리 공예품을 다루듯 매우 조심스러웠지만.
“유혹하는 거라고 합니다, 율리아.”
그 말을 끝으로 내 입술은 체스터의 입술에 의해 집어삼켜졌다. 두 눈을 감고 그를 받아들였다.
타액과 함께 입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살덩이와 뜨거운 숨결은 머릿속을 어질어질하게 만들었다. 다른 생각은 할 수조차 없게 나를 잠식했다.
체스터가 주는 애정은 너무 달았다. 이 달콤함이 주는 행복에 겨워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못했다.
입술이 떨어지자 불규칙한 호흡과 뜨거운 숨이 터져 나오고 속눈썹은 파르르 하며 떨렸다. 체스터는 내 손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율리아, 사랑합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애정 말고도 노골적인 열망이 담겨 있었다. 대낮부터 이러는 건 좀 아닌 것 같지만 키스 정도는 괜찮으니까.
입술을 달싹이자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다. 또다시 밀려드는 충족감에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체스터의 손이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순간 정신이 확 들며 그를 다급하게 밀쳐냈다.
“……율리아?”
내 행동에 놀랐는지 아니면 크게 당황한 건지 체스터의 동공이 확장되어 있었다.
혹시 내 행동이 그를 오해하게 했을까. 다급하게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는 말을 내뱉었다.
“이 이상은 적어도 밤…… 저녁 이후에 해요.”
“……그러겠습니다.”
일단 침대에서 일어났다. 체스터의 손을 붙잡고 방 밖으로 나갔다.
바깥의 예쁜 풍경들을 두고 답답하게 실내에 있고 싶지만은 않았다.
“구경시켜 줘요!”
“그러죠.”
체스터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 손가락 사이사이에 그의 손가락을 넣어 손깍지를 끼고는 내 보폭을 맞춰 주며 나와 나란히 걸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그의 따뜻한 체온이 좋았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느낀 점은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있겠지만 우리가 가는 곳은 전혀 사람 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데려온 하인들이나 호위 기사들은 보여야 하는 게 아닌가.
“체스터, 왜 사람이 없어요?”
“……있기는 있습니다.”
“있어요? 왜 저는 여기서 체스터 말고 다른 사람은 본 적이 없죠?”
“율리아, 밖으로 나가죠.”
체스터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내 손을 잡고 바깥으로 향했다.
말을 돌리는 건 이유가 있겠지. 굳이 캐묻고 싶지는 않아 체스터의 손을 꼭 붙잡고 따라갔다.
나는 지금 그의 손에 끌려가고 있어서 체스터의 뒷모습만 보였다.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천천히 가자는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인 순간 체스터가 먼저 말을 내뱉었다.
“돌아간다면…… 둘만 있기는 힘들겠죠. 그러니 이번만큼은 단둘이 있고 싶었습니다.”
“…….”
“그리고 원하는 게 있다면 언제든 말해 주세요. 당신이 바라는 건 그 무엇이든 가져다줄 테니까요.”
“……체스터.”
“율리아, 제가 당신한테 바라는 건 단 하나입니다. 제 옆을 떠나지만 마세요.”
체스터는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그대로 나를 잡아당겨 품에 가뒀다.
찰나였지만 그의 얼굴을 봤다. 무척이나 간절한 눈빛을 봐 버렸다. 그런 눈빛을 한 그를 어떻게 떠날 수 있겠어.
나도 체스터의 허리를 그대로 껴안았다.
“제가 사치 부려도 된다는 뜻이에요?”
“네, 마음껏 편히 쓰세요. 황성에 있던 것보다 더 사치를 부리셔도 됩니다.”
“그러다가 재정이 휘청거리면 어쩌려고요.”
“펑펑 쓴다고 휘청거릴 일은 없습니다. 만약 부족해지면 제가 더 벌면 되죠.”
그의 말에 저절로 입가에는 호선이 그려졌다. 체스터가 나를 향하는 그 애정의 크기가 분에 넘치는 것 같아서.
내가 이런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될지.
“그저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히 제 옆에 살아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율리아.”
“그 정도는 당연한 거죠. 근데 이제는 좀 걷는 게 좋겠어요.”
체스터의 허리를 껴안은 팔에서 힘을 풀었다. 나는 팔을 풀었는데 체스터는 그대로 나를 껴안고 있었다.
“체스터, 이제…….”
“조금만 더 이러고 있고 싶습니다.”
내 몸을 끌어안고 있는 체스터의 팔에 힘이 실렸다.
“사랑합니다, 율리아. 그러니…… 제 옆에만 있어 주세요.”
“체스터 옆에 있어 줄 거예요.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아요.”
“불안합니다.”
“뭐가 불안한데요?”
“요즘 꿈에서 당신이 나옵니다. 눈앞에서 당신이 죽는…… 꿈을 꿉니다.”
내가…… 죽는 꿈? 괜한 꿈이었다. 내가 지금의 행복을 두고 죽을 리가.
“영영 제 손이 닿지 않을 곳으로 사라질까 봐…… 두렵습니다, 율리아.”
“안 죽어요. 그냥 개꿈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사랑하는 남자를 두고 죽을 리가 없잖아요.”
“떠나지 말아 주세요.”
나는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역시 내가 꿨던 그가 내 가족을 모두 죽였던 그 꿈은 개꿈이 분명했다.
이렇게 다정한 체스터가 그렇게 잔혹한 짓을 저질렀을 리가. 지금처럼 따뜻한 체스터가 꿈속에서처럼 나를 차갑게 볼 리가 없잖아.
꿈은 꿈일 뿐이야. 그러니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체스터, 저는 떠나지 않아요. 늘 당신의 옆에 있어 줄게요.”
“저는 이제 당신이 없으면 안 됩니다, 율리아.”
체스터의 떨림이 왜 과거에 본 그 애의 떨림과 겹치는 것처럼 느껴질까.
‘기다려 줘, 반드시 강해져서 꼭 너를 데리러 갈게!’
지금처럼 여린 모습을 봤기에 그런 걸까. 내가 기다렸고, 내게 기다려 달라고 했던 그 아이가 체스터라는 확신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근데 왜 이 떨림으로 완벽한 확신이 드는 건지.
“체스터.”
나는 기억하는데, 왜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가려는 내 손을 붙잡고 용기를 내서 내뱉은 것처럼 보였던 그 말을 왜 잊은 걸까.
그리고 체스터가 찾는 여자는 누굴까. 여주가 아니라면 누구를 찾는 건지.
만약 그가 찾는 여자를 만나고 나를 향하는 애정이 그 여자에게로 옮겨가면 어떡하지?
과연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있을까.
“늦어지기 전에 바깥도 구경시켜 줘요.”
“네. 그 전에…….”
나를 꽉 껴안은 그의 팔이 풀렸다. 하지만 그의 손은 이내 내 목과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의문을 품기도 전에 내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닿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먼저 들어오는 달콤한 숨결, 잇새 사이로 파고드는 말캉거리는 살덩이, 모든 감각이 생생했다.
뜨거운 숨결이 타액과 함께 엉켜 들었다.
체스터가 주는 황홀함에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며 무의식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입술이 떨어지자 상쾌한 공기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그대로 체스터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아…….”
더운 숨결이 터져 나왔다. 혹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지는 않을까 부끄러웠다.
“율리아.”
“진짜…… 잘생기면 단 줄 아나.”
“율리아?”
“이제 구경시켜 줘요. 수작 부리지 말고요.”
체스터의 손을 꼭 잡았다. 지금 얼굴을 그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아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체스터는 내 손가락 사이사이에 손가락을 끼워 넣더니 단단하게 손깍지를 꼈다.
그게 싫지는 않아서 그냥 두었다. 그런데 잡은 내 손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손등에 말캉한 무언가가 닿는 게 느껴져 바로 고개를 돌렸다.
체스터가 내 손등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율리아, 이건 수작이 아니라 유혹이라고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