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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58화 (58/141)

#58화

따사로운 햇살에 저절로 잠이 달아났다. 몸을 일으키기 위해 움직이는 순간 엄청난 고통이 온몸을 강타했다.

“윽……!”

곡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온몸의 근육들부터 세포 하나하나까지 아프다고 아우성을 쳤다. 정말 허리는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깼어요? 더 자도 됩니다.”

코앞에서 들리는 달콤한 체스터의 목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눈을 뜨자 내가 베고 있던 건 그의 팔이라는 사실과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한 체스터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내 천천히 시선이 내려가더니 나와 그가 맨살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동시에 어젯밤에 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몸을 살짝 움직이자 허리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 일렁였다.

“힝, 허리 아파…….”

“많이 아픕니까?”

“……그러면 많이 안 아플 것 같아요? 누구 때문에 아픈 건데!”

“흐응…… 다음에는 조금 자제하겠습니다. 오랜만에 해서 그런 거니 이해해 주세요.”

체스터는 다정하게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더니 내 머리에 짧게 입을 맞췄다.

“율리아, 어서 몸 회복해야죠.”

“……왜요?”

“제가 열심히 참고 있는데…….”

체스터는 나직하게 으르렁거리며 손가락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마치 나른한 포식자를 바로 앞에 둔 당장이라도 잡아먹힐 것 같은 먹잇감이 된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당신을 잡아먹고 싶지만…… 제가 인내하겠습니다. 아픈 사람을 괴롭히는 취미는 없어서.”

“체스터!”

“지금껏 참아 온 것에 비해, 어젯밤으로는 한참이나 부족하지만, 당신이 너무 힘들어하니 제가 좀 참아야죠.”

내 입술 위로 체스터의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체스터?”

“이 정도로 만족할게요, 그러니 더 자요. 피곤하잖아요.”

아니, 피곤한 건 맞지만…… 왜 계속 재우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왜 자꾸 재우려고 해요?”

“그야…….”

체스터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은 말을 하다가 마는 건데!

“왜요? 왜 재우려고 하는 건데요?”

“……율리아, 당신은 체력을 더 기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잠으로 체력을 회복하는데…… 한계가 명확하니까요.”

“네?”

“몸이 온전히 회복되면 잡아먹을 테니, 쉬어요. 어제는…… 하아…… 정말 미안해요, 율리아.”

아니, 굳이 미안해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물론, 엉망진창으로 한 건 맞지만 내가 먼저 시작한 건데. 자제력을 잃은 건 네가 맞지만.

그걸 미안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데.

“미안할 필요는 없는데…….”

“제가 좀 자제했다면, 오늘 이렇게 아파하지 않았을 거잖아요. 어제도 좀 아파했는데…….”

“그건 오랜만에 해서!”

그냥 잠이나 자야겠다. 이러다가는 이렇게 아픈 몸으로, 내가 체스터를 덮칠지도 모르겠으니까.

삭신이 쑤셨다. 방금 깼지만, 그냥 자야겠다.

잠이 약인 것 같으니까.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 * *

다시 일어났을 때는 옆에 체스터가 없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인기척조차 없어서 옆을 손으로 더듬자 식어 있었다.

몸을 움직이자 온몸에서 뿌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도 아침에 일어났을 때보다는 덜 아파서 테이블에 놓인 옷을 입고, 가벼운 숄을 걸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밖은 전혀 춥지 않았다. 날씨가 맑아서 그런지 아니면 아직 가을이라 그런 건지. 여름처럼 덥지는 않았지만 추운 것도 아니었다.

망설임 없이 해변으로 달려갔다.

신발을 벗어두고 드레스를 살짝 잡아 든 채 에메랄드빛 바닷속에 발을 담갔다.

발목까지 닿는 물의 온도가 시원해서 좋았다. 발바닥에 닿는 부드러운 모래의 감촉도 좋았다.

발을 이곳저곳 내딛고선 첨벙첨벙거리며 물장난을 쳤다.

“흐응…….”

저절로 콧소리가 흘러나왔다. 불어오는 바닷바람의 방향대로 흐트러지며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피부를 간지럽혔지만, 그조차도 좋았다.

이제 더는 체스터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일까. 더는 내 본능이 그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체스터가 싫지 않다는 것, 더는 밀어낼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 내게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 주는 게 행복했다.

온몸으로 바닷바람을 만끽했으니 이제 체스터가 걱정하기 전에 돌아가기 위해 바다에서 나오던 중이었다.

“율리아.”

창문으로 나를 본 걸까?

체스터는 가볍게 셔츠 한 장과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들고 온 담요를 내게 걸쳐 주었다.

“그렇게 입으면 감기 걸립니다.”

“추운 날씨도 아니고, 이 정도는 괜찮…… 앗!”

체스터는 갑자기 내 무릎 뒤에 팔을 넣더니 다른 손으로는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으며 안아 들었다.

공주님 안기 자세로 그의 품에 안긴 상태였다.

바로 가까이에 그의 얼굴이 보여서 심장이 무진장 뛰기 시작했다. 혹시 얼굴도 붉게 변하진 않았을까 걱정이 됐다.

팔을 그의 목에 휘감아 절대로 떨어지지 않게 안겼다.

“일어났는데…… 체스터가 없어서…….”

“제가 없어서 놀랐습니까?”

“놀란 건 아니고…….”

“계속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그냥…… 밖에 나와 보고 싶었어요. 너무 예뻐서.”

툭-

체스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방금 봤던 그의 표정은 내가 말없이 사라져서 놀란 사람의 얼굴로 보였다.

“율리아, 몸은 괜찮습니까?”

“네, 괜찮아요. 조금 욱신거리긴 하는데 그래도 아침보다는 괜찮아요.”

“다행입니다.”

“체스터, 전에 했던 말 기억해요?”

“무슨 말을 말하는 겁니까.”

“당신이 예전부터 찾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요.”

많은 생각 후에 꺼낸 말이었다. 내가 찾는 그 아이는 체스터가 맞다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비록 그가 나를 만난 적이 없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완벽한 확신이 아니더라도 내가 찾아온 아이는 체스터가 맞다는 미약한 확신이 있었다.

금발…… 까지는 몰라도, 체스터가 찾는 사람이 녹안이든, 벽안이든, 그건 내 눈동자 색이 아니라는 건 자명했다.

지금의 내 눈은 선명한 보랏빛이고, 한때는 주황빛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 외의 색은 내 눈동자 색이 아니었다.

체스터의 대답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길 바라면서.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왜요?”

“이제 더는 찾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꽤 오래전부터 찾던 사람인 것 같은데. 왜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요? 제 눈치를 보는 거라면 괜찮아요.”

“당신이 있는데 제가 다른 사람을 찾을 이유는 없죠.”

다정한 체스터의 목소리 때문인지 달콤한 말 때문인 건지 아무튼 체스터로 인해 내 심장이 미친 듯이 팔딱거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황 앞에서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슬쩍 고개를 올려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지금 내 눈에 비친 체스터의 눈동자는 어젯밤과 같은 노골적인 욕망이 아닌 온기가 넘치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나를 향해 미소 짓는 얼굴에 입 안에 고인 침이 꼴깍하는 소리를 내며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요.”

“체스터, 저는…….”

“그러니 불안해하지 말아요. 제가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율리아.”

“저도…… 사랑해요.”

어느새 체스터의 품에 안겨 그의 얼굴을 감상하다 보니 침실까지 와 있었다.

그는 나를 침대에 앉히며 내 몸 이곳저곳을 세심하게 살피면서 내 몸 상태를 물으며 확인했다.

“정말 괜찮습니까? 춥거나 덥거나 하지는 않고요?”

“정말 괜찮아요!”

“다리나 허리는 괜찮나요?”

“네! 진짜 괜찮아요! 그러니 걱정 안 해도 돼요.”

체스터가 나를 걱정하는 게 싫다는 건 아니었지만 조금 과하다는 느낌은 있어서 부끄러웠다.

정말 왜 계속 이런 걸 물어보는 건지.

“하…… 괜찮다니 다행이네요.”

“왜요?”

“이제야 제약에서 해방되지 않았습니까. 어젯밤에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힘들다고 잠드는 바람에 오늘 마저 하려 합니다.”

그가 한 말이 무엇인지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단번에 알아들은 만큼 얼굴이 화르륵거리며 불타올랐다.

“체스터!”

그는 내 반응이 재밌었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잡아먹고 싶을 만큼 너무 사랑스럽고 예뻐서 그럽니다.”

“진짜……!”

“그만큼 제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율리아.”

체스터는 그 말과 함께 내 다리 위에 천천히 입을 맞추며 슬금슬금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곳은 불에 덴 것마냥 뜨거운 동시에 간지러웠다.

조금씩 위치를 은밀한 부위로 옮겨가는 체스터의 난감한 행동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래! 이렇게 난감한 상황에서는 그냥 말의 주제를 바꿔버리면 그만 아닌가?

“체스터, 이제 안 바빠요?”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체스터는 내가 바쁘냐는 말에 몸이 흠칫하며 반응하더니 내 다리에서 지분거리던 입술을 떨어뜨렸다.

“그동안 바빠서 만나지도 못했잖아요. 공작저에 가면…… 늘 체스터는 일만 하고 있었잖아요.”

“일보다 당신이 더 중요합니다, 율리아.”

“그리고 오늘도 더 자라고 해 놓고 일어나니까 옆에 없고…….”

“제게 있어서 우선순위는 당신이 제일 앞입니다. 다음부터는 꼭 옆에 붙어 있겠습니다.”

“흐응…….”

“겨우 일 따위가 중요합니까? 당연히 당신이 더 중요하죠.”

진심 같기는 했다. 사실 입 발린 소리라 할지라도 괜찮았다.

어차피 나는 일을 하는 걸 방해할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그저 말이라도 저렇게 해 주는 게 좋을 뿐이었다.

정말이지 체스터는 듣는 사람 기분 좋게 말을 참 예쁘고 달콤하게 했다.

“저는 괜찮아요. 보니까 되게 바빠 보였…….”

“아닙니다. 전혀 바쁘지 않습니다, 율리아.”

“하지만 미안한걸요.”

원래도 일이 많았던 사람인데, 내가 그를 귀찮게 하는 건 아닐까.

그냥 이렇게 먼 바깥으로 신혼여행을 오지 말고 그의 영지로 가는 게 옳았을까.

“율리아. 미안해하지도, 불편해하지도, 불안해하지도 마세요. 언제든 제가 보고 싶거나 함께하고 싶다면 말해 줘요.”

“…….”

“제게는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그 무엇보다도 더 소중하고, 중요합니다.”

체스터는 내 무릎에 입을 맞췄다.

이내 체스터는 천천히 입술의 위치를 옮겨갔다. 기분 탓이 아니라면 그의 입술은 허벅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는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이유든 상관없이 당신이 최우선입니다, 율리아.”

체스터는 내 허벅지 안쪽에 입을 맞췄다.

아주 천천히 느릿하게 점점 은밀한 부분으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눈을 감고 천천히 입을 맞췄다면 지금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진득하게 입술을 지분거렸다.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율리아, 지금 당신 얼굴이 엄청 빨갛습니다.”

“당신 때문이잖아요!”

“저 때문입니까?”

저렇게 웃으면서 말하는데 밀어낼 수도 없고, 밤이었다면 괜찮겠지만 지금은 환한 대낮이었다.

“율리아, 혹시 아이를…… 가지고 싶습니까?”

“후계 때문이라도 한 명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

“이왕이면 체스터를 닮은 아들이면 좋겠어요.”

나는 체스터의 얼굴을 후세까지 이어지게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번 대에서 그의 얼굴이 끊기면 안 되니까.

체스터를 마지막으로 해서 사라지기에는 너무 아까운 얼굴이니까. 후세까지 계속 보존하려면 아이를 낳아야겠지.

그의 아이라면 한 명이나 두 명은 낳을 수 있었다. 둘 다 체스터를 닮은 아이들이면 좋겠는데.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이 그저 체스터를 닮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스터는 아들보다 딸이길 원하는 걸까?

“율리아, 저는 없어도 됩니다.”

“……네?”

처음에는 내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한 가문의 가주가, 그것도 지크베르트 공작이 아이가 없어도 된다는 말에 놀라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평생 당신과 단둘이 살아가는 게 기쁩니다. 굳이 아이가 필요하지 않도록…….”

“그러면 후계자는요?”

“후계자는 방계 쪽에서 찾아 입양하면 그만입니다.”

“……정말요?”

“네, 진심입니다.”

체스터를 이해할 수 없었다. 보통은 후계자 때문이라도 최소 한 명은 생각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없어도 된다고?

“……이해하기 어려워요.”

“당신의 시선이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하는 게 싫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눈에는 오로지 저만이 담기면 좋겠습니다, 율리아.”

심장이 두근거렸다. 억눌린 무언가가 해소된 기분이 들었다.

무척 간절히 바랐던 것을 이룬 듯한 시원함이 느껴졌다. 이 감각의 원인은 무엇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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