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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57화 (57/141)

#57화

어느새 멀게만 느껴졌던, 주례석이 보였다. 황녀의 결혼식인 만큼, 주례를 보는 사람은 교황이었다. 사치도 이런 사치가 있을까.

“체스터 지크베르트와 율리아 베아트리스는 평생 함께하고 서로에게 충실할 자신 있으십니까.”

“네.”

“신랑 체스터 지크베르트는, 신부 율리아 베아트리스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조금의 망설임조차 없는 체스터의 대답에 미친 듯이 두근대는 내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혹여 체스터에게도 이 소리가 들릴까 걱정이 될 정도로.

“신부 율리아 베아트리스는, 신랑 체스터 지크베르트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대답이 끝나자마자, 교황은 서약서를 나와 체스터 앞에 들이밀었다.

서명하라는 빈칸이 남아 있었다. 체스터가 먼저 그곳에 망설임 없이 이름을 적고 내게 넘겨주었다.

비어 있는 남은 칸에 내 이름을 적어 넣었다.

서명이 끝난 서약서를 가져간 교황은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다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만큼 바쁜 사람이 있다면 그건 교황이었으니까. 이렇게 한가로이 주례나 보는 사람이 전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저번에 오빠가 결혼할 때도 왔던 사람이니 충분히 이해됐다.

그렇게 나와 체스터의 결혼식은 끝났다.

* * *

결혼식이 뭐라고 이렇게 피곤한 건지. 온몸이 쑤시고 아픈 것 같았다.

편한 드레스로 갈아입고 마차에 탔다. 물론, 마차에서 체스터의 무릎을 베개 삼은 채로 누운 상태였다.

당연히 탈 때는 마주 보고 탔지만, 사람들이 보이지 않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쭉 이 상태였다.

“체스터…….”

“네.”

“저 피곤하고, 힘들고, 멀미 나고, 움직이기도 싫고…….”

“흐음…… 그러면 조금 곤란한데요. 도착하면 깨워 드리겠습니다. 이러고 잠들어도 됩니다.”

이거 나보고 빨리 잠이나 자라고 강요하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체스터. 제가 빨리 잠이나 잤으면 좋겠어요?”

“흐응…… 글쎄요?”

의미심장한 부드러운 눈웃음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속에서 일렁였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그의 얼굴이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것은.

“체스터……?”

그대로 온몸이 돌처럼 얼어붙었다. 심장이 이대로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체스터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당장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만 같이 가까웠다.

“체스터?”

“눈 감아요.”

체스터의 말에 눈을 감는 순간,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쳐 왔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기에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벌어진 입술 틈 사이로 혀를 밀어 넣더니 입 안을 구석구석 헤집고서야 입술을 떨어뜨렸다.

속눈썹이 무의식적으로 파르르 떨렸다.

끝난 건지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눈을 살며시 떴다. 열망이 한가득한 핏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율리아, 저희가 결혼하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습니다.”

“그, 그렇죠……?”

“제가 약속을 지켰으니, 이제는 율리아.”

그의 손이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전혀 부드럽지 않고 음험하기 짝이 없었다.

체스터의 입에서는 어떠한 말이 나올지 두려울 지경이었다.

지금 그의 붉은 눈동자는 나를 한입에 잡아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협적으로 보였으니까.

“당신이 지킬 차례입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키스만 하자고 했으니, 결혼한 지금은 그 이상의 것을 해도 된다는 뜻이잖아요.”

“……네에?”

잠시만! 아니, 왜 말이 그렇게 되는 건데?

물론, 내가 결혼 전까지 키스만 하자고 제안을 한 사람은 맞는데! 그걸 수락한 건 너였잖아.

그러니 이렇게 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 그건 맞지만……! 그래도…….”

그의 엄지손가락이 내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침이 목구멍으로 꼴깍하는 소리와 함께 넘어갔다.

괜히 체스터가 위험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원래부터 안전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체스터가 무섭게 느껴지는 건가. 왜 나는 본능적으로 그에게서 위험함을 느끼는 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율리아. 이제는 제가 인내할 이유가 없는 거겠죠?”

분명히 웃는 얼굴인데,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위협이었다.

그의 손이 드레스에 가려진 내 다리를 꾹 눌렀다. 아픈 건 아니었지만, 당장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위협이 느껴졌다.

심지어 여기는 마차 안인데!

“아뇨! 꼭 인내해야 해요!”

“……왜죠?”

여기서 내가 말을 잘해야 했다.

만약 내가 여기서 조금이라도 말실수하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여기서 시달릴 게 분명하니까.

그런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체스터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으니까.

“결혼하고 처음 할 때는 침대에서 하고 싶어요.”

“…….”

“그리고 여기서는 싫어요. 불편하고…….”

내 앞날을 생각하면, 마차에서는 내가 녹초가 되다 못해,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힘들 게 분명했으니까.

이렇게 한정된 공간에서 하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네. 어떤 말인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적어도 지금 마차 안에서는 건들지 않겠습니다.”

다행히 체스터는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아직도 열망이 가득하게 묻어난 표정에 당장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채웠다.

왜냐하면 체스터의 말은 경고였다. 도착해서 마차에서 내리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

“율리아.”

“……네?”

“사랑합니다.”

체스터는 내 머리카락 위에 입을 맞추며, 포식자의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애정 한 스푼, 욕망 한 스푼이 담긴 짙은 열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눈빛에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이것만 알아주세요. 제가 당신을 무척 사랑하고 있다는 걸요.”

“…….”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체스터의 눈빛은 애틋했다. 정말 나를 사랑해서 미칠 것 같은 사람처럼 보였다.

체스터가 찾는 사람이 누구든 상관없었다. 그게 누구든 그가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사람은 나니까.

그의 애정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나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테니, 괜찮았다.

근데 왜 체스터는 은근슬쩍 내 옆으로 붙어오는 건지.

“체스터.”

“네.”

“좀 떨어져요.”

이러다가는 심장이 터져서 죽을 것 같았다. 너무 가까웠으니까.

체스터의 어깨를 밀었다. 그래도 내가 미는 대로 순순히 밀려나 주었다.

“도착하면 깨워 줘요.”

“네. 그러겠습니다.”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다.

* * *

“으음…….”

아, 푹신거려. 완전 부들부들하고 따뜻하고 아늑해. 잠은 깼는데, 되게 편해서 일어나기가 싫었다.

응? 잠시만 푹신하다고?

깜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마차 안이 아니라 침대 위였다.

“깼습니까?”

“……체스터?”

체스터는 이미 씻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나이트가운을 입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물기로 젖어 있었다.

“너무 곤히 잠들어서 깨울 수가 없었습니다.”

“…….”

“걱정 마세요. 당신이 원치 않으면, 조금도 건들지 않을 테니까요.”

저 말을 믿어도 될까. 내가 보기에는 마차에서만 하더라도 오늘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보였는데.

근데 왜 이렇게 물기 어린 머리카락을 한 체스터가 섹시해 보이는 거지?

잘생긴 얼굴에 젖은 머리카락이라니, 게다가 나이트가운까지. 정말 완벽한 조합이었다.

설마…… 노린 건가?

“저 씻고 올게요!”

“네. 데려다줄까요?”

“아뇨! 혼자 갈 수 있어요!”

“흐응, 씻겨 줄 수 있는데.”

“사양할게요!”

* * *

괜히 심장이 떨렸다. 고작 이게 뭐라고. 처음도 아닌데 처음인 사람처럼 괜히 긴장이나 하고.

진짜…… 체스터는 쓸데없이 너무 잘생겨서 탈이었다. 얼굴 빼면 시체일 정도로, 얼굴이 아주 열일했다.

다 씻은 후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젖은 머리카락은 수건으로 대충 물기만 털었다.

이 상태로 체스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많이 바빠요?”

문을 열자 보인 체스터는 안경을 쓴 채로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일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짠했다.

체스터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는 펜을 내려놓고, 쓰고 있던 안경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데 왜 그런 사소한 행동이 내 심장을 마구잡이로 뒤흔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율리아. 그렇게 젖은 머리로 있으면 감기 걸리십니다.”

“……말릴 거예요.”

“제가 말려 드리겠습니다.”

“제가 말릴 수 있는…….”

“제가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체스터에게 끌려가서 강제로 머리를 말리는 상황에 이르렀다.

체스터는 나를 의자에 앉히고, 굳이 손수 수건으로 내 머리에 묻어난 물기를 말려 주고 있었다.

“체스터.”

“네?”

“가까이 와 봐요.”

툭-

수건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대로 망설임 없이 체스터의 목에 팔을 휘감아 내 얼굴과 가까워지게 그를 잡아당겼다.

그대로 그의 입술 위에 내 입술을 포개었다.

시작은 분명 내가 했는데 정신을 차린 순간부터 주도권을 체스터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잇새로 타액과 함께 말캉한 살덩이가 밀려 들어오면서 안을 온통 헤집어 댔다. 더운 숨이 안에서 내 호흡과 뒤섞였다.

체스터의 손이 내 뺨을 붙잡아 얼굴을 움직일 수 없도록 단단히 고정하고는 다른 손으로는 내 허리를 붙잡아 공중으로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안을 탐하던 그의 살덩이는 내 혀를 건드리더니 집어삼키면서 어지럽게 뒤엉켰다.

“하아…….”

입술이 떨어지자 투명한 실이 길게 늘어나다 툭 끊어졌다.

정신을 차리자 화장대 앞 의자에 앉았던 몸은 그의 품에 들려 있다가 지금은 등이 푹신한 침대에 닿아 있었다.

다리 사이로 체스터의 무릎이 파고들었다.

그의 입술은 목선을 타고 천천히 내려가 쇄골에 안착했다. 체스터의 입술이 닿은 피부가 간지러웠다.

“흣, 체스터……!”

“허락한 거로 생각하겠습니다, 율리아.”

체스터의 손이 머리카락을 파고들었다. 다른 손으로 다리를 천천히 쓸어 올리는 그 손길이 좋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손이 몸을 감싸고 있는 가운의 끈을 붙잡았다.

“지금까지 많이 참아 와서…… 멈춰 달라고 애원해도 오늘은 멈출 생각 없습니다.”

체스터의 핏빛 눈동자에는 선명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그의 노골적인 시선과 내 시선이 얽혀들었다.

팔을 뻗어 그의 얼굴을 잡아당겨 그의 뺨, 입술, 목에 순차적으로 입을 맞췄다.

체스터는 내 행동에 놀랐는지 잠시 두 눈이 커졌다가 이내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너무 잘생겨서 넋을 잃은 채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도 지금껏 참아 온 보람이 있네요.”

체스터의 입가에는 은은하게 아이처럼 순수하면서도 햇살처럼 환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눈빛은 조금도 순수함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지만.

체스터는 내 뺨과 목에 키스를 퍼부었다.

체스터가 나를 무척 소중하게 대해 주고 있다는 건 이어지는 그의 손길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가 체스터에게 무척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이 피부에서부터 시작되어 머릿속을 잠식했다.

“흐읏……!”

다리 사이로 밀려 들어오는 그의 존재감에 저절로 동공이 확장되며, 옅은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새하얬다.

처음도 아닌데. 좀처럼 익숙해지지를 않았다.

밀려오는 버거움에 적응할 시간도 없이, 체스터가 이를 세워 목덜미를 물어 버렸다.

“아흑……!”

한 손으로는 허벅지를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입고 있는 옷을 벗어 침대 아래로 던졌다.

고통과 뒤섞일 익숙한 감각이 밀려오기 전까지 버텨야만 했기에, 손을 뻗어 체스터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침대 아래로 떨어져 나뒹굴고 있는 나이트가운처럼 두 남녀의 몸이 뒤엉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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