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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56화 (56/141)

#56화

“힝, 보고 싶어…….”

내 결혼식은 갑작스럽게 잡힌 일정인 만큼 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았었다. 그 여파로 하루하루가 바쁜 만큼 체스터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았다는 거였다.

나도 바빴지만, 체스터가 훨씬 더 바빴다.

몇 번 체스터를 보러 공작저에도 갔지만 매번 보는 건 그가 일하는 모습뿐이어서 내가 그를 방해하는 기분이 들어 최근에는 방문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를 본 게 웨딩 초상화를 남길 때였다.

“황녀님. 웨딩드레스만 완성되면 시간이 많아질 거예요. 그때는 공작 각하도 시간이 있을 테니 너무 힘들어하지 마세요.”

“응…….”

“이제 웨딩 슈즈랑 귀걸이, 목걸이만 선택하시면 돼요.”

“유모는 뭐가 제일 예쁜 것 같아?”

“무엇을 해도 황녀님께는 전부 잘 어울릴 거랍니다.”

웨딩드레스부터 크고 작은 것들까지 전부 전담했던 마담이 와서는 이번에는 수많은 장신구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래도 오늘은 쉬운 편이었다. 웨딩드레스를 고르고 수정할 때가 제일 바빴으니까.

어렵지 않게 목걸이와 귀걸이를 선택했고 잠시 숨을 돌렸다.

“황녀님, 댄스 선생님이 오셨답니다.”

“……해야겠지?”

“네. 이제는 황녀님이 아니라 공작 부인으로 사셔야 하니까요.”

무엇보다 제일 힘든 건 사교댄스였다. 새삼 내가 꿀 빠는 황녀로 살아왔다는 걸 생생하게 느꼈으니까.

정말 지금까지 사교계에 나가지 않았다는 게 천운이었다. 소설 속 율리아는 나와 달리 몸치가 아니었던 걸까.

이제 더는 황녀가 아닌 공작 부인으로 살아가야 했기에 뒤늦게 사교댄스를 배우게 됐는데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었다.

삐거덕거리는 건 많은 연습 끝에 나아졌지만 발을 계속 밟는 건 전혀 나아지지를 않았다.

“황녀 전하…….”

하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실수는 잦았다. 선생님도 이런 내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다.

아니, 그저 말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라는 뜻일까.

“오늘 수업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네에…….”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지셨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뭐든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래도 선생님은 친절했다. 물론 말만. 몇 번이나 반복했던 건지 발가락이 아팠다. 그렇게 두 시간 동안 재능도 없는 춤을 췄다.

녹초가 된 몸을 침대에 눕혀 달콤한 휴식을 주었다.

유모가 씻고 누우라고 했지만 모든 게 귀찮았다. 그냥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흐물흐물한 몸을 가만히 두고 싶었다.

“체스터…….”

체스터를 보지 못하는 만큼 더 보고 싶다는 마음은 커졌다.

그를 무의식적으로 의심했던 마음은 이제 존재를 감췄고 그를 사랑한다는 마음이 크게 자리를 잡았다.

“보고 싶어.”

* * *

결국 결혼식 당일까지 체스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오늘이 결혼식이었기에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향유로 목욕을 하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받았다.

두 눈을 감고 얌전히 시녀들에게 얼굴을 맡겼다.

“황녀 전하, 다 끝나셨어요.”

감은 눈을 뜨자 바로 앞에 비치된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눈처럼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올려 묶여 있었으며, 투명한 다이아몬드로 세공된 목걸이와 귀걸이.

피부는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동시에 유리알처럼 투명했다.

정말 내가 보기에도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예쁘다는 감탄의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황녀 전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아요!”

시녀들마저도 극찬을 할 정도였으니 내 눈이 틀린 건 아니었다.

체스터의 반응도 궁금했다. 과연 그는 나를 보고 어떤 반응을 내비칠지.

“이제 면사포만 쓰면 되겠어요!”

시녀들은 발 빠르게 움직여 내게 면사포를 씌우고 가져온 웨딩 슈즈를 신겼다. 이제 내 몫의 결혼식 준비는 전부 끝났다고 할 수 있었다.

드레스를 혼자서는 들 수가 없어 시녀 두 명이 달라붙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대에서 편한 소파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녀 전하,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이십니다.”

“들여보내.”

문이 열리면서 아빠와 오빠의 얼굴이 보였다.

오늘이 ‘율리아 베아트리스’로 두 사람을 마주하는 마지막 날이니까. 앞으로는 ‘율리아 지크베르트’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예정이니까.

황족이라는 핏줄은 변치 않겠지만 더는 황가의 일원이 아닌, 지크베르트 공작가의 일원으로 살아갈 테니까.

“율리아…… 네가 정말로 결혼할 줄은 몰랐단다.”

“황실 입장에서 봐도 지크베르트 공작보다 더 좋은 사윗감은 없지 않아?”

“율리아, 이 아빠는…… 진정 네 행복을 바란단다.”

“응. 행복하게 살 거야.”

“네가 결혼하지 않고 이 아빠랑 평생 함께 살 거라고 했었는데…… 결국 이렇게 됐구나.”

“그래도…… 체스터 정도면 아빠도 만족하잖아. 황족을 제외하고 가장 높고 고귀한 신분에 잘생긴 얼굴까지!”

그리고 몸과 밤일까지. 부족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니까.

아, 성격은 좀 부족한가?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했을 때 지금은 내게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니까, 괜찮았다.

“체스터가 재력이 부족하기를 해, 작위가 떨어지기를 해. 이 정도면 황녀의 부군으로 적합하잖아!”

나는 체스터가 내가 예전에 만났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지금껏 살아 있게 해 줬던 그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체스터가 맞는 것 같았다.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그가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확률이 높지만.

검은 머리카락인 것도, 그 나이대에 부모가 모두 사망한 것도, 나와 나이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도.

그리고 뒤늦게 알아낸 사실로는 내가 황성에서 가출했던 그 장소가 전 지크베르트 공작 부부의 장례식을 이행했던 곳과 가까웠던 점도.

이 모든 단서들이 체스터라는 확신을 가지게 했으니까.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을 이해했다. 체스터가 맞다면 그때 이후로는 늘 전쟁터에서 살아온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도 싫은 건 아니야. 오히려 좋아. 솔직히 말하면…… 체스터는 되게 잘생겼잖아!”

“그래. 율리아, 네가 만족하고 좋아한다면 되는 거겠지. 그럴 일은 없길 바라야겠지만 싫거나 불만족스럽다면 언제든지 황성으로 돌아오렴.”

“응! 그럴게!”

“그래…… 우리 딸이…… 벌써 결혼을 하는구나.”

아빠의 표정이 어딘가 슬퍼 보였다. 그래서 아빠를 꼭 안아 주었다. 앞으로는 보고 싶어도 얼굴 보기가 지금처럼 쉽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도 많이 찾아올게.”

“그래. 말만 하지 말고, 꼭 와야 한단다. 우리 사랑스러운 딸…….”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무리 체스터가 최적의 혼처긴 해도,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게 두 눈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불안한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런 아빠를 이해했다. 이제야 과거를 털었는데 결혼을 하는 거니까.

“오빠.”

“…….”

“오빠는 할 말 없어?”

“예뻐.”

“그게 끝이야? 정말 더 할 말 없는 거 맞아?”

예쁘다는 말이 싫은 건 아니라 입꼬리가 씰룩대는 건 주체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혼 축하한다는 말은 듣고 싶었는데.

아빠는 결혼하는 딸이 아니라 영영 이별해야 하는 딸을 대하듯 굴고 있는데, 오빠한테서는 간절함도 애틋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빠도 결혼하더니 변한 거야?”

“그럴 리가.”

“아니야? 정말 하고 싶은 말 없어?”

“……꼭 자주 와야 해.”

“응! 꼭 자주 올게!”

그럼 그렇지. 오빠가 아무리 결혼했다지만 겨우 예쁘다는 말 한마디만 할 리가 없었다.

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녀 전하, 결혼식 준비가 다 끝나셨…… 황제 폐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 왜 두 분이 여기에 계십니까?”

“짐이 왜 여기 있겠나, 짐의 하나뿐인 딸을 보러 온 거지.”

“……폐하께서는 황녀 전하와 함께 오시고, 태자 전하께서는 미리 가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빠가 먼저 나가고, 이어 나와 아빠가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준비는 끝났다. 마음의 준비도, 지금 내가 잡은 손이 아빠의 손에서 체스터의 손으로 바뀌어도, 이제는 괜찮을 테니까.

이제는 정말 괜찮았다. 체스터는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나도 체스터를 사랑하니까.

그와 결혼할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모두의 말대로, 내 결혼식은 역사서에 길이 남을 가장 규모가 큰 성대한 결혼식일 터였다.

어쩌면 오빠의 결혼식보다도 더 화려하고 과하다는 말이 무의식적으로 나올 만하게 휘황찬란했다.

눈이 부시도록 환한 하늘 아래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어왔다.

그리고 눈앞에는 흑발을 가진 나를 사랑해 줄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상냥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빠의 손을 잡고 있었던 내 손은 이제 체스터의 손바닥 위로 옮겨갔다.

그대로 체스터와 손을 맞잡은 채로 함께 주례석까지 걸었다. 가까이서 본 체스터는 정말로 잘생겼다.

아니, 잘생겼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것 같은 그저 빛과도 같은 외모였다.

그런 체스터가 잠시였지만 나를 빤히 바라봤다. 오히려 그 바람에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을 치며 주체하지를 못했다.

“율리아.”

“네, 네에……?”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내 이름을 속삭이자 당황해서 말이 약간 더듬거리며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어…… 음…… 잘생김?

굳이 묻은 게 뭐냐 찾는다면 그에게는 잘생김이 묻어 있었다.

정말이지 원래 잘생겼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너무 잘생겨서 시선을 떼고 싶어도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정말로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니요! 전혀 아무것도 안 묻었는데요….”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슬쩍 눈동자만 굴려서 체스터를 보는 순간, 그의 웃는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뻐서 저렇게 웃는 걸까.

“……체스터.”

“네. 율리아.”

“남들 앞에서 그렇게 웃지 마요.”

그렇게 웃지 말라고 했는데 체스터는 세상에서 가장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당신이 그러길 원한다면 그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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